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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y 08. 2019

대청소와 반성

잊혀진 일기들과




그는 오늘 봄맞이라고 하기엔 좀 늦은 거의 여름 맞이에 가까운 대청소를 했다. 커튼을 걷어서 빨래를 하고 가구를 끙끙거리며 옮겨서 배치도 바꾸고 책들 사이에 낀 먼지들도 털어내고. 늘 그렇듯 대청소는 청소하고 정리하는 시간보다 잘 쓰지 않아 처박아 둔 것들을 구경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그는 먼지 가득한 바닥에 쭈그려 앉아 예전 사진들을 보고 일기를 읽으며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혼자 호들갑을 떨었다. 날짜는 지났지만 새 것인 줄 알았던 다이어리 몇 개를 뒤적이다 드문드문 써 놓은 일기 몇 장을 발견했다. 일기를 꾸준히 쓰겠다며 과하게 씩씩한 마음으로 서점에 가서 다이어리를 사거나 커피를 여러 잔 사 먹고 얻어서 연말과 연초에 조금 쓰고 말거나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쓴다며 3월 또는 7월에 며칠 쓰다 말던 때의 흔적이었다. 그러니 그 다이어리들은 헌 것은 아니었지만 새 것도 아니었다. 



주황색 다이어리 12월의 며칠과 1월의 며칠에는 예상치 못한 반가웠던, 그 만남들이 모여 인연이 되었던 순간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녀를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또 설레던 그때의 생각들도 같이 적혀 있었다. 그다음 해 하얀색 다이어리의 3월 즈음에는 좋았던 몇 장면과 약간의 원망 그리고 얼마 후 큰 다툼이 될 그의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그다음 해 푸른색 다이어리는 그녀가 사준 것이었지만 이미 그녀는 없었고 모든 원인을 그녀에게 전가하는 못난 자신만 남아 있었다. 



심심할 때 들춰보던 최근 일기와 달리 한동안 잊고 있던 기록들은 그 자신이 쓴 것이 분명했지만 내용은 꼭 남이 쓴 것 마냥 생경했다. 꾸준히 쓰지도 못했지만 너무너무 좋을 때나 극악의 바닥을 칠 때는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이제와 읽어보니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소소한 행복 몇 줌과 버틸 수 있을 만큼이던 불행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이제 잊을만해서 다 무의식 저편으로 넘어가버린 걸까. 남의 일기 읽는 표정으로 페이지들을 넘겨봐도 써 놓은 페이지를 빤히 읽고 또 읽어도 그때의 감정들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설레어하고 또 그녀를 미워하는 스스로를 허공에서 바라보는 유령처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과를 알고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는 그녀의 말을 좋을 대로 곡해했고 그래서 함께 걸을 수 있었고 또 어느 날은 그녀의 말을 멋대로 나쁜 뜻으로 오해해서 화를 내고 상처 받기도 했다. 한참 읽다 보니 머릿속에 남아있는 강렬한 몇 개의 장면마저도 과연 정확히 기억하는 게 맞을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인연은 오해해서 시작하고 오해해서 끝나며 오해로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어떤 날에는 흩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칼날 같다가도 어느 날에는 아무리 모으고 모아도 형체 없이 흩어지는 그저 쇳가루에 지나지 않는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그 가루들이 그때 그토록 그를 괴롭혔다는 걸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 많은 페이지 중에 고작 1/10도 채우지 못한 사소한 기록으로 남은 시절들. 텅 빈 페이지들을 아무리 뒤져 봐도 그는 그 사이의 간격들을 메울 수 없었다. 그때 그 간격들을 기록했더라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모순을 기록했고 알았다면 어땠을까. 변해가는 그녀는 그의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그 자신을 볼 수는 없었으니까.

아니 이런 가정은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흔들었다. 갈등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조금씩 성장해간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같은 실수를 까먹고 계속 반복하는 걸지도. 그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말할 수 없던 것은 마지막까지 말할 수 없었다. 애써 부정했지만 그도 모르게 몇 자 되지 않는 기록조차도 한결같이 그랬다고 말했다. 두 어해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어떤 계기로 멍하니 생각 속을 흘러 다니다가 결국은 반성을 하고 자책을 했지만 이젠 반성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되지도 않는 반성도 지겹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 반성은 그만하고 싶었다. 굳이 반성을 해야 한다면 청소할 때 딴짓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과 일기를 잘 써 놓으면 청소하다 읽을 때 재밌기 때문에 꾸준히 써야겠다는 것. 그 정도만 반성하고 싶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 노랫말처럼 지나간 연애는 지나간 대로 지나간 인연도 지나간 대로 그저 그대로 두고 싶었다. 다이어리를 덮은 그는 드문드문한 일기들은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잘 싸서 꼭꼭 정리 해 두었을 것이다. 다음 대청소 때 굳이 꺼내 볼 필요 없도록. 그러잡을 가루조차도 없을 날에 꺼내 보면 그 또한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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