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침묵, 공백
“너는 왜 네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아?”
제가 주변사람들에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든 이야기부터 꺼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속마음을 먼저 털어놓아야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이죠. 물론 그 방법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관계를 시작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깊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말'뿐만은 아닙니다.
저는 '침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침묵은 단순히 조용함, 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듣고,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과정입니다. 침묵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바쁜 상태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관계를 만들지만, 누군가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식으로 관계를 만듭니다.
저는 자신을 잘 드러내는 사람보다,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기 때문이죠.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 많은 자리에서는 경쟁이 생기지만, 침묵이 존재하는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공백'이 생깁니다. 편안한 공간처럼 말이죠. 이 공간 속에서 상대방은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 편입니다. 굳이 숨기려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과 친해지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닫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에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저는 리액션, 비언어적 표현,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동한 '토마스 뮐러'라는 유명한 축구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별명은 다름 아닌 '라움도이터(Raumdeuter)' 한국말로 하면 '공간 연주자'입니다.
그는 화려한 개인기보다 경기 속 보이지 않는 공간을 읽고 활용하는 능력으로 유명합니다. 공을 오래 소유하지 않습니다. 대신 동료들이 더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누군가 골을 넣는다면, 그 장면 뒤에는 공간을 열어준 뮐러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관계에서도 공간 연주자가 필요합니다. 모든 대화를 화려한 말로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침묵과 질문으로 공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역할이 제가 추구하는 대화 스타일입니다.
이러한 침묵의 가치를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 중 한 명은 '유재석'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는 않습니다. 적절한 타이밍의 질문과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태도를 보입니다. 침묵 속에서 필요한 순간에 한마디를 던지며 분위기를 정리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돋보이게 만들기도 하죠.
사람들은 흔히 말을 잘하는 사람, 토크에 공백이 없는 사람이 관계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역량이죠. 하지만 관계를 깊이 만들려면 침묵이 만들어주는 공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