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 말, 떠오르네요
‘이달’의 남자라니.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매월 다른 남자를 만나는 자유연애 로맨스물, 혹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간 이세계물 등을 상상했다. 별개로 12개월 동안 12명의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스러웠다. 감정의 맺고 끊음이 다짐과 결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경계심이 먼저 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목으로 인한 오해였다. ‘이달의 남자’에는 소개팅으로 몇 차례 만난 사람, 학을 뗄 만큼 싫어서 밀어냈지만 또 연락이 온 전 직장 동료, 오랜만에 재회한 옛 애인, 같은 수업을 듣고 대화를 몇 번 나누었을 뿐인 수강생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애를 많이 해보라고 하는 말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라는 말과 다름없었던 듯하다. 연인이라는 특별한 관계로 묶이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 연애를 지속하기 위한 고민과 갈등,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그 모든 과정이 성장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웹툰 <이달의 남자>는 12개월 동안 12명의 인연을 만나며 성장하는 ‘도연’의 이야기이다.
미래라는 현실
‘1월의 남자’는 도연의 단골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21살 대학생이었다. 남자는 도연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했다. 그러나 도연은 설렘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끼지만 대체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남자의 외모도, 성격도 호감이었지만 도연에게 걸리는 건 나이였다. 30살의 도연은 21살의 행동과 생활에 거리감을 느꼈다. 사랑만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시절을 이미 경험해 봤기에, 연애란 현재의 즐거움뿐 아니라 미래의 괴로움까지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이에 따른 성숙함을 기대하고,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라는 말을 열심히 되뇌면서
동시에 ‘나이는 진정 숫자일 뿐인가?’하고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도연이 노파심으로 관계를 잘라내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8월의 남자’는 새로이 다니기 시작한 헬스장의 PT 선생님이었다. 선을 넘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있었지만, 도연은 ‘다가가지 않음’을 선택한 것이다. 왜 그 남자와의 로맨스에 적극적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웹툰을 통해 확인했으면 한다. 어쨌든 도연은 그저 운동을 통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8월의 남자와의 ‘경험’을 통해 본인에 관해 더 잘 알게 되었음에 만족했다.
“내 기준에 절대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행동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나에 대한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새로운 버전마다 불필요한 것은 제거되고 가능한 것들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10월의 남자’는 본인의 콤플렉스를 꽁꽁 감추다가 술을 마시던 중 고성과 추한 행태를 겸하여 사실을 실토했다. 이후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리당하자 도연은 “다양하게도 차인다…”면서 한숨을 쉰다.
<이달의 남자>는 도연의 ‘연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현실적인 고민을 배제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현실적인 고민’이란 ‘미래를 염두한 고민’이 아닐까. 이 사람과 더 오랜 시간 연애를 한다는 가정,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갔을 때의 생활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흐름이다. 일상을 벗어난 연애란 없다. 사랑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염두한다면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 외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이달의 남자>의 도연도 마찬가지다.
연애와 인생
학계와 각종 매체 등에서 “청년의 연애”가 화두에 오른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출산율 저하 이슈 대두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어쩌면 연애란 일정 수준의 여유가 담보된 이들만의 특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연애에 그런 거창한 의미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도연이 가지게 된 “잘 되면 좋지만 안 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타인의 애정 없이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방법”을 깨우쳐야만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큰 틀에서 본다면 연애도 그저 관계의 일부다.
도연의 목적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의 구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와 함께함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한결 나아졌다는 결과를 우위에 둠과 동시에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누군가도 소중하게 대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왕이면 마음을 다하고 싶고,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싶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고, 그런 욕심이 있어요.
근데 그건 욕심일 뿐이지 모두에게 그럴 수는 없으니까,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에 더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이성한테만 해당되는 건 아니고요, 누구든요.
마음을 얕게 많이 쓰는 것보다 깊고 적게 쓰고 싶은 거예요.”
우린 매번 현재에 비추어 미래를 유추한다. 물론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경우보다 아닌 경우가 많겠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예측하고 또 대응한다. 괜히 겁만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고, 경험이 쌓여 유연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미래를 염두한 고민은 되풀이된다. 도연은 연애를 통해 인생의 태도를 잡았다. 누군가는 남자나 여자, 혹은 동물이나 식물, 또 예술, 업무와 연애를 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일 테다.
참고로 해당 작품은 <이달의 남자 (이도나 원작)>라는 에세이 원작이 있다. 웹툰 <적당한 온도>를 통해 청년의 서사를 담백하고 흥미롭게 그려낸 우갱 작가는 원작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일부 변주하는 방식으로 원작과는 또 다른 맛이 있는 우갱식 <이달의 남자>를 만들었다. 웹툰 속 “이도연”에게 흥미가 생겼다면, 원작과 함께 다시금 관계, 그 속의 “나”를 발견하며 연애와 인생을 돌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