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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Jun 14. 2020

잠깐의 행복이면 충분한

<먼 바닷길 일기>, 희연  |  06/11~13  |  연근프레스

대학생 시절,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4학년이 되어 취업준비생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취업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두고 성공과 실패로만 결과가 갈리게 될 취업준비생이 되는 것보다, 휴학생은 현실의 문제에서 한 걸음은 물러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도피에 가까웠다. 물론 정말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영어학원을 다녔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함께 일하던 교직원들은 예전에는 학사경고 수두룩하게 받으면서도 졸업만 하면 취직할 수 있었다며, 요즘 애들은 낭만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학생들의 시위로 등록금이 동결되는 바람에 본인들의 급여도 동결되었다며 나를 원망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몇 년 뒤. 나는 한 때는 로망이었던 회사원이 되었다.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보겠다며 대학가 근처의 곱창집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요즘 애들은 1학년 때부터 도서관에 간대, 우리 때에는 그래도 1, 2학년 때는 마음 편하게 놀았는데 말이야, 같은 현실감각 떨어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게 한쪽 구석에 있던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스펙 쌓기 경쟁이 과도한 수준이라며, 경력에 특별한 한 줄을 덧붙이기 위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대학생들이 늘었다고. 이를 위한 전용 여행상품도 있을 정도라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카미노를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길에서 처음 만난 인연들과도 금세 어울리지, 난 내 젊음을 이렇게 찬란하게 보내고 있어! 그것을 증명하는 한 줄짜리 경력인 줄 알았다. 마치 내가 취업준비생이던 시절의 대학생 국토대장정이나 해외 봉사활동처럼.


지난 주말, 서촌에서 열린 책 보부상을 찾았다. 코로나 19 때문에 많은 행사들이 취소된 가운데, 올해 처음 열리는 독립출판 행사나 다름없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립서점과 제작자들이 깊은 고민과 긴 노력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나는 그곳에서 제주도, 파리, 남해의 이야기를 담은 책과 함께 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샀다. 의도치 않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 담겨버린 셈이었다.


올해는 회사원이 된 지 햇수로 10년이 되는 해다. 취업준비생을 거쳐 꿈꾸던 회사원이 되었음에도, 대부분의 회사원이 그렇듯 퇴사준비생으로 살았다. 결국 작년 말에는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회사가 아니었다. 회사를 다녀야만 생계가 유지되는 나 때문이었다. 언제쯤이나 나는 무소속의 삶을 살 수 있을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고민이 많다. 취업준비생일 때에는 취업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퇴사준비생은 퇴사를 했다고 내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나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책을,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들의 책을 유독 집어 들 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혹시나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정답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


당연하게도 이 책에도 내가 기대했던 답은 없다. 이 책의 작가 또한 과거의 나처럼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했고, 그 도피처가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걷고 점심을 먹고 또다시 걷고 숙소를 잡아 씻고 저녁을 먹은 후 잠드는 매일의 일상.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하루는 없다. 어떤 날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또 어떤 날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사람과 엮이기도 한다. 어떤 날은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한 없이 행복하고, 또 어떤 날은 퍼부어대는 비를 맞으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도 한다. 어제와 같은 하루이지만 평소와 다른 잠깐의 순간이 그 날을 최고의 날로도, 최악의 날로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평범한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오후, 뚝섬의 한 카페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내 뒤편의 카운터에서는 음료를 만들면서 동그란 얼음과 유리잔이 부딪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고, 입 안에 머금은 콜드 브루는 시원하고 향기로웠다. 책에서는 작가가 바르에 들러 맥주 한 잔과 핀쵸를 먹고 있었다. 현실의 맞은편에는 아내가 턱을 괸 채 책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창 밖으로 뜨거운 햇살과 흔들리는 나무가 보였다. 대뜸 아내에게 말했다.

"나 지금 좀 행복한 것 같아."

여느 주말과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행복하다고 느꼈고, 그 잠깐의 순간 덕분에 나에게 이 날은 행복했던 하루가 되었다.


7년 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이 책을 쓰셨을 그녀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앞으로의 일상도 새로운 작품도 많은 사람들에게 잠깐의 행복이 되길.




22살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자기가 본 순례자 중 가장 어린 나이라고, 넌 카미노에 있기에 너무 어린데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고 물어본다. 카미노는 대부분 은퇴 후 노년에 인생을 돌아보러 오는 나이 많은 분들이 많아서겠지. 나는 그냥 적은 돈으로 오랫동안 천천히 여행하고 싶었다고 대답했지만 잠들기 전까지 그 물음이 계속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길을 걸음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아니, 애초에 뭔가를 꼭 얻기 위해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는 질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 이러한 물음들을 계속 던지는 게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여행도 어차피 인생 같은 것이다. 그 누구도 무엇을 얻어갈지 미리 알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짧게 응축된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p.69)


사실 모든 것은 일상이 된다. 엄청나게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긴 여행도 결국은 또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게 마련이다. 이제 이곳에서조차 나의 루틴은 굳어져 버렸다. 대충 아침 8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은 뒤 짐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와 바르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걷는다. 점심을 먹고 걷고 또 걷고, 저녁쯤 알베르게에 도착해 씻고 밥을 먹고 일기를 쓰고 잠드는 생활. 고민거리는 점심으로 뭘 먹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뿐이다. 카미노를 걸은 지도 보름 하고도 삼 일이 되었고 나는 이 루틴에 매우 잘 적응하고 있었다. 적응과 동시에 처음의 신비로움은 사그라들고, 익숙함이 나를 물들였다. 하지만 매일 비슷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새로움을 찾아내느냐 찾아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게 달린 일이었다. 아무튼 완전히 똑같은 하루하루란 존재하지 않으니,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보물처럼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을 발견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일상의 루틴에 지쳐있던 내게 꼭 필요한 감성이었다.

(p.158)


아마도 그게 여행일 것이다. 일상에서 멀어져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또 앞으로 어떤 내가 되면 좋을지를 고민해보고. 새롭게만 느껴지던 곳에서 권태를 경험하고 세상엔 영원히 새롭고 좋은 건 없다는 걸 느끼고.. 그렇기에 익숙한 것을 다시 새롭게 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걸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는 것. 머리론 깨달았지만 아직 내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겁이 났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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