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딴 병신 같은 나라 다신 안 돌아올 거야."
나는 여객기의 창문을 통해 점차 작아져만 가는 고향땅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이 나라에 계속 있는 한, 어쩌면 자아라는 것이 싹트고 나서부터 한순간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들만큼 익숙해져 버린 나의 ‘불행감’에서 언제까지도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기라도 하듯, 이 나라의 여러 뉴스에서는 기자들이 출산율이니 행복지수니 자살률이니 따위의 각종 지표들을 들이밀며, 이렇게나 불행한 이 나라는 앞으로 더욱 불행해질 것이라고 수시로 경고와도 같은 보도를 내보내곤 했다. 확실히 그것은 내 결정에 힘을 보태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것들을 진심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진실된 마음으로 믿을 수 있도록,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암시를 걸곤 했다.
'나는 언론을 믿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그나마 진실을 추구하려 애쓰는 이는 언론인 정도밖에 없다. 물론, 인간이 거짓말을 능숙하게 꾸며낸 다음, 심지어는 그것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러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보통 인간과는 달리 오직 진실만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야한다는 직업적 사명이 있지 않은가. 설령, 내가 지금처럼 또 궁지에 몰려 '진실'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기대하게 된다면, 그 누군가는 적어도 언론인일 것이며 언론인이어야만 할 것이다.'
라는 낙관적이고도 얄팍한 생각을 통해 스스로를 반복해서 세뇌시켰다. 그렇게, 나는 이따금씩 밀려오는 ‘어쩌면 나의 불행은 전부 나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정론과도 같은 의구심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하찮디 하찮은 나의 자기 암시도 발전기의 수증기처럼 정도를 모르고 피어오르는 나의 의구심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언론인도 결국 '인간'의 본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내가 그들을 완전히 믿는 것을 불가능케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무언가를 통해서가 아닌 나의 두 눈을 통해 직접 바라본 세상은 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번화가나 한강공원을 정처 없이 거닐 때마다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뜻한 카페 음료를 홀짝이며 산책하는 연인들, 친구들과 즐겁게 장난을 치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학생들, 어딘가 침착하고 들뜬 모습은 없지만 여전히 애틋한 중년 부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들은 불행은커녕 행복감을 잔뜩 머금고 있는 얼굴,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행복감을 살며시나마라도 머금고 있는 얼굴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어찌됐건, 내 눈에는 그들 모두에게서 일종의 만족감 또는 충족감 같은 것이 크고 작은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언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불행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 만큼 출중한 연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나를 제외한 이 나라가 여전히 살 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만약 내가 과거에 지금과는 다른 선택들을 했었더라면, 그 거리에서, 그 공원에서 나 역시 그들처럼 무방비하고도 해맑은 웃음을 침처럼 질질 흘리면서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미친 듯이 솟구쳐 나와서는 복도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초등학생들처럼 내 몸속을 마구 뛰어다녔는데, 그것이 내 몸속을 전부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쓰라린 고통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아무 벤치에 걸터앉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담배를 태우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아아, 이 나라는 확실히 불행하다. 앞으로 이 나라는 지금보다 더더욱 불행해질 게 분명하다. 이곳에 남게 된다면 나는 이 나라의 불행과 함께 침몰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떠날 거다. 나는 떠날 거다.'라고.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버틸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숨길 수 있었다. 갓 잡은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팔딱이며 저항하는 내 마음속의 그것을, 아무리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가 줄 수 있는 힘의 최대치를 다해 깊은 곳으로 수장시키려 해도 별 소용이 없었던, 겨우 밀어 넣었나 싶으면 여태까지의 내 처절한 몸부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쑥 다시 내 머릿속 뇌수의 수면 위로 떠올라, 나를 불시에 당혹스럽게 만들던 ‘자책감’이라는 녀석을 태극기로 꽁꽁 덮어 간신히 숨길 수가 있었다.
어느샌가, 여객기의 창문으로는 구름 밖에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잠에 스르르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