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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Jul 13. 202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엄청난 죄인일 수 있다.

1960년 5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50대의 한 중년 남성이 이스라엘 비밀경찰 조직인 무사드에 체포된다.

그는 국가 간의 범죄인 인도법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그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어 1961년 4월 11일부터 재판을 받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사형을 언도받아 1962년 5월 31일에 형이 집행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치 친위대 중령 출신으로 기소된 15가지 혐의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그리고 오늘의 책은 그런 아돌프 아이히만의 1년여의 재판 과정을 뉴욕의 대중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취재한 독일 출신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우리에게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유명한 이 보고서는 거대한 국가의 운영을 관료제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 국가운영 체계 안에서 국가가 정의롭지 못할 경우 그 안에 공무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까지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논란을 낳은 책이기도 하다.

그럼 문제작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살펴보자.            



먼저 이 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넘어가야 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왜 유대인은 유럽과 현대의 중동지역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미움을 받는 천덕꾸러기일까?'이다. 한나 아렌트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아이히만이 그토록 잔인한 일에 왜 열정적으로 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 본성의 문제를 다루었기에 유대인 학살이라는 특정 사건에 대한 논평은 딱히 없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죽었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행위에도 비판적이다. 책에 의하면 그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지었기에 국제재판소에서 다루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에 대한 죄를 범했기에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에서 재판한다는 것 자체가 국제법이든 정치윤리적인 입장에서든 반대한다는 의견을 펼쳤기에 같은 유대인으로 배신감을 느낀 대부분의 이스라엘 국민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책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유대인에 대한 오래된 차별의 역사의 원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보자.


먼저 우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1596년작 '베니스의 상인'을 읽으면서 오래된 유대인 차별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유대인 주인공 샤일록은 그야말로 미움받는 유대인이라는 고정관념의 대명사처럼 상징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럽 지역에서 유대인이 차별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유럽 문화의 중심인 카톨릭교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다.

유대교는 구약에 의하여 구원자가 재림하여 유대민족만을 구원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예수를 유대민족을 구원할 신의 재림으로 여겼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유대민족의 기대(?)와는 달리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 전인류의 구원을 주장하며 전혀 다른 쪽으로 구약을 실천하려 했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예수를 반역자로 지목했고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에 유대 주재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다도에게 사형을 청했고 식민지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예수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 후 예수의 사상과 말이 신약으로 널리 퍼지게 되고 마침내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후 카톨릭교는 중세를 지나며 전 유럽의 국교로 자리를 잡게 되고 그런 유럽인에 관점에서는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이기적인 민족일 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위의 내용보다 더욱 구체적인 것인데 그렇게 로마와 이후 여러 민족에게 나라를 잃고 유럽과 중동 각지에 흩어 살았던 유대민족은 본디 정착생활을 하던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목 민족 출신이었다.

정착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에 비하여 늦게 들어가 정착을 하려 해도 경작할 토지도 없었고 그들 역시 그런 노동에 적응이 되질 못하는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그중 유럽 지역은 신약성서에 의하여 고리대금업이 엄하게 금지되었던 사회이다. 그런데 유대민족은 구약만을 믿기에 구약에서는 유대민족끼리만 고리대금업을 금지하지 타민족에게까지 금지한 내용이 없기에 유대민족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고리대금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고된 노동이나 목숨을 내건 항해를 통해 무역을 하던 유럽인에게 앉아서 돈으로 돈을 벌어가는 그들은 늘 영악하고 이기적인 고리대금업자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샤일록 같은 공공의 적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중동 역시 구약만을 믿기에 고리대금업과 같은 금융업이 유럽에 비해 더욱 발전하여 그들은 이미 유럽 기준으로 중세 시대에 어음과 같은 직접적인 금전거래 없이 무역이 이루어져서 유대인이 따로 금융업을 할 여지가 없었다.)

최대. 최악의 홀로코스트 수용소였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렇게 유럽에서 미움받는 사람의 대명사가 된 유대인 그럼 그들은 왜 600만 명이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나? 그것 역시 두 가지 이유로 생각된다.

하나는 십자군 원정 때부터 있었던 유대민족에 대한 약탈의 역사 때문이오.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시온주의에 입각한 유대 국가 설립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꺼번에 맞물려 이상하리 만치 꼬이고 꼬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십자군 당시 초기에는 영국이든 프랑스이든 정당하게 원정 자금을 마련하여 전쟁을 치렀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징집과 군자금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십자군은 육로든 해로든 중동으로 이동 간에 유대인들의 돈에 눈독을 들였으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성전(聖戰)을 위해 유대인의 돈을 강탈하였던 역사가 존재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세기에 이르렀고 제1차 세계대전을 패전한 독일은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경제공황까지 덮쳐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을 통해 모든 걸 원상 복귀하고 또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상황은 역전되어 다시금 독일은 유럽의 중심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책에도 나와 있지만 나치는 분명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 건립을 위한 이주계획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아이히만도 그런 유대 시온주의자들과 협력하여 일정 부분의 돈을 받고 그들을 무사히 그곳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계획에 동참하여 유대인들을 만나고 직접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그곳은 독일 입장에서 적대국인 영국의 식민지였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고 만다.

유대인 시온주의자 입장에서는 영국의 편을 들어주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들이 원하는 국가 이스라엘을 좀 더 쉽게 건국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고 유대인 권력자들은 연합국 쪽으로 자금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독일은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하고 십자군 원정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재산을 국가적으로 강제 몰수하게 된 것이다. 이제 독일과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종 해결책이라 불리었던 유대인 학살을 실행하게 된 것 이 복잡한 구조가 600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과 그 외의 곳에서 총살당하는 집단 학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재판 당시의 아돌프 아이히만

위 내용을 알아야 책의 내용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했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런 역사적 맥락은  차치하고 일어난 현상에 대한 도덕적, 정치철학적 판단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책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자.


책은 제1장 정의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이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의 판사가 도착하여 재판이 시작됨을 알리는 '베스 하미쉬파스'를 언급한 것으로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의 주요 피의자로 기소된 배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과 나치 정권 하에서의 일련의 사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그 외 독일 점령 지역에서 있었던 유대인 말살정책의 시행과 아이히만의 재판과 판결 그리고 집행을 시간의 순으로 나열하는 서사적인 구조를 가지고 전개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두 개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는 과연 아이히만을 전범재판소가 아닌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그를 재판하는 것이 정당한가?

다른 하나는 피고 아돌프 아이히만이 주장하는 전체주의의 구성원으로서 충성했을 뿐이지 집단학살에 대한 악의적 마음을 품고 실행한 일이 아니므로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 여부 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당대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에게 수학했던 그녀답게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이것에 대하여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반론하는 형식으로 답하는 그녀의 논리를 살펴보자.


1.  승자의 법정의 훼손된 정의의 문제

2. '인류에 대한 범죄'의 타당한 정의

3.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새로운 형태의 범죄자에 대한 인식의 문제



좀 어려운 것 같지만 풀어쓰면 간단한 문제들이다.

먼저 이스라엘은 분명히 2차 대전에 대하여 승자도 패자도 아닌 축에 속한다고 할 것이나 팔레스타인에 없었던 국가가 2차 대전의 승전국들의 비호 아래 만들어졌다는 부분에서 분명히 승자의 자격으로 패자의 국민을 자신들의 법정에 세운 것이다. 승자가 패자를 객관적 입장에서 재판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의 민족을 600만 명이나 집단학살했다는 죄명으로 기소된 자를 말이다.


두 번째 예루살렘 법정에서는 앞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회피로 그를 전쟁에서 행해지는 일상적(?) 살상에 대한 전쟁범죄가 아닌 '인류에 대한 범죄'로 명명했다. 이는 법정에서 다루어진 최초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런 새로운 형태의 범죄자에 대한 인류의 인식에 대한 문제도 함께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예루살렘에서 다룰 재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끔찍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아돌프 아이히만은 너무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차라리 그가 괴물 같은 인간이었으면 이스라엘 정부와 법원은 좀 더 수월하게 재판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으로 600만 명의 사람을 학살한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다.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전체주의 하에 평범한 국민들이 악을 행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법률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판결에 대한 우리의 도덕 기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적인 모습은 잔혹한 일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에 논리에 의하면 과연 승전국 미국이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때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한 조종사는 무엇인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이 패전했다고 한다면 일본은 그를 잡아 도쿄의 법정에 그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이 금융자본주의 제국주의화된 국가의 일원으로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수십만 명에 이르는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했으므로 그는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의 죄는 승자의 국민인가 패자의 국민인가에 따라 영웅과 괴물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그 어떤 논리로도 관료주의화된 국가의 일원으로서 행하는 악에 대하여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주인공은 그저 1980년 공수부대에서 최선을 다해 시위를 진압했으며 그 공로(?)로 경찰에 특채되고 조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그가 과연 죄인일까?

이 끝이 없는 질문에 생각을 더 해가는 책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아이히만에 대하여 무사유, 무비판적으로 나치의 명령을 수행한 그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한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숙고하고 결정할 존엄이 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한 그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죄명 '부화뇌동죄'.

'우렛소리에 맞춰 함께한다'라는 뜻으로, 자신(自身)의 뚜렷한 소신 없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意味) 하는데 아마도 그의 죄를 판단하는데 이 아이히만의 판결이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은 분명 특정 집단, 특정 민족, 특정 국가에 대한 특정 구성원으로서의 일상의 관점에서의 범죄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이 같은 엄청난 재앙이 범죄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일상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확률이 아주 높다는 심각한 염려를 우리 스스로 제거하는 일이라 하겠다. 이상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사건 승전국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 조종사는 분명 아이히만 대신 도쿄의 법정에 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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