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론 아득하기도 하지만 어제일 처럼 또렷하기도 하다. 결혼 후 아내와 질곡의 시간을 보낸 후, 딸아이를 얻었다. 나의 준비되지 못한 결혼생활은 무엇부터 시작할 줄 몰랐기에 애꿎은 나 자신을 원망하며, 회한에 휩싸여 있었다. 전직을 하려 몇 번의 시험에 매달렸으나 결과가 없자 생활은 궁핍해졌다. 처음부터 무리인 줄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길어질 줄 몰랐던 것에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의 시간만 길어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가 태어났다. 3.8kg이나 되니 건강하게 잘 키우라던 간호사의 귓전말에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부터 나는 달라져야 했다.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새초롬한 얼굴의 아내는 산후 붓기로 펑퍼짐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기 얼굴 봤어? 어때?"
"예쁘더라! 걱정 말고 눈 좀 붙여!"
출산 전 나는 아내의 D-데이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원래부터 가냘픈 얼굴이 아이를 갖고부터는 핼쑥해져 갔다. 이런저런 불협화음과 마음고생이 있었기에 그런가 했지만, 무엇보다 자리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나를 처연하게 바라보던 아내의 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딸아이는 별 탈 없이 자라 주었다. 무엇보다 내입장에서는 장인어른께 죄송했다. 얹혀사는 것도 모자라 생활비까지 의존하는 터라 면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 잡아야 했다. 청춘의 꿈은 이제 허상이 되었다. 두어 돌이 지나 아이가 말을 할 때쯤 나는 눈길을 낮추어 지금의 직종에 안착했다.
아이가 옹알이를 시작할 무렵부터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제 엄마에게 밖에서 있었던 일을 친구에게 말하듯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아내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집 근처가 아닌 공립인데도 아이들의 자율성을 키우는데 좋은 학교라며 수영장이 딸린 학교에 보냈었다. 서울시내 한복판의 학교에 저학년들 수업은 일찍 끝나기에, 근처 대형서점에서 아내는 아이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기에 나는 집 근처로 전학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으나, 괜찮다는 답변뿐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잦은 전학의 경험이 있기에 아내에게 별것 아닌 양 물었지만, 아내는 나름의 심산이 있는 듯했다.
그 서점이 휴일인 날에는 학교의 수영장 근처에서 하염없이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가을비 오던 날, 감기가 심해 병가를 내고 집으로 향하다가, 딸아이 생각에 끝날 때가 됐다고 생각해 학교로 차를 몰고 가보니 여전히 아내는 수영장 처마밑에 서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하고 차문을 열고 들어와 어쩐 일이냐고 묻는다. 나는 순간 퉁명스럽게 집에 가있지 왜 이러고 있냐고 힐책했다.
"조금 있으면 끝나! 아빠가 와서 얘도 좋아라 하겠다!"
아내는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내 능력이 그에 못 미치니 늘 미안할 뿐이었다. 인천이 직장인 내가 서울 중심지까지 출퇴근하기에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인천에 집을 얻어 그간의 사정을 장인어른께 말씀드리고 마침 아이가 겨울방학인 기간에 인천으로 이사했다. 달포쯤 되었을 때 장인께서 내려오셨다. 외손녀인 딸아이가 떠나니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신다. 결국 서울집을 정리하시고 인천에서 우리 내외와 사시게 되었다. 문제는 딸아이 전학을 해야 하는데, 아내도 딸애도 도리질을 한다. 아직 3년이나 남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가는데 서울까지 등하교는 무리였다. 장인어른이 말씀하셨다.
"이보게! 내가 학교까지 등하교를 시킬 테니 전학시키지 말게!"
칠순을 넘기셨어도 여전히 초롱한 눈망울을 가지신 장인어른의 말씀이기에 나는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최근까지도 직장을 다니셨기에 건강에 문제는 없는 장인께서, 외손녀와 서울까지 전철로 다니신다기에 힘드시면 말씀해 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퇴직 후, 할 일이 생겨서인지 장인어른은 활기가 도셨다. 아내도 원래의 그 학교를 계속 다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내색이었다. 아이를 서울의 학교에 등교를 시키고 장인어른은 바로 내려오시면, 아내는 아침 겸 점심상을 준비했다. 그 식사를 하시고 잠시 쉰 후에 장인어른은 다시 서울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어떤 날은 아내와 같이 올라가기도 하며,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삼 년 여의 시간을 부녀는 전철칸에서 아이와 특별한 시간을 보낸 듯하다.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생긴 것과는 다르게 다혈질인 아내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급우들과 문제가 생기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학급에서 공부나 생긴 것이 유별나게 뛰어나다고, 속칭 '은따'를 시킨다고 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구별 짓기의 대상에 포함된 듯하다. 아내는 아이가 초등학생 때 녹색어머니회를 비롯해 자율도서실 관장 등 학교일에도 열성을 보였었다. 아내는 아이 중학교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문제가 되는 친구들을 조사한 후, 그중 주모자 친구를 골라 그 애의 엄마와 대화를 시도했다. 마침 아내와 죽이 맞아 아이들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고, 같은 APT동에 살다 보니 오히려 친구사이로 발전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아내의 능력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후,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입시에 올인을 해야 했다. 아이는 나와는 다르게 화학을 전공하겠다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전공이 화학이었으니 격세유전의 DNA가 흐르는 듯했다. 딸아이는 화학기호 분포도가 아름답다고 했다. 나와 키나 모습은 비슷한데 내면의 뭔가는 제엄마를 닮은 것 같다. 아내 또한 뭔가 치밀하고 계산하는 것을 좋아했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딸애는 약대가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당시엔 2+4 제도로 대학에서 관련전공을 2학년을 마쳐야 약학대학입시(PEET)를 볼 수 있었다. 2년을 마치고 휴학 후, 딸애는 입학자격시험에 매달렸다. 학원을 다니든, 도서관을 다니든 할 줄 알았는데 딸애는 집에서 제 엄마와 대화하면서 인터넷 강의로 공부를 할 뿐이었다.
도전했던 첫해는 만족할만한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해보겠다고 하니 학원을 알아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집에서 하겠다고 했다. 제 엄마와 워낙에 죽이 맞으니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공부를 하겠다는데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벌써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작년보다는 나았으나 여전히 경계선 근처를 맴도는 성적으로는 힘들어 보였다. 딸애는 나에게 말했다.
"아빠! 죄송한데 그만할게요! 복학해서 마저 공부하고 그 기간 동안 진로를 생각해 볼게요."
아이의 말에 힘이 들어가 있기에 제 딴에는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이해한다. 네가 하고픈 공부도 하고, 진로도 네가 결정해! 아빠는 네가 만족하면 그만이야!"
그 이 년 여의 시간 동안 딸애와 아내는 무슨 대화를 이어갔을까? 나야 밖으로 도는 사람이니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여자로서 둘만의 내밀한 이야기와 아내가 딸애를 곁부축하고 응원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비록 결과는 없었지만, 모녀간의 애틋함은 쌓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복학을 하고 나머지 3, 4학년을 마친 후, 딸아이의 행로가 궁금해질 찰나, 딸애는나름의 목표가 있으니 두고 보라고 했다. 나는 일절 관여치 않겠다 했으니 생각을 접었다. 오히려 방송대 입학 후, 내 공부가 더 바빠져서 관심을 둘 여력도 없었다. 딸애도 그런 나의 모습에 감화를 받은 듯 보였다. 젊은 시절 못해본 인문학 공부가 나의 적성에 들어맞았다. 물론 나이 들어하는 공부가 녹록할 리 없지만, 내 생의 마지막 가능성에 올인하고 있었다.
아내와 강원도 태백의 처가 쪽 상가에 다녀오던 날, 저녁에 출발한 관계로 잠시 쉬고 아침에 올라오다 영월의 어느 고지대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내의 휴대전화에 나 또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피커 폰으로 바꾼 전화기 넘어 딸애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엄마! 아빠!.... 나 국가직 시험에 붙었어!"
아내는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 아이가 무엇을 준비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 딸 수고 많았다!"
아내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싱긋거렸다. 아마도 아내와 딸사이엔 나름의 확신이 있었던 걸까? 일일이 설명하지 못할 많은 일들이 있었던 듯싶다. 면접을 준비하려 복장을 갖추고, 화장을 한 아이의 모습을 보니 비장함이 언듯 보인다. 정부과천청사로 향하는 길, 나도 모르게 운전대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두어 시간의 기다림은 즐거운 초조함이었다. 딸아이가 환한 얼굴로 나오니 청사 주변의 수목이 더더욱 푸르러 보인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이었다. 면접을 준비하던 학원에서 임용대기 기간 동안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고 한다. 아이는 한 시간 거리의 학원을 기꺼이 10여 개월 동안 다녔다.
진천의 교육원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은 후, 딸아이는 대전청사로 발령이 났다. 급하게 대전으로 내려가 아내와 나는 딸아이 집을 잡아줘야 했다. 출퇴근거리가 걸어서 적당한 곳에 마침 빈집이 있어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리를 해야 살 수 있기에 집주인과 약속하고 당분간은 며칠 동안 원룸에서 지내야 했다. 아이가 출근하기 전날 우리는 낯선 곳에서 한방에 들어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애는 소풍 가는 전날처럼 즐거워했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아이에게 나는 속으로 우려하는 바도 있었으나, 아이가 좋아하니 안심이 되었다.
내가 무뚝뚝하진 않지만 아비와 딸의 대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속 깊은 이야기는 제 엄마에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딸애는 무시로 제 어미를 찾을 뿐이다. 인천과의 거리도 장애가 되진 않나 보다. 어느 때나 아이는 적응해 가는 하루의 일과나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의논을 하곤 한다. 그러다가 무언가 맞지 않으면 싸우기도 하는 듯하다.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딸애는 세종으로 부처를 따라 옮겨가고, 이젠 어느 정도 제법 직장인 티가 나고 있었다.
벌써 일 년 여가 흐르고 있다. 작년 이맘때 아내는 집 근처 대학병원에서 긴 투병을 했었다. 두어 달 입원하는 동안 딸아이는 지극정성으로 제어미의 병실을 찾았다. 나 또한 장기 휴가를 내고 간병을 하여 딸아이의 부담을 덜어주려 고군분투했었다. 가족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에 대한 정이 애틋해지는 것 같다. 아내와 딸애는 휴일이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병원 2층 정원에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번은 딸아이에게 물은 적이 있다. 둘이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냐고, 딸애는 웃으며 말했다.
"아빠! 질투하지 마! 엄마와는 같은 여자니까 의논할게 많아! 이해하세용! 큭!"
사실 내가 이해 못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둘은 좋아하는 것부터 나와는 달랐다. 겉모습은 아비인 나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속내는 영락없이 제 어미를 닮아 있었다. 아득하지만 기억이 새롭다. 광화문의 어느 모퉁이에서 다섯 살의 딸아이와 아내는 무언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차로 데리러 간 나는 그 모습에 의아하기도 해서, 신기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다본 적이 있었다. 도대체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길래 저렇게 열중을 할까? 꼬맹이 딸아이도 지지 않고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유월의 날씨는 싱그러웠고, 나는 한참을 즐거운 눈으로 내색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두 모녀의 대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끊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