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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차가웠던 격리의 기억

엄혹하게 느껴졌던 홍콩 호텔 생활

1년여 전, 한국에서 5주 정도 머물다 홍콩으로 돌아갔다. 당시 내 계산은 '이번 겨울에라도 안 가면 팬데믹 끝날 때까지 한국 방문을 못하겠구나'였다. 맞았다.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고 며칠 후, 홍콩 정부는 해외 입국자에게 조치한 자택 격리를 갑자기 2주 호텔 의무격리로 바꿨다. 격리기간은 3주로 늘어나고, 2주로 줄었다가 지금은 다시 3주다.


내가 홍콩에 돌아갈 당시는 2주였다. 정부에서 지정한 일부 호텔들에 격리 수요가 몰리던 때라 원래도 워낙 비싼 홍콩 숙박료가 치솟기 시작했다. 어떤 이에게는 한 달치 월급이다. 반대로 여행이 제한되니 격리지정 호텔이 아닌 곳들의  숙박료는 낮아져, 레지던스 호텔처럼 '한 달 살면 파격가 HKD9,500' 등으로 마케팅하는 호텔들도 꽤 많았다.


어쨌든 내겐 참 잊을 수 없는 2주간의 생활을 여기에 풀어보고자 한다.


홍콩 입국 첫날. 저녁시간에 도착했는데 공항에 코로나 검사 부스를 만들어 현장에서 PCR검사를 했다. 음식 알러지가 있는지 간단히 묻고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나눠주고 검사 결과 나올때까지 한 사람씩 의자에 앉아 홍콩 뉴스를 보며 대기하게 했다. 샌드위치는 참 허접했다...남자들은 매우 배고팠을거 같다. 대기를 하고, 버스로 또 어디로 이동을 했다가 거기서 또 기다리게 하고, 어느 유령 나올 것 같이 으스스한 호텔로 이동했다. (외벽이 공사중인듯 유리창없이 비닐로 싸여있었다)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설 수 있는 샤워실엔 비누조차 없었다. 프론트에 전화하니 원래 비누 없단다. 청소도 전혀 안 됐고, 베개는 사각사각 소리가 나서 베갯속을 보니 쿠션이 아니라 비닐 뭉치같은 것들을 넣었다. 내 참 세상에 이런 베개 첨 본다...아주 싸구려 호텔에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이런 침대 둘.  

객실문에 직원이 비닐봉지를 놓고 갔다. 밥과 카레였다.

엘레베이터에서 젊은 홍콩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가 유창한 영어로 "너무 끔찍하지 않니? 여기 무슨 19세기 호텔 같아"라고 했다. 로비로 나가니 택시, 버스, 지인의 라이드를 이용하려는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통제가 안되어 화이트보드에 방 호수 이름을 쓰고 누구 누구 나간다고 적고 지운다.


내가 이동한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사이잉푼의 베스트 웨스턴 호텔이었다. 작은 침실 2개가 붙어있는 공간을 하나로 합친 것 같았다. 책상과 소파, 티비가 있는 방 밑에 하수구가 있었고 책상 밑엔 설치물이 있어서 의자를 완전히 당겨 앉을 수 없었다. 거북자세가 참 불편했다. 올드한 느낌의 벽지 무늬는 너무 답답하다 못해 내 목을 죌 것처럼 공포스럽고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간이 스탠드를 구해왔지만 조명이 너무 어두워 저녁 6시반 이후가 되면 일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방 안은 너무 추웠다. 20분 간격으로 소파, 침대, 책상을 왔다갔다하며 원격근무를 했다. 홍콩은 실내 중앙난방이 없어 초겨울이 되면 실내가 바깥보다 훨씬 춥다. 밖에서가 아니라 집 안에서 감기걸린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교회 신임 목사님은 아내분과 100일된 딸까지 함께 이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생수도 엄청 많이 주고 아주 배려받으며 지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소파에서 이불과 베개를 갖다놓고 일을 하고 밥도 먹었다.
내 마음 달래려고 한국서 가져온 크리스마스 팝업 카드와 인형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나눠준 크리스마스 선물상자.
격리자의 전자팔찌. 주변에는 자택격리시 이것 집에 두고 외출하고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호텔에서 내다본 풍경. 나쁘지 않았음에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글을 쓰며 그 때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시 생생히 떠오른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우울감을 가져왔는데 온몸이 덜덜 떨리게 춥고, 어두우며, 일할 때도 불편하고, 벽지 분위기며, 머리카락을 한 번만 안 치우면 온 바닥에 물이 흘러넘치던 샤워실 등. 나는 감정적으로 너무 연약했고 모든 것에 불만 투성이였다. 회사에서는 크리스마스 과자박스를 보내왔는데 그마저도 참 맛없는 것들만 골라 넣었다며 불평이었다. 정신적으로 더더욱 패닉 상태가 되어 한낮에도 이불을 쓰고, 카톡에 간단한 질문이나 안부를 묻는 사람들 메시지를 열지도 못했다. 마음은 늘 울고 있고, 뭔가를 읽기도 쓰기도 힘들고, 하루 하루 안정적으로 살아내기가 힘들었다. 저녁 6시반이면 방이 너무 깜깜해져 기를 쓰고 일하며 밤 9시가 넘어 겨우 뭔가를 제출해도 상사는 기준에 못미친다는 피드백을 보냈다.


그렇게 격리 기간 중반이 지났을 때 회사에게 내 업무에 대해 조금 심각한 평가를 받았고 나는 어찌할 바 모르게 무너져내렸다. 그날 저녁 8시, 내가 홍콩에서 온라인으로 모은 '대체투자 스터디'의 첫 줌콜이 있었다. 한국에서 취재한 투자 트렌드를 풀겠다고 선언했기에 방황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7시 57분까지도 갈피를 못 잡다가 겨우 이성을 찾고 임했는데, 의외로 미팅 참여자들은 굉장히 유익했다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마음을 달랬다. 유튜브에 브라우니바니라는 토끼 유튜브를 정신없이 몰아서 보고, 넷플릭스에서 콩고와 인도의 여성문제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며 대학생 때 품었던 인권활동가에 대한 꿈을 떠올리기도 했다. 넷플릭스에서 (지금은 사라진) The Polar Express라는 애니메이션을 감미롭게 봤다. 예전에 무척 좋아했던 볼빨간사춘기의 음악을 몰아서 듣기도 했는데 흥이 나진 않았다. 대신 메인보컬 그녀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 활동을 중단한다는 기사를 봤다.


격리가 끝나고 나온 세상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었다. 호텔 실내의 그 쎄하고 차디찬 기운과 달리, 바깥 날씨는 온화하고 따뜻했다. 12월 말에도 사람들은 얇은 긴소매 셔츠만 입고 길을 지나다녔다. 집에 오니 참 예쁜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려 했고, 또 실제로 도움도 줬지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감정적 에너지가 없었다. 그저 예의상 감사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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