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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07. 2019

잊을 수 없는 책 : 나의 서양미술 순례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그린 청년 “수틴” 초상화가 표지다. 서경식이 쓴, 이 자그마한 판형의 책을 어디서 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992년에 창비교양문고에서 초판이 나왔다. 그때는 흑백의 표지였다. 내가 읽은 것은 2002년에 다시 간행된 컬러판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크다. 재일 조선인들의 아프고 쓰린 디아스포라 세계로 첫 발을 들여놓게 했기 때문이다. 서승, 서준식, 서경식 3형제가 펼쳐낸 장대한 삶의 드라마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에 매혹된 나머지 이후 우리말로 번역된 서경식의 거의 모든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디아스포라 기행”을 시작으로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고뇌의 원근법”, “소년의 눈물”,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시대를 건너는 법”, “난민과 국민 사이”, “디아스포라의 눈”, “시의 힘”,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에 나온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에 이르기까지.

딱 하나 읽다가 만 것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다. 자기 땅에서 뿌리 뽑혀 떠도는 사람들, 그 상징적 존재로서 유태인들의 고난에 대한 서경식의 정서적 연대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의 광기어린 국가파시즘이 화인처럼 뇌리에 박혀, 아무리 해도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책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길안내 표지판이 되어 나는 이른바 “서경식 광팬”이 되어버렸다.  

재일(在日, 자이니치) 조선인의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엿본 것은 초등학교 시절 풀방구리처럼 부지런히 드나들던 만화방에서였다. 작가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야구선수 장훈”을 그린 만화가 시작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 주제는 관심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버렸다. 목을 옥죄어오는 더 숨 가쁘고 힘든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아득히 멀어졌뎐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이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되살아났다. 모국의 외면 속에 버려진 듯 버팅기며 살아온 70만 재일조선인들의 현주소를 본격적으로 심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이 저술은 재일조선인 문제를 조명한 내용이 아니다. 예술을 주제로 다룬 책이다. 큰 형과 작은 형을 아직 고국의 감옥에 둔 1983년. 옥바라지에 지친 어머님마저 세상을 버리신 후, 도망치듯 떠난 유럽의 미술관들. 그곳에서 서경식이 운명처럼 만난 그림과 조각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의 고요한 문장 속에는 형들을 삼키고 있던 나라, 어머니조차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두게 만든 한국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에 걸쳐진, 벗어날 수 없는 서경식의 경계인적 삶이 둔중하고 아픈 떨림을 던진다.

그가 순례의 여정에서 만난 모든 작품을 이 글에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게다. 하지만 내게도 잊지 못할 대목이 하나 있어 소개한다. 1985년 떠난 두 번째 여행에서 서경식은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을 찾는다.

V&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이 미술관은 장식미술과 패션, 디자인 전문 전시를 위주로 한다. 같은 런던에 있는 내셔널갤러리나 테이트 미술관처럼 정통 예술 중심의 전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이다. 회화, 조각, 드로잉 등 순수미술(Fine Arts) 작품은 상대적으로 숫자가 크게 적다.

이 미술관의 한쪽 귀퉁이에서 서경식은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Christ showing his wound)"란 제목의 테라코타 조각상을 만난다. 부활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가 의심많은 제자 도마에게 오른쪽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 스스로의 손으로 상처를 벌려서.  

나도 2006년 여름에 50일간 런던에 머문 적이 있다. 이미 서경식을 읽었으니 이 조각상을 만나러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둑한 미술관 구석의 테라코다 예수상은 눈보다 높은 위치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위쪽으로 향한 시각에서 상처가 오히려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죽고 다시 살아난 “인간의 아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열어보인 상처 구멍 안의 공간. 내 눈에 그것은 마치 끝도 없는 우주가 펼쳐진 양 어둡고 깊었다. 단순한 충격을 넘어서는 섬칫함이 나를 덮쳐왔다. 그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이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이후 오랫동안 나는 내가 받은 충격의 원인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마음 속에 자기만의 심연(深淵)이 있는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그러한 심연을 마주치는 순간 까닭모를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다.

과연 1985년에 서경식이 보았던 심연은 무엇이었을까. 조국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두 형을 차가운 감방에 기약 없이 구겨넣은 시대의 어둠이었을까. 핏줄에 대한 부채감과 죄의식에서 저며진 절망과 고통이었을까. 그리고 20년을 훌쩍 뛰어넘은 런던의 미술관 한 모퉁이. 내가 마주쳤던 심연은 무엇이었을까.

서경식은 몇 년에 걸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일본 에세이스트클럽 상(소년의 눈물)을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많은 이유다. 하지만 나는 고국에서 유명인사가 된 오늘도, 그의 글 속에서 가끔씩 <나의 서양미술순례> 페이지 행간에 눈물처럼 배어나오던 외로운 그늘을 발견한다.

그는 2006년부터 2년 동안 서울 성공회대에서 방문교수 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엄청난 노력으로 한국어 말하고 쓰는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눌하지만 거의 모든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된 지금도 모국어에 갈증을 풀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평생을 한반도와 일본에 걸친 경계인으로 살아온 운명적 개인사 때문이리라. 영원히 완벽한 조선말을 쓸 수 없을 거란 슬픈 예감 때문이리라.

돈 벌러 온 할아버지와 일본에 뿌리 내린 부모에게서 태어난 서씨 4형제(위로 사업하시는 형님이 한 분 더 계시다). 그리고 현대사의 비극과 톱니바퀴같이 맞물려 돌아간 그들의 운명. 쿄토 리쓰메이칸 대학을 교수로 정년퇴임한 서승은 경향신문에 고정 칼럼을 쓸 정도로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형제 중에 가장 불같은 정의감과 분노를 지녔던 “옥중서한”의 저자 서준식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남북 간의 우여곡절이 이어지고 있다. 남북 그리고 북미의 정치수장들이 만나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길을 힘겹게 모색 중이다. 한일관계도 격랑 가운데 있다.

이 같이 하수상한 시절, 서씨 3형제가 서울의 어느 행사장에서(예를 들어 통일이나 한일관계 주제의) 한 자리로 모여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장면이야말로 지난 한 세기 이 땅을 둘러싼 분단과 이산(離散) 을 극복하는 상징적 씻김굿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런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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