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의 공상과 의지는 누구의 몫이지?
서울 영등포구 영중로,
독립 예술공간 '방도' 개관전
⟪개인의 방⟫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6년을 지내다 대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제 반년쯤 됐나.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서울을 활보한다. 이번엔 영등포구에 갔다. 위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6년 전, 인프라를 누려보겠다고 전시며 연극, 온갖 행사를 다닐 때도 장마가 한창이었다. 손에 무언갈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 최대한 작고 가벼운 우산을 알아보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다시 또 장마다. 뭘 보고 먹고 씹든지 물이랑 잘 넘기란 누군가의 뜻인가. 이렇게 매일 날이 흐리니, 어둠과 친근해지면서 운명론에 빠지게 되는 건가.
0. 사설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했다. 더 일찍 와서 전시를 볼 계획이었지만, 바로 18시 워크숍에 참여해야 했다.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움직여도 이런 경우가 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뭉텅이로 어긋난다. 짐깐 손 놓고 눈 감는다고 편해지는 건 아닌데, 결국 배로 돌려 받는데, 매번 긴장을 풀고 호되게 당한다.
전시 워크숍은 처음이었다. 전시에 속한 작가들의 대담이라길래 궁금했다. 정답이 있는 문제겠느냐만, 작품을 작품만으로 감상하는 데에 한계와 갈증을 느끼는 와중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게 파문을 남기는 작품을 만나면 작가가 궁금해진다. 작가이기에 앞서, 이 사람의 다른 작품과 관련 기록이 간절해지는 거다.
작품이 작가와 떨어질 수 있는가. 작품이 작가의 일부를 대표할 수 있겠지만, 전체를 설명하진 않을 테다. 그럼 작가를 가볍게 압도하는 작품, 작품으로 대중을 설득하는 작가가 없느냐. 있겠지. 그럼에도 작가의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고 본다.
몇 개의 작품으로 충분하거나, 작품과 작가를 완전한 별개로 구분 지을 수 있다면 작품을 살필 때 작가의 전작을 왜 살피고 생애를 왜 연구하나. 고전 연구의 갈래가 왜 그토록 다양한가. 현재 검토 가능한 작품이 있다는 전제 하, 먼 과거의 기록에 더해 상대적으로 가까운 과거의 해석으로 완성되는 게 소위 말하는 예술 아닌가.
그래서 작가가 궁금했다. 작품보다 먼저 만날 줄은 몰랐다. 워크숍은 1시간 좀 넘게 진행됐고, 전시는 18시까지여서 못 봤다. 밤이 깊어가므로 서울에 사는 전 동거인의 거처로 갔다.
다음 날 오전, 방도를 방문했다.
1. 전시의 범위: 시공간과 환경
취향의 영역이겠지만, 공간의 여백이 지나치게 말끔하면 도리어 거부감이 생기곤 했다. 전시된 저 하나의 대상만 보라는 건가. 저 대상이 전체를 아우르는가. 전체가 이렇게 작고 단출할 수 있는가. 단출함 속에 복잡함이 있는 법이라지만, 그럼 나만 발견하지 못한 가치가 있는 건가. 전시란 기획의 의도가 보이도록 각 작품과 환경, 오브제 등이 시선의 방향과 동선을 고려하여 공간에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복선과 단서가 필요하다는 거다. 빈 공간이 그 자체로 사유의 계기가 될 순 없다.
모든 사유는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어느 철학자가 남긴 말을 차용한다면, 경험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 할 수 있겠다. 직접 겪는 게 아니다라도 무언갈 보고 느끼고 떠올렸다면 다 경험이다. 경험에서 비롯된 실마리라도 있어야 나아갈 수 있다.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한번도 사유해 본 적 없다면 갑자기 마주한 대상으로부터 우연히, 또 갑자기, 불현듯 가치를 발견하는 기적은 없다.
그렇기에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선 여백도 역할과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조명 아래 설치된 작품,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브제 외에도 본연의 공간적 특성, 정적과 여백을 포함한 환경 전체가 조화로울 때 비로소 ‘전시’인 것이다.
말끔하기만 한 환경에서 하나 혹은 두 개만 보는 걸로 충분하면 웹상 어느 곳에서든 편히 앉아서 보면 되지. 뭐 하러 시간과 힘과 돈을 써가며 방문하는가. 현장의 가치를 등한시한 전시를 전시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한참 불퉁거렸지만, 방도의 전시는 환경과 작품이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였음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팸플릿에 따르면 "방도의 개관전 ⟪개인의 방⟫은 시각 작가와 작곡가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방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 관여하겠다는 포부였다. 여백에 더해 정적도 전시의 일부란 뜻이었다. 그러고보면 소리 없는 공간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2. 방도의 시공간: 5개의 [개인의 방], 그리고 ( )
방도는 익숙한 갤러리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애초 방도란 전시 공간이 있는 건물은 거주 용도의 주택이었단다.
일단 허리 높이의 철문을 지나 성인 2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너비의 좁은 골목을 5~6 발자국 들어가야 한다. 그럼 방도가 있는 건물의 입구가 나온다. 건물 문 열고, 골목과 비슷한 느낌의 복도, 또 10 발자국쯤 갔던 거 같다. 이제 우측으로 꺾어져 계단을 오른다. 2층부터 ‘방도’다.
1층은 아직도 운영 중인 가게들이 있고, 전시는 2층과 3층에서 이루어지는 거였다. 2층엔 2개 방, 3층엔 3개 방이 있었다.
공간에 대해 일부를 설명한다면 페인트가 칠해진 거친 콘크리트 벽, 여긴 나무고 저긴 콘크리트, 혹은 판넬로 덮여 있기도 한 제각기의 천장, 여는 게 쉽지 않아 보이던 오래된 나무 창틀 여러 개, 1개 방을 제외하고 특정 방위 벽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창문, 그 많던 자연광,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나무 문 등이 있다. 위 요소로도 내겐 이미 서사를 충분히 머금고 있는 공간처럼 보였다.
해당 지면에서 5개의 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나의 경험과 당신의 경험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워크숍에서 청취했던 작가의 말도 가능한 떼어놓고 관람하고자 했다. 전시부터 봤다면 내게 주어졌을 정보가 이 시공간과 팸플릿의 소개글뿐이었을 터였다. 내게 주어진 정보는 초기화됐다고 거짓된 믿음을 품으며 공간에 들어섰다.
난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나는 공(空), 아무것도 아니고 다 잊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2-1. 조황순-정소희의 방
자, 동선을 떠올리며 말하고 싶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입구에서 팸플릿을 집어 든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황순-정소희의 방이 나온다.
몇 개의 천이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져있다. 자연광으로도 이미 밝은 방, 거기에 더해 작품을 비추는 조명, 여기서부터 전시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가 제법 큰 음악, 바닥에 작은 성처럼 쌓인 모래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래성들, 각 모래의 정상에 얹어진 그릇 혹은 용기들. 그 안의 구슬들이 있었다. 처음엔 천으로 눈이 갔는데,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해서라도 바닥에 더 신경이 쓰였다.
체험형으로 구성된 전시라, 한쪽 구석에 구슬이 담긴 통이 있었다. 통에서 구슬을 꺼내 각 모래의 정상에 얹어진 그릇 혹은 용기에 구슬을 넣는 것이었다. 그럼 흘러나온 음악에 귀 기울이게 되고, 그 음악에 새로운 소리를 얹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방이 꽉 찼네,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던 거다.
팸플릿을 살피니 작품들의 제목이 각각 <사공이많으면 배가 산으로간다>와 <연대의 여행>이었다. 여러 개의 모래성과 많디 많던 구슬, 놋쇠 그릇과 하늘거리던 쉬폰천으로 인해 어지럽고 분주했던 시선을 납득했다. 사공이 많다는 건 연대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연대의 방향성이야 이후의 일이지. 여행은 결과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가 산으로 가도 여행이라면 명랑할 수 있을 테다.
다만 “사공이많은”과 “산으로간다”에 띄어쓰기가 적용되지 않은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다.
2-2. 이규원-김민성의 방
<Cybernetic Park>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 방의 한가운데에 놓인 조형물 하나. 팸플릿엔 하나라고 적혀 있지만 구조는 복잡했다. 그 탁자 위에 9개 남짓 기계 조형물이 있고 기계 조형물 하나하나에 4개의 작은 사각형 통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통은 투명해서 속이 다 보였다. 도로며 풀이며 나무토막, 붉은색 돌이나 푸른색의 액체가 각각 들어있었는데, 공원을 조각내서 떼어 놓고 보면 이렇게 구성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이버네틱스란 피드백을 통해 자기 제어 및 조절에 이르는 시스템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36개의 공원 조각이 또 규칙적으로 모여 9개의 사각형을 만들어 오와열을 맞추어 있는데, 이 철저함은 피드백이 있기 전일까, 후일까 궁금했다.
방의 한가운데 탁자와 기계 조형물이 있었다면 구석 양 옆엔 큰 스피커 2대가 있었다. 난 대체로 바람 소리를 들었다. 공간 내부에 전혀 다른 공간을 조성한 거였다. 방인데 밖이었다.
2-3. 석지아-심해원의 방
시공간이 제일 밝은 방이었다, 고 느꼈다. 작품의 색감도 밝았지만, 자연광이 풍부했다. 전시라 함은 으레 그림이 있고,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데 여긴 그랬다. 내게 익숙한 풍경이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 거려나. 팸플릿에서 작품 제목의 대구가 보였다. <몸을 따라온 날개>, <가만히 뱉는 숨>, ...의 방식으로 총 6개 작품인데, 모두 낱말로 끝났다. 나열한다면 날개-숨-힘-너-꼬리-힘이 되겠다. 음악의 제목은 <너도 배고프구나......>인데, 힘을 2번이나 쓰니 배고픔을 느끼는 게 당연해 보였다. 지치고 힘들어 보였을 것이다. 앞뒤는 바뀔 수 있다. 음악의 화자가 먼저 대상을 봤고, 그래서 '너도 배고프구나......' 말했고, 그제야 대상이 본인을 설명하게 된 것일 수 있다.
제목의 텍스트로 풀어내는 서사를 생각하다, 어느 구석에서 훼손된 채 바닥에 놓여 있는 <주고받는 힘>이란 그림을 보다, 거기에 아래쪽에 꽂힌 플러그 선을 보다, 그 밑에 떨어진 그림의 일부를 보다 고개를 돌리고 창틀에 걸린 그림을 봤을 때, 수석(壽石)을 발견했다.
2-4. 수석: “시‘선’을 잇는 ‘점’”
내게 있어 전시의 밀도가 급변한 계기는 숨어있던 돌(들), 그러니까 수석(들)이었다. 석지아-심해원의 방에서 처음 발견한 수석이 다른 방에도 있는지 다시 살폈다. 수석은 나무 창틀의 윗부분이나 구석 등 방의 이곳저곳에 규칙성 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거치대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다. 창틀의 윗부분을 점령하다 부족하면 아랫부분에도 수석이 줄지어 놓인 방이 있었고, 구석과 튀어나온 벽에 덩그러니 올려진 수석도 있었다.
수석은 몇 번의 두리번거림으로 끝났을 “시‘선’ 사이의 ‘점’”으로 존재하며 전시의 ‘여지’를 메워 주었다. 내겐 수석이 그저 심미적으로 훌륭한 돌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이 여러 사업을 전전하다 결국 돌 파는 일을 한다는, 쓰게 요시하루 작가의 <무능한 사람>이란 만화가 있다. 판매하겠다며 강가에서 돌을 모으고, 근처에 좌판을 깔아 자리를 지킨다. 그는 대체로 손가락질을 당한다. 아내에게도 존중받지 못한다. 그가 찾은 건 그럴듯함도 없는 그냥 흔한 돌이었지만 본인의 돌을 꾸준히 수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돌의 운치를 느끼고, 가치를 알아보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돌을 골라 보관하는 행위에서 그의 뻔뻔함이 돋보였다. 이런 장면도 있다. 밤늦게까지 좌판을 지키는 주인공에게 아들이 찾아와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곧장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 그를 보고, 아들은 의아해하며 묻는다.
"저 돌, 저렇게 두면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주인공이 답한다.
"내버려두어라, 훔쳐 갈 사람 없다."
무능으로 포장한 뻔뻔한 사람의 전형이다. 그 정도 가치밖에 없음을 본인도 알면서 종일 근처에서 노닥거리며 연기를 했다는 건가. 그에게 돌이란 게 최후의 자존심이었을 테다. 돌을 모아 좌판에 깔아두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만이 그가 자존심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뻔뻔함이 우습다가 나라고 다를까 싶었다. 자존심 지키겠다고 연기를 한 적, 있었다. 그와 다른 점이라면 아내와 자식이 없다는 것일까. 와중에 흔한 돌임에도 선택받는 돌과 외면받는 돌이 있다는 상황이 많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투해야 했던 나의 처지와 겹쳐 보이기도 했다. 뻔뻔함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서 돌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시선을 옮기며 만화를 읽었던 경험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방도의 정적과 여백에서 발견한 돌(들), 그 수석(들)은 주인공이 깔아 두었던 좌판의 색다른 도전처럼 보였다. 딱 맞는 거치대까지 갖추고 그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사연을 읽었다.
특별해서 애정을 가지는 게 아니라, 애정을 가지니 특별해지는 걸 테다. 애정의 기원은 경험이기에 그렇다.
2-5. 이동혁-이석희의 방
빈 방, 인 줄 알았는데 소리도 있고 조형물도 있다. 뭐지, 싶어서 팸플릿을 보니 "VET 시리즈는 '박쥐'와 '오래된 가구'를 주요 키워드"로 한단다. 방의 중앙 언저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스피커와 조형물, 스피커는 하얗고 큰 직사각형 통이었다. 조형물은 직사각형의 나무틀 안에 투명한 창이 있었다. 그 안에 작은 주황색 불빛이 있고, 박쥐처럼 생긴 무언가가 들어있는 걸로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나무 문이 있었는데, 문고리가 없다. 그 옆엔 기울기가 적용된 것처럼 보이는 직사가형의 나무 프레임이 있었다. 어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팸플릿, 창틀, 수석,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율리시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박쥐, 박쥐, 다시 팸플릿, <피네간의 경야>?, 다시 창틀이었던가. 귀를 자극하는 낯선 소리와 여지로 가득한 공간에서 점의 연속을 시선이라고 착각했던 건 아닌지 되묻게 됐다.
2-6. 강청아-윤은혜의 방
음악이 불온했고, 어두웠고 얼굴이 많은 방이었다. 형체가 명확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얼굴들임은 확실했다. 팸플릿엔 "광복 직후 한국의 졸업 앨범을 활용"했다고 쓰여있었다. 흰색 벽, 흰색 천장, 다른 방도 흰색 벽이었지만 천장은 검었다.
공간의 흰색 벽을 채우고 있는 작고 빼곡한 얼굴들, 그 사이 중간 크기의 얼굴들, 당연하게도 다 흑백이었다. 이 방은 창문의 위치에 판자가 덮여 있어 자연광이 없었다. 따라서 창틀도 없고, 수석도 없었다. 대신 그 판자의 한가운데, 홀로 중간 크기의 얼굴이 하나 붙어 있었다. 이미 얼굴이 있으므로, 눈이 없어도 시선을 상상하게 됐다. 사면이 온통 얼굴뿐이니 내가 그들을 보는지, 그들이 나를 보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빽빽한 '점'에서 시선을 돌렸다. 거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 소리가 꽤 컸다.
방의 중앙엔 짙은 고동색의 연식이 꽤 있어 보이는 나무 책상이 있었고, 유리가 올려져 있었다. 유리는 어두운 면에 가까이 붙어 있을 때 비교적 밝은 면의 상(像)을 구현한다. 그러니 또 얼굴이 생기는 것이다. 책상에 놓인 의자 뒤에 서면 거울이 있다. 그러니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뒤에 또 얼굴이 있다.
열린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펼쳐진 공간에서 막힌 공간으로 여지없이 몰아붙이는 이 방에도 여백은 있었다. 들숨 다음엔 날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레 빽빽함 뒤로 허전함을 찾았다. 수순에 따라 움직인 시선은 얼굴들 아래, 비어있던 벽으로 옮겨졌다. 방의 공상과 의지는 결국 네 몫이란 그들의 의지였으려나. 비어있는 벽에도 울퉁불퉁 나름의 질감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오롯하게 나의 시선, 나만의 점들만 머물렀다.
3. 방의 공상과 의지
팸플릿의 전시 소개에 따르면 "각기 다른 방이 어떻게 다성적인 밀도로 존재 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며, "감각의 분산을 통한 공간 구성의 가능성을 탐색"한다고 했다. 방도에 '점'이 많았으니, 시'선'도 많았다. 점이 많으니 시선의 경로가 복잡해진 거고, 음악 역시 전체의 일부로서 오롯이 작동했다고 하면 나름의 설득력이 생기려나.
희미한 여지를 잡고 막연한 기대를 품을 때면 으레 가능성을 탐색한다고 말했다.
행위 그 자체의 의미를 외면했던 건가. 새로운 가능성의 실마리는 본래 희미하고 막연한 법인가.
눈을 깜박거리더라도 시선은 이어진다.
소리가 있어 그 찰나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대상의 존재감을 의식했다.
촘촘하게 줄지어 나열된 점은 선으로 연결되었다.
방도의 전시는 5개의 ⟪개인의 방⟫에서 이루어졌으나, 더 많은 '방'이 숨어 있었다고 본다. 입구부터 이어지는 방과 방 사이의 경계, 경계를 건너기 위해 거쳐야 할 복도를 이루는 요소, 그 외 정적과 여백이 경험에서 비롯될 사유를 유기적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방의 공상과 의지는 언제나 개인이 가진 경험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