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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Dec 16. 2018

12월 대마도의 풍경

대마도, '18.12.13(목) ~ '18.12.14(금)


본인의 업에 애정을 갖고 임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노무사로 일하는 내 동생 역시 매일 아침 출근길을 썩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녀석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전역 날짜 세듯이 회사를 다녔던 나의 옛 모습이 슬며시 겹쳐 보이는 듯 하기도 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집요정 도비가 영국 어드메 환상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리한 여름의 끝자락을 고하는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 옷깃을 파고들던 9월의 어느 날, 동생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올해는 기필코 퇴사라는 대업을 완수하고자 동네에서 용하다는 신녀님의 점지를 받으러 다녀오는 길이란다. 기대했던 퇴사를 점지 받지는 못하여 아쉬웠지만 상사와의 소통과 보고 요령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는 동생, 얘는 대체 점을 보러 갔다더니 뭔소리를 하는건가 싶어 충분히 혼란한 와중인데 피할 새도 없이 또 다른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든다. 이야기도 꺼내지 않은 오빠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한동안은 역마가 들 것이라고 했단다.


뭐가 어찌됐든 용한 신녀님이다. 아직 새로운 해는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내년 봄이 오기 전까지 나의 달력은 이곳 저곳을 쏘다닐 요량으로 벌써 가득 차버렸으니 말이다. 대마도 가는 배는 매일 있다는데,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 싶어 무작정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은 지난 수요일 오후의 단편 역시 어김없는 역마의 발로였을 것이다.



배가 뜨는 시간이 일렀기 때문에 전날 부산에 도착해 찜질방에서 잠을 청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찜질방이라니, 앞뒤가 맞지는 않는다만 길바닥에서 떠는 것 보다야 나았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밤새 쌓인 한기를 온탕에 들어가 털어낸다.



나를 히타카츠항까지 실어나를 니나호. 오직 빨리 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승선감 같은 것은 애초에 설계 단계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지, '니나 타라 니나호'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아직까지 배멀미의 공포에 시달려 본 적이 없었던지라 은근한 호기심과 음험한 도전의식이 동하였다.



부산항대교 위로 잘게 부서지는 볕을 뒤로하고 니나호는 엔진 추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과연 '니나 타라'는 명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한낯 미물인 사람도 정면으로 파고드는 세월의 풍파를 가끔은 빗겨가는데 이 녀석은 그런 것 없다. 없는 파도도 만들어서 타고 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쉴 새 없이 요동을 치는데, 아직 대마도에는 도착하지도 못했건만 벌써부터 돌아오는 배를 탈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새로운 곳에 발을 딛었다는 설레임보다는 빈사의 문턱에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더 이상은 무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할 즈음, 반 쯤 풀린 두 다리는 마침내 대마도 땅을 밟고 섰다.



농업과 어업으로 주된 생계를 꾸려가는 곳이라 대한민국 농협과 자매결연을 맺은 것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 시기나 현기쯤 될 성 싶지만 아직도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하였다. 여튼 그들은 짧고 굵게 돈을 쓰고 가는 우리들을 환영한다. 아마 이것은 진심일 것, 역시 외교의 힘은 자본주의의 위대함에 우선하지 못한다.



이제 막 중천에 걸린 해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을 포근하게 데우고 있었으니, 급할 것은 전혀 없었다만 목적지가 있었기에 지체를 할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차곡히 품어왔을 낡은 소화전이 괜히 정겹다.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곳은 오징어와 톳이 들어간 수제 버거로 나름의 명성이 있는 곳이다. 한국인 여행객들의 행렬이 그야말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괜한 호기심이 일기는 했지만, 내가 30리 가까운 거리를 걷고자 함이 다름 아닌 식을 탐하기 위한 여정이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식당 앞 자판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지 않은 것은 여전히 아쉽다. 한개에 130엔 정도 하니 얼마 비싼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변변하게 없으니 감히 정착을 할 자신은 없다만, 이렇게 우거진 숲을 벗삼아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끔 찾고픈 생각이 들 것 같다.



동네가 크지 않으니 소방서도 소담하다. 불조심을 외치는 대마도의 호빵맨은 2개 국어가 가능한 능력자.



요즈음 한국에서는 공중전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만 이곳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찾는 사람은 많이 없는 듯 했지만 말끔한 얼굴을 하고 선 이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기특한 마음이 든다.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찾고, 한국이 얼마나 가까웠으면 전망대마저 따로 마련해놓았다. 그렇지만 불과 두 시간 전까지 내가 밟고 섰던 곳을 십리 넘게 걸어서까지 구경하러 갈 이유는 마땅히 없는 듯 하다. 물론 시간이 허락했다면 결론은 달랐겠으나 생각보다 여정이 빠듯하다.



강인가 싶었는데, 바다이다. 그 뒤로 낮게 자리한 산을 덮고 솟은 나무들은 잎사귀를 모두 벗어던진지 오래인지라 앙상하다. 조금씩 겨울이 가까워온다.



약 30리 가까운 거리를 걸어야했는데 사스나까지 10리가 남았으니, 7할 정도를 걸어왔다. 조금씩 고픈 배가 신호를 보내오니 더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40분이면 충분할거라 생각을 했지만 굽이진 산길을 따라 걷는 통에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토록 고대하던 사스나에 도착한 순간이다.



대마도에만 살고있는 야생고양이가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삵이라고 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 녀석을 주의하라는 간판이 워낙에 많아서 내심 기대를 했건만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닌가보다.



오늘의 첫 끼니를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 30리가 넘는 거리를 굳이 걸어왔다. 그 긴 여정의 방점을 찍을 생각에 두 발바닥이 땅에 닿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지만, 스산한 길거리를 딛고 선 이 녀석들은 나도 모르게 그 종종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아마 이 녀석은 외지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친히 발걸음을 하였을 것이다. 벌써부터 예감이 좋다.



규슈 100선에 선정되었다고 하니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키류켄'이라는 간판을 발견한 마음은 그저 벅차다. 하얗게 닳은 낡은 간판이 그 역사와 명성을 증명하는 듯 하다. 부디 고생한 만큼의 보람이 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문을 열어본다.



이랏샤이마세라는 글씨가 이렇게나 선명한데, 사장님의 인사 대신 무섭게 내려앉은 적막만이 나를 반긴다. 대단한걸 먹자는 것도 아니고 라면 한 그릇에 교자 한 접시 하고싶을 뿐이었는데, 억장이 무너진다.



진정 눈물이 핑 돌 만큼 망연자실하였다만 그런 여유조차 길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 조그마한 동네에 있어봐야 얼마나 많은 식당이 있을 것이며, 내가 사장이라도 지금 시간에 굳이 식당 문을 열어둘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반드시 식당을 찾아야 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스치는 바람이 유독 시리게 소매춤으로 파고든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사스나 경찰서에 근무하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더불어 생면부지의 땅에서 어설프게나마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에게도. 세 명이나 되는 경찰서 직원분들이 식당을 추천해주시고, 전화를 걸어 영업을 하는지 확인까지 해주셨다. 덕분에 찾은 '갓포렌'이라는 이름의 식당.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히타카츠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한 시간은 눈물과 절규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



간신히 한 끼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서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이 동네의 모든 것은 귀엽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체국이 바로 앞인데 우체통이라니.



이곳에서 밤을 맞이한다면 감히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 쫓기듯 버스에 올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대마도이건만 시련의 연속이다.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만났다. 중력과 연직한 방향으로 곧게 늘어선 흰 뭉치들은 오징어나 한치쯤 되어보였다. 저 원통은 꽤나 각운동량이 큰 듯 했는데, 그런 덕분에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멈춰선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짐을 풀고 욕조에 들어앉아 언 몸을 녹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기는 볕을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어둠이 내린 히타카츠의 밤거리는 이따금 밀려오는 여울의 바스라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고요하게 채워낼 뿐이었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는 이곳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아담하고 포근하다. 바꾸어 말하면 굳이 1박을 하면서까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웬만하면 적당히 둘러보고 조금 더 큰 도시인 이즈하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자.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굳은 듯 했지만 그것은 아마 기분탓일거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니 아마 그들에게는 흠칫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규슈 100선, 이곳의 이름은 야에식당이다. 급하게 먹은 점심이 화를 불렀는지 뱃속이 요동치는 통에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지만 이곳의 보리소주는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그 향에 엄지를 저절로 치켜세우게 만든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항구마을은 밤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여덟시가 막 지났지만 불이 켜진 가정집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내가 올려다 본 하늘은 그저 어둠만이 자리했지만, 렌즈를 통해서나마 숨겨진 모습을 들춰본다.



하루종일 부두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 걸 보면 고기잡이 배는 아닌 듯 하다. 조금은 외롭기까지 한 이곳의 밤이었지만 이 녀석이 밝히는 불빛이 있어 그것은 약간의 낭만으로 대체되었다.



이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주변이 음침했다. 따뜻한 모습으로 기억을 하고 싶은데, 솔직히 숙소로 가는 길을 이 시간에 다시 걸어갈 자신은 없다.



새어나오는 빛이 이렇게나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가 싶다. 대마도의 조용한 어촌 마을, 히타카츠에서의 첫 날이 저무는 순간이다.



잘 묵고 갑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만납시다.



먼 바다로부터 온기를 실어온 바람은 저절로 미소를 만면하게 만든다. 자연이 빚은 소리만이 내 주변을 오롯이 채우는 경험, 정말 간만이었던지라 그저 모든 것이 좋았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바람에는 새의 지저귐이 실려있다. 정말이지, 그저 모든 것이 좋은 날이다.



쉬지않고 절벽으로 맹진하는 파도는 거칠게 부서지며 그 명을 다 하고, 저 먼 발치에서 새로이 밀려들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몇 뼘 되지 않는 공간이지만, 미우다 해변 앞의 이 공간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끊임없이 손바꿈을 하지만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작은 오두막 한 채, 그 옆에 놓여진 자판기 한 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나도 모르게 동전을 밀어넣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또 한 번 마음이 푸근해진다.



넓지 않은 백사장이지만 이곳만이 가진 따뜻함이 있다.



조용히 밀려드는 파도를 벗삼아 한동안 가만히 관조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마냥 좋았다.



아마 대마도는 미우다 해변으로 밀려들어와 내 발 아래에서 아담하게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으로 기억이 될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허락했다면 온천에도 갈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비록 소복히 쌓일 눈과 함께 떨어질 운명이겠지만 아직 이곳은 가을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다시 돌아온 히타카츠항, 조용한 발걸음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보았다.



인구가 만 명이나 될 성 싶은 곳이지만 어딜가나 자판기가 있다. 참 한결같은 모습이 그저 정겹다.



이 녀석은 과연 이곳에서 얼마의 세월을 함께한 것일까. 그저 리벳과 한몸이 된 채 이 자리에 걸려있던 것 뿐이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제 역할을 다 한 마지막이 언제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 이 녀석 역시 마찬가지다. 녹슬고 닳은데다가, 상수도가 있으니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마땅찮을 테지만 앞으로도 이 자리를 지키며 주인 내외와 함께 늙어갈 것이다.



코팅까지 해서 붙여놓은 것을 보면 앞으로도 화장실을 고칠 생각은 없는 듯 하다. 전날 밤 찾은 야에식당의 바로 옆에 자리한 '히데요시'. 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수중에 남은 현금으로는 선택지가 마땅치 않다.



한 분의 노모께서 운영하시는 포에무 빵집. 히타카츠에서는 유일한 빵집이다. 다행히 유일하다는 것을 무기 삼아 장인 정신을 희석하지는 않았다.



이곳에 사는 고양이들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사는구나 싶었다. 길을 배회하는 녀석들 중 어느 하나 윤기가 흐르지 않는 녀석이 없고, 잘 먹지 못한 듯 안쓰럽게 마른 녀석도 없다.



부산으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아쉬움을 달래는데에는 역시 이만한 것이 없다.



나를 태운 니나호 역시 곧 저 배가 그리는 항로를 따라 부산으로 향할 것이다.



왠지 오빠 므찌냐고 물어올 것 같지만, 아마도 야노 시호님의 남편분일 것이다. 이곳을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산 출신인 것을 감안한, 전형적인 노림수가 아닐까 생각되는 대목이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1.5m의 파고는 430명이나 태울 수 있는 결코 작지 않은 쌍동선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지는 해를 뒤로 한 채 이틀의 짧은 여정도 막을 내린다. 즐거웠습니다 대마도. 언젠가,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당신은 배멀미를 하겠지만 이 녀석은 멀미를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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