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Oct 17. 2023

빨래

빨래를 개는 마음


 빨래가 또 쌓였다. 내가 늘 밀리는 건 빨아야 할 빨래가 아니라 개야 할 빨래들이다. 빨래를 분류해 세탁기에 돌리고, 세탁된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돌리는 것까지는 부지런하게 바로바로 한다. 그런데 건조기에서 꺼낸 따끈한 빨래는 한 김 식힌다는 핑계로 침대에 널어놓고 미룬다. 처음 한 빨래들은 이미 식은 지 오래지만 두 번째 순서로 돌리고 있는 빨래랑 한 번에 개야겠다는 명목으로 외면하며 또 미룬다. 그러다 보면 오전에 돌린 빨래가 오후 늦게까지 널브러져 있기 일쑤다. 나는 차게 식은 빨래들을 저녁시간이 다 되어 남편 퇴근 직전에, 혹은 남편이 퇴근 후 샤워하러 들어갔을 때 개기 시작한다. 남편의 수건, 양말, 속옷 그리고 남편이 옷 속에 받쳐 입는 하얀 면 티들은 늘 내 손을 거쳐 빤듯하게 정리된다. 매일매일 늦장부리긴 하지만 나는 스스로 빨래를 꽤 잘 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편이 내가 개어 주는 빨래를 굉장히 만족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결혼 직후, 어머니 스타일에 맞춰 오랜 시간 동안 개어져 온 남편의 옷가지들의 방향을 내 스타일로 새롭게 바꾸어 개던 때가 떠오른다. 속옷에 세로로 난 줄을 가로 줄로 바꾸어 접으며 남편의 인생에 사소하지만 중요한 개입을 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11년이 지난 지금 남편의 빨래들은 내가 낸 방향에 길들여져 있다. 겸이를 낳고 이모가 2주 동안 우리 집에 머무르시며 살림을 봐주셨다. 그때 무던한 성격의 남편이 못 견뎌하던 것이 바로 빨래였다. 사실 이모한테 남편의 빨래는 내가 갠다고 계속 말씀을 드렸음에도 이모는 조카가 조금이라도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재빨리 빨래들을 개어놓곤 하셨다. 똑바르게 칼 같은 각도로 빳빳하게 개어져 있어야 만족하는 남편은 이모가 개어주시는 빨래에 2주를 꼬박 괴로워했다. 나는 이때부터 빨래 개기에 자부심이 생겼던 것 같다. 꼼꼼한 남편을 만족시켰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 아니면 못 견디는구나 싶은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빨래 개기에 소질이 있는 줄 몰랐다. 나는 결혼 전까지 엄마가 옆에서 빨래를 개고 계셔도 옆에서 조잘조잘 입만 떠들며 앉아있던 철부지 외동딸이었다. 결혼 후, 인터넷으로 빨래 개는 법을 검색해 보면서 방법들을 터득했었다. 여러 방법들 중, 가장 깔끔하고 예쁜 방법을 골라 연습해보곤 했다. 연습하는 내 손이 당연하다는 듯이 힘을 주어 꾹꾹 눌러 빨래를 개는 모습에 문득 할머니가 떠올랐다. 빨래를 개는 방법은 인터넷으로 배웠어도, 주름을 하나하나 펴는 섬세함이나 손에 힘을 주어 꾹꾹 누르는 것은 배운 적이 없다.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이 행동들은 할머니를 닮은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7살 때,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치매가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라 모든 것에 의지가 없으셨다. 그런 할머니가 유일하게 의지를 가지시던 때가 있었는데, 바로 빨래 개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 올 때면 반짝이는 눈으로 마치 본인 몫의 일인 것처럼 당연하게 다가오셨다. 할머니의 빨래 개는 시간은 엄청 길었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이때만큼은 생기 있으셔서 빨래 개는 시간 동안은 아무도 도와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얼마나 꼼꼼하게 개시던지 할머니의 손을 거친 빨래들은 작은 주름하나 없이 예뻤다. 마치 다림질을 한 것처럼 반듯하고 정갈했다. 빨래들의 구석구석 주름들을 평평하게 만들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은 아름다웠다. 어린 나는 할머니가 빨래 개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가족의 빨래를 입가에 미소를 듬뿍 안고 혼자 끝까지 개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빨래를 개셨던 걸까? 할머니가 주름 하나 없이 개어 놓은 빨래들처럼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작은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하고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가족들의 몸에 닿는 옷가지들을 응원과 사랑을 담아 온 구석구석 메 만져 주신 게 아닐까? 빨래를 개는 것은 그때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할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옷을 입고 평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가끔 빨래 개기가 너무 귀찮고 싫을 때면 할머니를 떠올린다. 빨래 개는 할머니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덩달아 미소가 지어지면서 정성껏 빨래를 대하게 된다. 나는 매일 할머니처럼 손끝에 응원과 사랑을 담아 내 가족들의 빨래를 갠다.   

작가의 이전글 야구팀에 빠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