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시작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브런치였다.
하지만 매일 발행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부담이 되었고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곤 했지만 어느새 다시금 세 번째 글을 쓰게 되었다.
정리 겸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글 쓰기는 내 삶의 도피처였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보다 그냥 털어놓고 싶은 곳이 필요했기에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나의 브런치 활동을 알리지 않았다. 아직은 누가 읽어도 상관없는 글들 뿐이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공유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었기에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아직은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 매거진 《산티아고 가는 길》과 두 번째 매거진 《두 번째 까미노 그리고》를 발행하던 일이 반년 가까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었고 매일 아침 무언가를 쓰지 않으니 허전해졌다.
올해는 기나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도로 가기로 결심했던 터라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분간 해외여행은 접고 제주도 구석구석을 경험하려고 했다. 계획대로라면 2020년 4월 1일 제주도민이 되었을 예정이었고 두 번째 매거진이 끝났을 때는 이미 제주도에 정착하고 있었을 상황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집에 머물러야 하는 날이 많으면 제주도 정착기를 써서 이어가려고 했다. 내 삶을 공유하다 보면 조금은 더 신경 쓰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발목이 잡혔고 난 지금도 여전히 서울에 있다. 태풍이 오기 전에 서두르고 싶었는데 이제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평상시에도 셀프 자가격리 중이어서 사회적 거리 두기는 나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넌 왜 집에만 있냐'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훨씬 더 마음은 편하지만 굵직한 인생 계획이 첫 단추부터 어긋난 게 힘들었다. 떨쳐버리기 위해선 다른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나에겐 소장하고 싶지만 너무 낡아서 더 이상 가지고 있기 힘들어진 책들이 있다. 새 책으로 교체하고 싶지만 이미 단종된 책들이라 그럴 수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책 쓰기를 하기로 했다. 성경 필사 같은 텍스트 파일 작업이다. 제주도에 가기에 앞서 서둘러 볼까 고민하다가 준비할 게 많아서 포기해야 했고 저작권 문제도 있어서 제주도에 가서 천천히 시도해 보려 했지만 발이 묶인 지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사실 섬으로의 이사는 육지에서의 이사와는 사뭇 다르다. 무게와 부피를 생각하면 버리고 가서 새로 사는 편이 더 나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가지고 있는 책을 모두 가지고 갈 수 없었고 읽고 싶을 때마다 새로 사기엔 너무나도 부담이라 고심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기도 했다. 사실 예전부터 여행을 갈 때마다 음악이나 영화를 스마트 폰에 저장해 가기보다 이런 문서 파일을 더 많이 챙겨가곤 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책과 함께였다. 나갈 수도 없었고 집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도 없으니 자연스레 책을 접하게 되었고 집에 있는 책은 어떤 책이든 다 읽었다. 어머니는 오빠에겐 장난감을 사주었지만 오빠는 나가서 놀았고 반면 나에겐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종이인형도 사주지 않으셨다. 누군가 주고 간 인형을 가지고 놀았던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것조차도 낡았다고 나 모르게 버리셨다. 오빠를 상대로 총싸움이나 레슬링을 상대해 주면 오빠는 가끔 소꿉놀이 상대를 해주었다. 물론 두어 번이 전부였지만 오빠와 함께 한 유일한 기억이자 추억이었다.
선생님이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방이나 오락실, 롤러장 같은 곳에서의 추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도 그 약속은 지키며 살았던 바보였다.
어느 날 어머니 지인이 자기 딸이 가지고 있던 만화책이라며 나에게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그 책이 바로 《마리벨》이었다. 덕분에 난생처음 만화책을 접하게 된 나는 하루 만에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렸지만 애지중지 하던 책을 빼앗긴 그 언니는 며칠 뒤 아주머니 몰래 나를 찾아왔고 자신의 만화책을 모두 되찾아갔다.
이미 마리벨의 스토리에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소설 《내 사랑 마리벨》이 출간되자 큰 맘먹고 구입했다.
어린 시절 뜻하지 않게 접한 《마리벨》은 내가 읽은 유일한 만화책이었고 《내 사랑 마리벨》은 내가 처음으로 구입한 소설책이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읽게 된 《내 사랑 마리벨》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수십 번은 읽었고 지금은 지나온 세월만큼 빛이 바랜 채 책장에 꽂혀있다. 소장용으로 다시 구입하고 싶었던 책 중의 하나였으나 절판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처지가 다르지 않은 낡은 중고책조차도 부르는 게 값이 되어 버렸다. 추억이 담긴 책이지만 읽기에는 너무 낡아버려서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나의 이야기를 쓰기엔 아직은 용기가 필요했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책을 소개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