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껍질 속의 뇌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는 재미있는 영화가 나오면 가족과 혹은 친구와 함께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보고 싶은 영화는 주로 TV 프로그램 중간중간 나오는 예고편 광고를 보고 골랐다. 큰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으면서도 저 영화가 과연 내 취향일지 아닐지를 미리 점쳐 보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유명한 해외 배우가 전신 타이즈를 입고 물웅덩이 한복판에 서 있는 영상을 보았다. 그 장면은 유난히 뇌리에 오래 남았는데, 흥미가 돋았다기보다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런 쫄쫄이를 입고 싸워야 하는 걸까?'라는 의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영화가 일본의 유명한 SF 작품인 [공각기동대]를 실사화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볼까, 애니메이션을 볼까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원작부터 감상하는 게 예의일까 싶어 후자를 택했다. 1995년에 나온 [공각기동대] 극장판은 과거의 많은 SF 작품 - [블레이드 러너]나 [아일랜드] 등 - 이 그랬듯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낙관적인 풍경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암울한 사이버펑크 세계 속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변화가 촉발한 균열을 쫓는다. 구시대 SF 장르의 고리타분하고 뻔한 문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주목해야 하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우리는 정보와 타인의 흐름 속에서 초 단위로 우리의 일부를 교체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몸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과 기억을 일련의 전자 정보로 교체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공각기동대]는 몸의 일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완전히 사이보그화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심지어 뇌까지 전자 시스템으로 치환한 덕에, 사람들은 전뇌를 통해 네트워크 상에 쉽게 접속하고 더욱더 많은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나를 나라고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기반, 즉,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될 수도 있음이 밝혀지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곱씹게 된다. 작품은 일련의 사건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질문을 그려낸다. 전뇌 사이보그의 성찰에서부터 시작된 질문이 기억을 침해당한 일반인을 통해 극대화되고, 네트워크망에서 태어난 인형사와의 만남을 통해 심화된다. 이 모든 길을 달리다 보면 그저 아득한 미래의 일이라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작품 속 철학적인 물음이 무거운 현실을 겨냥하고 있는 반면, 신박한 위장 기술이나 강화된 기계 신체 등의 공학 기술은 화려한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특히 투명망토와도 같은 광학미채 위장술은 [공각기동대]만의 독보적인 액션 장면을 탄생시켰다. 인간의 위력을 뛰어넘은 증강 인류의 신체 능력은 SF 장르에서 자주 등장한 탓에 새로울 것이 없지만, 배경에 완벽히 녹아드는 위장 기술이라는 아이디어는 드물뿐더러 잘 표현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공각기동대]에서는 해당 기술을 완벽히 구상하여 여러 전투 장면을 우아하게 그려냈다. 덕분에 SF 장르만의 또 다른 재미 요소인 화려함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작품의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의 모습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던데, 개인적으로는 중성적으로 그려진 외모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위장 전투복을 입은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장면에서는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모호한 외형 덕에 주인공이 겪게 되는 존재와 본질에 대한 물음이 인류의 자아 성찰로서 모두에게 와닿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영화의 주인공이 어떤 성별인지 혹은 어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지는 작품을 수용하는 관객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 고전 동화책을 읽으며 자란 아이들이 여자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공주, 남자는 괴물을 물리치고 보상을 받는 왕자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그 예시다. [공각기동대]는 그러한 경계를 잘 허물고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모두와 나누었다.
[블레이드 러너]나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과거 SF 명작은 진중한 메시지를 작품의 중심으로 잡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그러한 무게 때문에 재미가 살짝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다. [공각기동대]는 이에 더해 배경이나 세계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애니메이션 [사이코패스] 또한 자유 의지와 관련한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세계가 철저하고 자세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주인공의 고뇌와 성장에만 초점을 두느라 주인공이 누비고 다니는 세상을 흐리게 그려놓았다. 미래에 사이보그 및 기계화가 발전했다는 사실은 알겠으나 왜 다들 사이보그화를 택하게 되는지 혹은 택하지 않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기술의 발전으로 개편된 특수부대 팀은 어떤 일을 도맡아 하는지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알고 있으면 작품을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을 텐데 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아쉬웠다.
한정된 시간 속에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문제도 있다. 초반에는 모든 것이 전자로 대체된 미래에서 내가 나임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네트워크의 바닷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의식인 '인형사'가 등장하며 주제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인형사는 생명체의 변칙성마저 습득해 온전한 개체가 되려는 열망을 보이고, 쿠사나기 소령은 나와 타인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좇는다. 두 주제는 개별로 다뤄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을 만큼 광활하고 깊은데, 영화는 둘을 하나로 합쳐 성급한 결론을 내려버린다.
영화의 특정 연출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광학미채 전투복이 굳이 나체를 연상시키는 살구색이어야 하는지의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여성 의체가 마구 파괴되고 절단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특히 쿠사나기 소령이 전차와 싸우는 장면에서 온몸의 근육이 찢겨 나가고 급기야 산산조각 나는 부분은 존재를 향한 강렬한 집착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도 있겠으나, 단순히 그런 열기만을 담아 그려냈다기에는 장면을 향한 시선이 관음적이다. 여성의 몸이 비틀리고 부러져 망가지는 장면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기에 신체에 대한 포르노적인 시선은 더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낙천파에 속한다. 사람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나왔다고 하면 한편으로는 사라지게 될 수많은 일자리가 걱정되지만, 그보다도 특이점을 넘은 인공지능이 새로이 해낼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싶어 두근거린다. 몸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온다 하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산산조각이 날 거란 두려움보다는 인간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넘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크다. 그랬기에 우울한 미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보다 미래 기술을 통해 어떤 화려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더 좋다. 하지만 [공각기동대]가 내미는 질문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평범하고도 중요한 질문이기에 무시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완전히 기계화된 몸에 전자화된 뇌를 가졌다면, 나는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증거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서는 기계화가 제공하는 무한의 힘에 중독되어 자멸로 걸어가는 존재를 강렬히 그려냈다면, [공각기동대]에서는 오히려 살아가기 위한 목적을 찾고자 하는 존재를 그려냈다. 우리는 일상의 많은 것들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대체해오고 있지만 우리와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몸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많다. 하지만 변화는 더디게 오면 왔지, 역행하지는 않는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파도 속에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길을 찾을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