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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현 Oct 27. 2021

끝내 이룬 내 어릴 적 꿈

대한민국 해양경찰 중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어릴 적 장래희망에 ‘선생님’도 있었다. 

아마 많은 여자 아이들 장래희망이지 않았을까? 

그토록 흔한 그 꿈이 쉽게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란 것을 고등학교에 가서 알게 되었다. 

IMF를 겪은 세대는 알 것이다. 안정적인 직업이 인생에 얼마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지 말이다. 

그 시절에도 이루지 못한 꿈을, 그 꿈을 위해 교육대학원에 진학했음에도 중도에 포기하고 입사한 해경(海警)에서 이룰 줄이야. 


경찰 조직은 신임 경찰을 비롯해 정기적으로 직무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교육을 시킬 학교 같은 곳이 필요하고 우리는 이를 ‘교육원’이라 부른다. 

물론 교육을 시키는 사람도 경찰관이다. 우리는 그 직무를 담당하는 경찰관을 편의상 ‘교수’라고 부른다. 


해양경찰 교육원에서 나는 ‘중국어 교수’로 근무하였다.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나의 학습 대상자였던 신임 경찰관들은 내적 학습동기가 많지 않았고, 주어진 중국어 교육시간 역시 길지 않았다. 

기억, 니은도 모르는 다 큰 어른에게 현장에서 바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의 학습 목표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복잡하거나 대단히 어려운 말은 아니다.(중국어에는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거의 없다. 편의상 반말로 적겠다.) 예를 들면 “앉아, 일어나, 따라와, 멈춰, 선장이 누구야? 선원이 몇 명이지?” 정도이다.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중국어 특채 경찰관은 중국어선 단속 현장에서 매우 바쁘다. 

제압 즉시 조사에 필요한 증거를 확보해야 하고 경비함정으로 돌아와 조사 통역을 해야 한다. 

조사과정에는 당연히 묻고 듣고 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어 특채가 아니면 담당할 직원이 없다. 

그러나 검거 과정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 때는 사실 간단한 몇 문장만 할 줄 알면 업무처리가 훨씬 수월 해진다. 

나는 후배들이 이 정도의 언어 수준을 갖추고 현장에 나가길 바랬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심리적으로 업무 강도를 더 크게 느끼게 한다. 그리고 단속 팀원들이 이 정도 의사소통만 가능해지면 중국어 특채의 업무 부담도 크게 경감되리라 생각하였다. 

생(生)과 사(死)를 오가는 단속 현장에서 진심으로 모두가 좀 더 안전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현장에 도움이 되는 수업을 만들고 싶었다. 

누구보다 나는 현장을 경험했기에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어떤 말들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토록 힘들었던 함정 근무 경험이 교수생활을 하는 이 시기에 이토록 유용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그때의 경험이 눈물 나게 고마워졌다. 최선을 다해 강의 준비를 했다. 


모든 강의가 후배들이 목숨 걸고 근무하는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열과 성을 다해 강의했다. 

이런 나의 마음이 모두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장에 발령받은 후 “교수님 덕분에 단속 현장에서 중국어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는 후배들의 인사를 들을 때면 나의 수고가 헛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대견 해할 뿐이다. 


짧은 시간이었다. 겨우 2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어릴 적 꿈을 이루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되고자 늘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무엇인가 부족하다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강의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습동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어떤 교수법이 이 친구들에게 효과적일까?

학습 중국어가 아닌 실용 중국어로서 어떤 학습전략을 설계해야 할까? 

진심으로 더 알고 싶었다.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나이 서른일곱에 다시 대학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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