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질문하는 것이다.
주인공 모린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루이스는 영매(남들과는 다른 인식을 가진 개체)였으나,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는 방식과 추구하는 사고가 바로 옆에 사는 이웃과 구분됐을 뿐이다. 누구든 그런 것처럼.
루이스가 모린을 보호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린이 루이스의 존재를 자신의 편의대로 '등대'로 정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굳이 만들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린의 등대엔 불빛이 없었다. 암흑 속에서 꼭 죽은 것처럼 빛 없이 선 등대만 있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 등대의 가치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안정'이라 여겼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란 근본적인 물음보다 이미 벌어진 사태를 관망하는 걸 택했다. 그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 모린은 자신을 아는 일을 묻어두는 것으로 삶의 고통을 피해 가려했다. 그리고 그건 루이스가 정말 죽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나'를 아는 것만큼 괴롭고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녀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과거를 어떻게 기록하고, 내일은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은 뒤로 미뤄두는 일, 모린은 가장 중요한 나를 확립하는 일을 딱 그 정도로 여겼다.
영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부터 그녀에겐 어려운 문제였다. 모린은 루이스와 달랐으니까.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루이스'는 그의 의사와 별개로 모린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녀는 쉽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도, 모린의 희망은 찬란한 빛이 제거된 흑백이었다. 모린은 자기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어른인 동시에 루이스의 죽음으로 분열되어버린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분열된 자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스로를 거부하는 일이었다.
"먼저 죽은 사람이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어요."
모린은 오빠의 영혼을 느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직접 영혼의 신호를 포착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루이스에게 더 확실한, 더 강력한 신호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유령에게 자신을 어필하란 기이하고도 이상한 모린의 요구. 그녀에게 오빠와의 약속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영매로서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오빠가 정말 옳았다는 걸 증명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모린의 진심이 결정적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침묵하는 영혼에 소리를 지르는 그때, 루이스의 집엔 불안해진 자신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모린, 자신의 울부짖음만 울려 퍼진다.
모린의 거짓말엔 이유가 있다. 그녀가 (분명 원하지 않았지만)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있던 검은 장막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눈을 뜬 순간 모린은 자신이 봐왔던 등대가 빛을 내뿜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내 세계에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확인한 모린은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그녀는 누구인가?
모린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욕망을 해방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키라가 입을 옷을 자신이 먼저 입으며 금기를 깨트린다. 고용주의 옷을 입으면서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모린. 묘한 쾌락과 심리적 떨림을 느낀 그녀는 점점 더 과감해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키라의 옷과 신발을 탐한다. 익명이 보낸 문자가 모린의 고삐를 푼 결정적 계기로 이용된다. 마침내 그녀는 키라의 집에 들어가 키라의 옷을 입고, 키라의 사적인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용한다. 그러나 모린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부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키라가 누리는 모든 것을 누려도 모린은 불안해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별 짓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안정감 때문이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루이스와의 이상적인 이별을 원한다. 그러나 모린에겐 오로지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모린만 존재한다. 모린은 스스로를 '모린'이라 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런 와중에 삶의 목적이 확고했던 루이스와 같은 결말을 맞아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억울함이 아니었다.
모린은 언제든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될 수 있는 현실에서 차라리 내가 아닌 '완벽한 타자'가 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키라의 퍼스널 쇼퍼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녀는 매번 실패한다.
하지만 모린은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고된 일상에도 틈틈이 심령 주의와 영매에 관한 정보를 찾고 습득한다. 자신이 영매이면서, 영매를 공부하는 아이러니라니.. 이는 모린이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믿고 써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역시 루이스와 비교되는 지점이다. 어떻게든 "끝을 보고 싶다"는 말과 다르게 모린은 루이스의 집에서 오빠가 아닌 다른 영혼을 마주하자 도주한다. 공포에 휩싸인 채 자신이 영매란 사실에 섬뜩함을 느끼며 도망친다. 루이스의 신호를 정말 받고 싶으면서도, 그 메시지가 정말 루이스의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역시 같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뭐 하나 확실한 믿음을 가져본 적 없는 모린에게 충분한 만족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모린은 영매의 입으로 사후세계를 의심하며 금기를 또다시 어긴다. 나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문자에 더욱 주도권을 뺏긴 채 질질 끌려다닌다.(그러나 모린은 그것을 위험하다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으나, 매번 흑백 프레임에 들어가 죽음과 죽은 자가 보내는 신호에 몰두한다.
"금기 없이는 욕망도 없지."
그녀는 사실 첫 번째 금기를 깨기 전까지 무엇이 금기이고 욕망인지 소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키라의 옷을 입고 키라의 침대에서 누운 순간, 그녀는 달라졌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을 휘감고 있는 불안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위한다. 모린에게 자위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제일 효과적인 도구로서, 허덕이는 정신을 대신하는 신체의 유일한 방식이었고,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타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애도만 하는 거 싫어.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이젠 내 삶을 찾고 싶어."
루이스의 연인이었던 라라는 새로 생긴 남자 친구의 존재를 모린에게 밝히며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모린의 남자 친구 역시 전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모린을 응원하고 위로했던 그는 단호하게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그들은 모린을 현실로 데려올, 루이스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삶을 찾고 싶다는 라라의 고백에 모린은 묘한 낯섦과 해결되지 못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이를 비난하자 않는다. 라라의 걱정과 달리 모린에게 중요한 건 루이스의 죽음이 아니었으니까.
모린은 애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게 목표였다. 루이스가 평안을 찾길 바란다는 그녀의 속삭임은 자신을 위한 반복된 주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라라의 남자 친구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라 당부한다. 라라의 남자 친구는 모린이 자신과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생각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이다. 정작 모린은 루이스에게 느꼈던 역량의 차이를 고백하며 자신이 부단히 오빠를 따라가려 노력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끝내 오빠와 같은 속도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결말까지.
모린은 자신이 벅찰 정도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시간을 넘어 죽음에 돌진해버린, 나와 같은 심장기형을 갖고 있던 존재로 루이스를 기억한다. 따라서 "이제 그만 벗어나야죠." 란 말속에, '벗어나야 하는 것'은 루이스를 향한 감정들이 아니라 모린, 자신이 망가트린 마음인 셈이다.
끝없던 모린의 고뇌와 방황은 키라의 죽음으로 멈춘다. 자신을 흔들어놓던 익명의 존재가 키라를 죽인 내연남이었다는 사실에 모린은 곧장 남자 친구가 있는 오만으로 떠난다. 지금까지 자신이 원했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이제 더는 어떠한 효과도 얻을 수 없었으며, 사실적으로 그 효력 또한 모린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주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 존재였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건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죽은 키라의 시신과 키라를 죽인 내연남의 도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명백한 사실로 무장한 진짜였다.
오만에 도착한 모린. 현실로 복귀한 그녀에게도 드디어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는 걸까?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은 사라졌을까? 이젠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전부 확신할 수 없다.
모린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하고 있었고, <퍼스널 쇼퍼>는 그녀의 언어를 분석해 진위를 가리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 남은 질문의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정말 루이스는 모린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까?
"루이스 너야?"
마침내 오만의 한 고택에서 루이스로 추정되는 영혼과 모린은 교감한다. 그녀는 루이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과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영혼에게 계속해서 질문한다. 긍정을 의미하는 "쿵!" 소리에 힘입어 영혼의 주인이 루이스라고 확신하는 모린.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질문하는 실수를 범한다. 같은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스스로에게 의심을 주입하는 걸 멈추지 못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자동차처럼 그녀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듯 군다. 결국 영혼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침묵.
무엇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말아야 할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른 모린은 결국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인 건가?"
"쿵!"
모린의 인생은 온통 흑백이며, 그 안엔 대답 대신 물음이 가득하다.
우린 대답을 찾는 걸 더 선호한다. 대답을 갈구하는 일은 질문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의문과 의문이 만든 모호함과 괴이함으로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 정답을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영화는 루이스의 죽음으로 시작된 모린의 물음표가 꼿꼿하게 세워질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아무도 모르게 방향을 뒤집는다. 모린이 틈만 나면 찾아봤던 심령 주의 다큐나, 영매 작가의 전시회, 빅토르 위고의 작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손수 조각난 이야기를 삽입해 관객이 착각과 확신 사이에서 길을 잃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린 루이스가 모린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지, 정말 모린의 신호에 응답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아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전부 모린의 착각일 수도 있다. 모린의 뒤로 둥둥 떠다니던 유리컵을 든 영혼이 루이스가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확신할 수 없기에 확신할 수 있는다는 것이다. 답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질문하는 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안전한 수단이자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이다.
<퍼스널 쇼퍼>가 모린을 나무라지도 답답해하지도 않는 건, 물음을 가진 것 역시 그녀이고, 의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 역시 그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품은 물음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방식이 또 물음표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생'의 문제이기에 '사'가 관여할 수 없다.
<퍼스널 쇼퍼>는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여 모린의 마지막 질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난 그게 불편했으나 고마웠다.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는 질문하는 것이다"라고.
질문하는 것. 그의 말이 맞다. 영화는 끝없이 질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