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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Apr 23. 2019

주인 없는 방

삶의 흔적들




주인 없는 방.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주인 없는 방을 볼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주인은 급히 그 집을 떠났고 나는 그 집이 주인 없이도 오래 잘 있을 수 있도록 단속을 부탁받았다. 주소와 비밀번호를 받아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집을 찾아간다. 그 집으로 가는 골목은 주인의 상황과는 다르게 쨍한 햇빛을 받은 꽃나무들이 군데군데 꽃잎을 흩날린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순간 앞이 어둑해져 잠시 멈칫한다. 유리문이 닫히자 밝기에 적응이 되면서 바깥과 달리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쪽지에 적힌 주소의 호수를 확인하고 그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쪽지에 적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다.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져 순간 멈칫하다 더듬더듬 불을 켠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불이 들어오며 넷 사위가 눈에 들어온다. 



신발정리대에는 마놀로 블라닉, 구찌, 로저 비비에 구두가 여러 켤레가 놓여 있다. 형광등 불빛에 구두 앞코에 달린 장식들이 반짝인다. 주인도 몇 번 신지 못한 듯 거의 깨끗한 모습이다. 꽤 오랫동안 반짝이는 구두들을 바라보다 그 구두들이 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족쇄 같다고 생각한다. 문득 구두들이 미워서 째려보다 거기에 서 있었을 아이가 떠오른다. 아이는 그 구두들이 아까워 신지도 못하고 그저 이렇게 형광등 불빛 아래서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시선을 옮긴다. 이불은 어지럽게 헤집어져 있고 잠옷은 바닥에 내팽개쳐 있다. 침대 발치에 있는 건조대에는 입었던 옷 빨아서 말려 놓은 옷들이 아무렇게나 걸쳐 쌓여 있다. 침대 옆으로 가서 암막커튼을 걷는다. 이 커튼을 마지막으로 걷었던 건 언제일까. 창문을 내다보니 방범창 건너로 옆 건물 벽이 보인다. 침대 헤드 위에는 휴대폰 충전기가 있다. 충전기가 없어도 괜찮을까? 


침대는 혼자 사는 사람이 쓰기에 꽤 큰 사이즈다.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며 좋은 침대를 주문했다고 한 것이 고작 두어 달 전이었다. 창 밖에는 간간히 반팔을 입고 있는 사람도 지나가는데 침대 위의 이불은 한 겨울이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전기장판이 꺼졌는지 확인한다. 부엌으로 간다고 하기엔 바로 한 발짝만 내딛으면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본다. 냉장 칸에는 500미리짜리 물 스무 개 남짓이 쌓여 있고 냉동 칸에는 아이스크림만 있다. 황망한 손짓으로 냉장고를 닫고 보니 방 안에서 음식을 먹었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방안에서는 내가 들고 있는 커피에서만 희미하게 향이 번진다. 음식을 먹은 쓰레기도 없고 그 흔한 라면 봉지도 하나 없다. 


커튼을 치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이 방에서 그 아이는 뭘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짐작도 하기 어렵다. 책상에는 아이가 정말로 아이였을 때 꽃밭에서 꽃받침을 하고 찍은 사진과 얼마 전인 듯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다. 사진 두 장 모두 아이는 환하고 밝게 웃고 있다. 그 옆에는 자기 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문구들을 손으로 적어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았다. 아이는 그 문구들이 왜 필요했을까? 책상에 앉아 한 글자씩 옮겨 적는 아이를 본다. 책장에는 꽤 읽을 만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다. 



책장에 꽂힌 책을 보다가 그 아이가 어쩌면 살고 있을지 모르는 다른 우주를 본다. 거기에서는 아이는 엄마와 싸우지도 않고 엄마를 밀쳐서 아빠에게 맞는 일도 없다. 거기서 아이는 가끔은 엄마에게 혼나거나 토라질 때도 있지만 금방 엄마와 화해하고 같이 웃으며 티비를 보고 엄마와 대학 고민도 함께 상의한다. 도망치듯 집을 나가서 연락을 끊고 살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고 응급실에 찾아온 엄마에게 내 보호자가 아니니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 지르지도 않는다.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때로는 술을 많이 먹고 들어와 엄마에게 혼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음 날이면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며 사과한다. 아이는 책을 좋아해서 책을 아주 많이 읽고 원하던 출판사에 취직한다. 막상 취직하니 원하던 삶이 아닌 것 같다며 가끔 푸념을 늘어놓고 또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며 회사를 다닌다. 그리고 취직 선물로 엄마에게는 예쁜 구두를, 아빠에게는 넥타이를 동생에게는 운동화를 선물로 사준다. 그런 우주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아니다. 언젠가 그런 우주로 갈 수 있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커튼을 전부 걷어 모든 창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한다. 보일러도 꺼져 있는지 확인한다. 전기장판의 전기 코드를 뽑는다. 주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되지 않게 정리를 한다. 마지막으로 책장에 붙은 사진을 한 번 더 본다. 다시 커튼을 닫는다. 불을 끄고 문을 닫는다. 방은 완벽한 어둠이 되었다.주인 없이도 당분간 잘 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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