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엄마와 막내아들

by J브라운




"너 왜 전화 안 하냐?"

새해 첫날 점심때쯤 내게 전화를 하신 엄마의 첫마디였다.

"네?"

살짝 당황한 내게 엄마는 새해 첫날인데 왜 연락이 없냐며, 형들은 아침부터 전화했는데 막내인 나만 연락이 없어서 기다리시다 지쳐 먼저 전화를 걸었다 말씀하셨다.

"좀 전에 일어나서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있었어요. 점심 먹고 전화드리려 했는데 엄마가 고새를 못 참고 전화 주셨네~"

이 말에 엄마는 "그러냐~" 하시며 깔깔 웃으셨다.



우리 집 막내 딸아들


새해가 되니 갑자기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어느덧 칠순이 다 되신 나이에도 여전히 마흔 넘은 아들들을 걱정하시는 우리 엄마.

갑자기 엄마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우리 가족은 다섯 식구다.

부모님, 큰형, 작은형, 나. 그래서 우리 엄마는 이른바 목메달이다.

(딸 둘이면 금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은메달, 아들만 있으면 목메달이라고...)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병원에서는 분명 딸인 것 같다고 했다는데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또 아들인 내가 나와버렸고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내게 항상 말씀하셨다.


"막내 니가 딸 노릇해야 한다!!"


삼 형제 중에 엄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게 바로 막내인 나다.

큰 형은 군대에 다녀오더니 갑자기 법조인이 되겠다며 집을 나가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작은 형은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 회사가 지방이라 자연스럽게 집을 떠나게 됐다.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도 집 가까운 곳에 다니게 돼서 결혼 전까지 33년을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형들보다 함께 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엄마도 형제들 중에 내가 가장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결혼하던 해 엄마는 딸이 없어서 너무 외롭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했다. 엄마 마음은 딸이 알아주는데 아들놈들은 키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 말씀을 딱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들로 자란 내가 봐도 아들들이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기란 쉬운 게 아니었고 실컷 키워놨더니 결혼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형들의 모습에 엄마는 서운함을 많이 느끼시는 듯했다. 내가 봐도 형들이 참 무심하다 생각될 때가 있었는데 하물며 당사자인 엄마는 어떠셨을까.

그럴 때마다 난 엄마 앞에서 형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곤 했는데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내심 대리만족을 느끼시는 것 같았더랬다.


내 위로 형이 둘이나 있었지만 막내아들인 나는 집안의 귀염둥이로 두 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렸을 때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어렴풋이 생각나는 흐릿한 장면과 앨범 속 사진에는 그런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귀염둥이 막내아들에게 딸의 역할을 기대하시는 엄마의 마음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내게도 그리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다른 집 아들들보다는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가 시장이나 마트에 가실 때면 곧잘 따라가곤 했었고 집에서도 빨래나 설거지, 방 닦는 것 정도는 도와드리곤 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와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가감 없이 했었고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시간을 내서 엄마와 드라이브도 가고 볼 만한 영화가 있으면 함께 극장에 가기도 했으며 종종 등산을 함께 하기도 했다.

엄마와 힘들게 관악산 팔봉을 등반하고 정상에서 먹었던 컵라면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예전부터 허리가 좋지 않으신 엄마가 불편한 몸으로 영화를 보시며 때론 꾸벅꾸벅 졸기도 하셨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항상 너무 재밌게 봤다고, 고맙다고 하시던 모습도 너무 선명하다.


아들이라서..


하지만 내가 아무리 딸 노릇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예전에 엄마가 간단한 부인과 수술 때문에 며칠 입원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내가 밤새 간호를 하면서도 화장실 같은 문제는 어떻게 도와드릴 수가 없었다.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땐 나도 '이럴 때 여동생이나 누나가 있었다면 엄마도 좋으셨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들이고 아직 아이가 없다 보니 엄마의 마음을 다 알기가 정말 쉽지 않다.

결혼하고 엄마에게 종종 서운한 말과 행동들을 하는 형들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나도 어느새 형들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

이래서 아들은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고 하는 건가..


아들 중에 그나마 엄마에게 싹싹하고 얘기도 많이 나눴던 내가 결혼을 하게 됐을 때 서운해하시는 엄마에게 결혼해도 자주 연락드리고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현실에선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퇴근길에 종종 들러서 저녁도 먹고 회사에서 집 근처로 외근을 나올 때면 잠깐씩이라도 들르곤 했었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이것도 어려워서 전화로만 안부인사를 드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혹시라도 내가 무증상 감염자라면 정말 큰일이라 찾아뵙지 못하고 있는데 부모님도 지금은 다들 조심해야 할 시기라고 괜찮다고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다.


손가락이 닮았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약지 손가락이 뭉뚝한 게 참 못생겼다. 뭐 다른 손가락들도 그다지 예쁘진 않지만 그래도 봐줄 만은 한데 약지 손가락은 손톱이 유난히 짧고 손가락 끝이 둥그스름해서 딱 봐도 그냥 못생긴 손가락이다.

이게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런가 싶었는데 몇 달 전 본가에서 엄마와 얘기를 나누다 엄마에게 내 약지 손가락을 내보이며 "엄마 제 약지 손가락은 왜 이렇게 못생겼대요?" 하고 여쭸더니 엄마가 조용히 손을 내미셨는데 세상에나... 엄마 약지 손가락이 나와 데칼코마니였다. 아니 이걸 어떻게 여태 몰랐을까..

엄마와 나는 한참을 크게 웃었더랬다.


우리 엄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친구인 친한 녀석들 중에 별명이 똥춘이라는 친구가 있다.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원체 잘 씻지를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발 냄새도 유독 심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똥춘이의 발 냄새를 맡으신 엄마는 이게 무슨 냄새냐고, 어디서 거지 냄새가 난다고 하시더니 그날부터 똥춘이에게 '거지왕'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다.


대학교 3학년 땐가 겨울방학을 하면서 학교 친구들과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하룻밤 새 엄마의 얼굴이 시퍼렇게 퉁퉁 부어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나에게 엄마는 경락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셨는데 얼마 후 사실은 자가 지방이식을 한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엄마는 얼굴에 살이 없는 편이었는데 지인 분들에게 그 얘길 듣는 게 그렇게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그래서 엉덩이 지방을 이식하신 거라 했는데 자가지방이라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꽤나 자연스럽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누워계셔서 피곤하신 건가 했었는데 계속 꼼짝도 않고 계셔서 무슨 일인가 싶어 안방에 들어갔다가 쌍꺼풀 수술을 하고 오신 엄마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란적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쌍꺼풀 수술을 한 직후의 모습은 엄마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이런 우리 엄마가 언젠가부터 허리가 점점 더 구부러져 내려가고 있다. 병원에서 검사도 받아보셨는데 수술을 하기엔 너무 큰 수술이 될 거라서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물리치료를 받고 평소에 운동으로 단련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얘길 들으셨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복대를 하시면 편할 것 같아 좋은 놈으로 사드렸는데 배에 압력이 가해져 불편하다고 잘 사용하지를 않으신다. 내 맘도 모르시고..


어머님께

언젠가 회사에서 외근을 나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본가에 들렀더니 엄마가 마침 병원에 가신다고 좀 태워다 달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엄마가 자주 가시는 병원인데 실력이 좋다기보다 그냥 오래 다니셔서 편안함을 느끼시는 병원이었다. 병원 앞에서 엄마를 내려 드리고 차 백미러로 엄마의 모습을 봤는데 병원으로 바로 들어가시지 않고 내가 가는 걸 지켜보고 계셨다. 그 모습에 괜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엄마가 막 아프신 것도 아니었고 조금 전에 웃으며 헤어졌는데 길가에 혼자 서 계신 모습을 보니 왠지 너무 작아 보여서, 내가 나이를 먹은 만큼 엄마도 많이 늙어버리신 것 같아서 괜히 서글펐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초까지 였나 우리 부모님은 주말부부로 지내셨던 적이 있다. 아빠는 직업군인이셨는데 강원도에서 근무하시다 큰형이 중학교에 가게 되면서 교육 때문에 엄마와 우리 삼 형제만 서울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때 엄마 나이가 막 마흔쯤 되셨을 때다. 지금 내 나이쯤인데 생각해보면 남편도 없이 혼자 타지에서 아들 셋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항상 부족해서 미안하다 하셨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우리 삼 형제는 언제나 엄마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하루하루 잘 지내왔던 것 같다.


요즘 통 찾아뵙지 못해서 내색은 안 하시지만 서운해하고 계실 우리 오여사님.

마흔 넘은 삼 형제 걱정은 그만 접어두시고 아들들 효도도 받으시며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와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다. 가끔 문자로는 표현하지만 입으로는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는 그 말. 오늘은 엄마를 생각하며 쓴 글이니 이 글의 마지막은 이 말로 끝맺음하는 게 맞는 듯하다.


엄마, 정말 감사드리고요 언제나 사랑합니다!!



작가의 이전글오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