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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Dec 28. 2022

이혼하자고 편지 쓴 아내, 싫다고 답장한 남편

예의란 무엇인지,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도비는 슬프고 아프다가 지쳐 성냥개비 시를 써서 남편에게 보여줬지만, 남편은 웃었다. 그게 2021년 봄이었다. 참으면 괜찮아질 줄 알고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착각이었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도비는 마침내 큰 결심을 했고, 직접 자신에게 양말을 선물하기로 했다. 모두가 읽고 슬퍼한 도비의 성냥개비 시를 읽고 귀엽다는 듯 웃었던 도비의 남편.


이번만큼은 결코 얇고 가벼운 슬픔으로 보여선 안 돼.

성능 좋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쓰다가 예의 없다는 말을 자꾸 들은 도비는 마음을 굳게 먹었고, (또) 글을 썼다. 과연 예의란 무엇인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예의란 무엇인가


또 예의를 운운하네요

집에 들어온들 딱히 나눌 얘기가 없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헤드폰을 벗지 않은 게

예의 없는 일이라고 말하더니


나란히 차를 타고 간들 딱히 나눌 얘기가 없는데

노래를 좀 듣겠다고 정확히 말을 하며 양해 구하지 않은 게

예의가 없는 일이라고 당신은 또 말하네요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당신은 아직도 몰라요


그런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당신이고

나를 그렇게 만든 것 역시 당신인데

당신이 내게 예의 타령을 하네요


지나온 당신 삶은 과연

아내에 대한 예의를 차린 결과였을까요


당신의 하나님나라에 내 자리가 없고

당신의 교회에 내 자리가 없던 것도

다 예의 때문이었을까요


가뜩이나 육아로 고단하고 외로운 내 하루하루를

당신 공부로 줄기차게 짓뭉갠 것은

과연 아내를 대하는 당신의 예의였을까요


커피 한 잔

산책 한 번

놀이터 한 번

테레비 한 번


크지도 않은 내 요구를 수년간 뒤로 미룬 것이 예의였을까요

힘들어하는 나를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든 것도 예의였을까요

중요한 약속을 거듭 못 지키는 당신의 예의가 나는 싫네요

지친 나를 여러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당신의 그 예의가 나는 싫어요


앞으로도 당신이 실패를 거듭할 때면

늘 나를 화근으로 지목할 당신의 예의가 싫어요

당신의 그 모든 예의로 이미 충분히 지치고 병든 나는

언제고 다시 당신의 걸림돌이 될 테니 나는 그것도 싫어요


나는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세월을 당신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은 시절이 있었지요

당신은 매번 지금은 아니라고 했고요

그러면서 당신은 앞으로도 그러기는 힘들 거라고 했어요


내가 힘들어한 수년 동안 당신은 늘 공부가 우선이었어요

외롭고 지친 나보다 공부가 먼저였고

늘 자기 코가 석자인 게 더 큰일이었고

당신 발등에 떨어진 꺼질 줄 모르는 불이 제일 중요했어요


당신의 큰일 앞에서

나는 늘 요구 많고 불평 많은 못난 사람이 되었어요

그게 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어요


나는 이제 당신과 만들어가고 싶은 세월이 없어요

더 떨어질 정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이 벌써 여러 번이네요

내 절망의 깊이가 몇 번이고 계속 더 깊어질 수 있음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덕분에 깨달았어요

그러니 더 깊은 바닥을 발견하기 전에 여기서 멈추고 싶어요


당신의 부재가 내 불행의 원인이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제는 당신의 존재가 내 불행의 원인이 되었어요


당신 잠자는 모습과 코 고는 소리에 온몸에서 행복이 빠져나갑니다

당신이 10년후에도 10년 전과 같은 모습일 것 같아 싫어요

다가올 10년 동안도 나를, 나와의 관계를 늘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할 것 같아 불행하고요


하고 싶은 좋은 말이 없고 듣고 싶은 좋은 말도 없어요

나는 이제 당신을 보며 지을 미소가 없습니다


같이 마시고 싶은 커피가 없고

같이 보고 싶은 테레비도 듣고 싶은 음악도 없습니다

같이 가고 싶은 좋은 곳도 하나 없어요


이제 나는 당신과 나눌 희망이 없어요

당신을 향할 신뢰도 없어요

당신이 남편 아닌 남이 된다면 응원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당신의 아내인 채로는 할 수 없어요


앞으로 살아갈 몇십 년도

당신을 보면 불행해지는 채로 나는 늙어가야 할까요


그 긴 세월 당신은 계속 나의 굳은 얼굴을 봐야 하고

내 몸에 손을 델 수 없을 것이며

나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 일도 없을 거예요


매일 마주하는 불행을 이기려 애쓰며 사는 것도 고단한 나인데

당신은 예의마저 꾸며내라고 나에게 훈계합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고생을 더 해내라고 나에게 요구합니다


내 마음은 피폭을 입고 불구가 된 지 이미 오래라

나는 더는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이 나에게 예의를 논하다니

나는 슬프고 답답합니다


이 생활은 잘못되었어요


나는 더 이상 이 결혼을 유지할 기운도 의지도 없어요

멀쩡해 보이도록 노력할 능력이 이제 없어요


당신이 많이 변하느라 수고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쓴들

변하고 변해 간디가 되고 손흥민이 되고 이재용이 된다 한들

내 이런 마음이 변하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이제 분명히 알아요


내가 힘들어도 당신은 이해 못 할 것이고

내가 회피하면 당신은 예의를 논할 것이고

내가 싫어하면 당신은 언제든 다시 퍼져서 드러누울 테지요

그리고는 말할 거예요

인간은 다 나약하다고 그러니 부족한 당신을 이해하라고


당신이 공부하느라 피곤하느라 내 고통을 이해할 여유와 에너지가 없었듯

나는 당신과의 삶을 참고 버티며 사느라

더는 당신을 이해하는 데 쓸 여유와 에너지가 없어요

당신을 향한 사랑도 희망도 신뢰도 모두 소진되었어요

당신을 향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감추고 살 힘도 없고요


당신이라는 남편과 같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당신을 힘들게 하기도 싫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합시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차릴 마지막 예의입니다


읽은 모두가 슬퍼하고 화를 낸 도비의 성냥개비 시를 읽고 당신은 웃었지요

당신이 그 시를 읽고 웃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놀랐어요

이것마저 읽고 웃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때도 지금도 아주 진심이니까요






‘포티드’에서 쿠키를 주문하면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같이 준다. 슬프느라 떨어진 에너지를 고속충전 할 수 있다. 아 물론 체지방 충전도 초고속으로.



카페에서 눈물을 닦고 닦느라 8월 한여름에 볼이 트고 말았다. 갈무리할 것도 없이 쏟아내듯 글을 쓰고 마음을 추스른 후 패드를 덮는데 어디선가 본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에게 우리의 이혼을 알릴 순간이 임박했다고.


토요일에 글을 쓴 나는 우리 아빠가 그토록 바라는 안전이별에 최적인 순간이 언제일지 고민했다. 그리하여 일요일 오전 교회에 가는 길, 나는 남편에게 위에 쓴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글을 정말 보냈고, 그날 오후 스타벅스에서 남편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크라프트지에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을 담은 네 장짜리 편지를 받은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슬프다는 말을 이미 많이 썼지만,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슬펐다. 단 한 순간도 남편의 재산이나 직업, 지위를 보고 좋아하지 않았다. 커피소년 노래 중에 “그대 내게 올 때”라는 곡이 있는데, 나는 원래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 이제는 내 몹쓸 눈물 버튼이 되고 말았지만.


글 쓰다가 오랜만에 찾아들은 커피소년. 좋은 노래가 많다.




시간이 되신다면 아래 글도 같이 읽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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