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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07. 2019

애썼다 친구야


1.
하응백의 자전소설 <남중(南中)>을 읽었다.

소설의 화자이자 작가 그 자신인 응백은 내 어릴 적 친구다. 우리 집 뒷집 뒷집에 엄마와 둘이 살았다. 그와 내가 언제부터 친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마련해줬다는 그 집에 응백이가 이사 온 것이 갓난쟁이 갓 벗어났을 때였고 9살이 되어 동네를 떠났다. 그러니 아마 걸음마 시작하고 말문이 트이면서부터 우리는 친구였으리라.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둘이 잘 어울려 놀았다는 것. 그러면서도 무던히 많이 싸웠다는 것이다. 오래 전 응백의 어머니 김벽선 여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하신 기억이 난다.   

“야 얼굴에 ”까리핀(할퀸)“ 자국은 다 동규 니가 만든 기다.”라고.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오래전 누나한테서 내 어머니와 그보다 9살 어린 응백 어머니가, 감나무 서있던 달성동 그 골목 동네에서 어떻게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 주고받았는지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응백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 남쪽의 명덕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철 들기도 전에 헤어진 셈이다. 그가 나를 어떤 친구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형제들과 나이차 많은 막내였던 나, 엄마와 단 둘이 살던 응백이였으니 깨복쟁이 친구 중에서도 감정이 남달랐을 거라는 짐작은 한다.

2.
응백은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장이있다. 그가 다닌 대건고등학교 문예반은 70년대 중후반  “날리던” 곳이었다. 두 해 위에 시인이자 평론가인 박덕규가 있었고 한 해 아래에 그 유명한 시인 안도현이 있었다.

나도 다니던 학교의 문예반이었다. 2학년 때였던가. 동아백화점 화랑에서 시화전을 했다. 두 개의 시화를 벽에 걸었다. 하나는 겨울 산사(山寺)을 묘사한 치기어린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의 제목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가을밤, 만월(滿月)의 언덕에서”.

어릴 적 동네 뒤 언덕에 올라 쳐다보았던 한가위 보름달의 추억을 썼다. 꼬맹이 시절 기쁨과 슬픔의 추억을 언덕 위에 둥실 떠오른 달에 실었다.  

학교 수업 마치고 전시장에 들르니 누가 자그마한 꽃 하나를 시화 액자 밑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쪽지에 이렇게 써놓았다.

“가슴 뭉클하다 동규야.”

응백이가 나 없는 새 다녀갔던 모양이다. 내 추억은 곧 그의 추억이기도 했겠지. 짧은 메모에 담긴 작고 따뜻한 마음이 오래 동안 내 안에 남았다.   

1979년 3월부터 나는 회기동 응백이 자취방에 잠시 얹혀 살았다. 둘 다 대학 신입생 때였다. 우리 집이 워낙 힘든 때였고, 큰 누나가 응백 어머님께 서울 거처가 마땅치 않은 나를 부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안가 나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걷기까지 드문드문 안부 전화를 주고받았다. 중간에 한 번 만나기는 했었던가. 시간이 급한 물처럼 흘렀다. 이제 그도 나도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되었다.   

내가 겪은 세월의 풍파만큼 그도 자신의 풍파를 통과했으리라. 한 다리 건너 친구들 통해 어떻게 사는지 간간이 소식을 들었다. 황동규를 전공하는 문학평론가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 대학 교수를 하다가 출판사를 차렸다는 이야기. 월남하신 아버지 취미를 이어받아 낚시의 고수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인사동의 어느 맛있는 고기집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3.
남중은 주인공 이름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연작이지만 총 분량이 174페이지로 그리 길지 않다. 작가는 3부작의 첫 번째인 <김벽선 여사 한평생>을 자기 페이스북에 미리 공개했다.

그 초고를 읽으면서 나는 직감했다. 이 자전소설은 김 자 벽 자 선 자 어머님과 하 자 창 자 서 자 아버님에 대한 해원(解冤)굿이라고.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 하응백이 걸어온 자기 평생에 대한 해원일 것이라고.  

자기를 만들고 상처준 과거를 회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트라우마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설 수 있다. 그것은 때로 한이라고 불리고 무의식의 심연이라고도 불린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러한 직면(直面)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기 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짐작컨대 응백이 이 소설을 구상한 것은 매우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문장을 다듬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리라 결심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그것을, 장년기를 통과하는 응백이 자기 평생의 중요한 매듭을 짓는 한 의식(儀式)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만들고 때로는 뒤흔든 존재의 뿌리를 담담히 바라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생 앞에 겸허하고 성숙하지 않으면 그 지경에 이르기 어렵다. 지금 그러한 언덕을 넘어가는 응백의 발걸음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육순에 응백을 낳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거의 모르는 대목이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리 자세한 이야기는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응백은 겉으로는 천의무봉하게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의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쓸쓸하고 외로운 ‘홀로 된 자’의 정서다. 나는 소설을 통해 응백의 삶을 관통한 그러한 파토스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더듬어 볼 수 있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 낙산사 앞 바다에서 부친에게 헤엄을 배우는 대목이 그러하다. 실향민 출신 아버지가 어릴 적 압록강에서 배운 “모자비 헤엄”을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모습. 그렇게 배운 허술한 영법(泳法)으로 동네 아이들과 물안경 끼고 자맥질하던 꼬맹이 응백의 모습.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애처러움으로 젖어든다.

그 두 번의 여름이 평생 동안 응백이 자기 아버지와 가장 온전히 지낸 시간이었다던가.

그의 모친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것은 내 어머니다.

응백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등뼈 꿋꿋한 독립적 인간으로 자라났다. 거꾸로 나는 7살 때 세상 떠난 어머니의 부재 속에 머리가 굵어졌던 게다. 이 역설적 공감이 소설의 제 2부 <하 영감의 신나는 한 평생>을 읽으면서 내 마음 안에 가장 뚜렷이 각인된 감정이었다.    

4.
소설 제목이 된 ‘남중’은 연작의 3부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가 철원 휴전선 근방에 근무하던 군인 시절, 돌풍에 GOP 가설변소의 지붕이 날아간다. 그 때 뚫린 지붕으로 쏟아져 들어온 정오의 햇살. 태양과 하늘과 입과 내장과 항문과 지구의 구덩이가 일직선으로 놓이는 통쾌한 자타일체의 순간, 그것을 응백은 남중이라고 표현한다.

큰 스님은 이 순간을 대오각성이라고 부르리라. 기독교인은 이 순간을 구원의 빛살이 비쳤다고 말하리라. 문학하는 사람은 이 지경을 문학의 신이 강림하는 찰나라고 표현하리라.

사람의 일생에 이런 순간이 얼마나 자주 올까. 작가는 훗날 담양 소쇄원 근처 명옥현에 갔다가 수백년 고목의 배롱나무 꽃을 보고 다시 한번 몰아일치의 황홀경을 경험한다.

하지만 3부에서 내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박정만 시인 이야기였다. 1981년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전두환 보안사의 서빙고분실에 잡혀들어가 일 주일 동안 당한 고문.

그 참혹한 폭력이 한 여린 심성의 시인의 영혼을 어떻게 부숴버렸는가가 다음 대목에 고스란히 올라와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이나 폭력에 무방비로 당하는 인간이나 모두,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정적 인간에게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사라지면, 절망과 분노와 오열과 무감각이 남는다. 그들에게 삶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이 아니다.”

시대에 대한 이러한 성찰이 일회적이지 않은 것은, 뒷부분에 응백이 겪은 (소위)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건의 묘사 때문이다. 그는 만담처럼 술술 읽히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지난 정권 문체부 블랙리스트 사건 증인으로 출석한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박근혜 정권이) 문학적인 이유가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그 지원 결정을 철회한 것은 명백한 검열이고 직권남용이라고 말했다. 심의 때 그런 위력을 행사하는 자는 정권이 바뀌면 감옥에 갈거다, 라고 했다.”

그러니 내 어릴적 친구 응백은 튼튼한 전나무 같은 어른이 된 것이다. 스스로 슬픔을 고요히 응시하면서도 일그러진 세상에 대한 정직한 분노도 잃지 않은 인간이 된 것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겨울방학이 되어 서울 가면 인사동에 가야겠다. 둘 다 머리가 허옇게 된 달성동 골목길의 두 꼬맹이가 수십 년 만에 재회하는 것이다. 그때 차분차분 그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사느라 애썼다, 응백아.”

그러면 그는 아득한 기억 속 철둑길 옆 동네 소년으로 돌아가련가. 어릴적 그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화답하련가.  

“그래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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