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드러내는 인간다움

-웹툰 <19년 뽀삐>를 중심으로-

by 김득원

1. 반려동물 웹툰 서사의 확장


웹툰 장르 내 ‘반려동물’은 대체로 정서적 위안·치유의 상징, 소통의 환상을 투영하는 매개, 서사적 편의성을 위한 도구, 사회적·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전략적 장치로써 활용되어 왔다. 모죠의 <마루는 강쥐>는 개가 인간으로 변해 주인공과 함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상을 그린다. 나이를 유아로 설정하여 보호-피보호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표현에 한계를 두지 않는 방식을 통해 반려동물의 시점에서 가질 수 있는 고충을 효과적으로 전하여 인물들의 정신적 성장을 그린다.


순의 <탐묘인간>, 초의 <내 어린고양이와 늙은개>, 홍끼의 <노곤하개>, 골드키위새의 <우리집 새새끼>, 최삡뺩의 <푸들과 Dog거중>, 이선의 <개를 낳았다> 등은 반려동물과의 일상, 개그와 감동, 때론 문제의식을 고루 전하며 몰입감을 형성한다. 이에 대해 유인혁(2024)은 ‘힐링’ 서사, 동물로부터 위안을 얻거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성격을 부여하여 심리적 편익을 취하는 주체로서의 반려동물 웹툰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시혜성이 강화됨을 확인했다. 또한 공감과 위로의 서사가 전하는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동물에 대한 시혜성, 생사여탈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면서 이를 “제국주의적 식민화의 위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영신의 <19년 뽀삐>는 반려동물 웹툰으로서 확연히 이질적인 서사적 방향성을 보여준다. <19년 뽀삐>는 의인화된 개 뽀삐, 즉 인간에 준하는 사고능력을 가진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하며, 타자(他者)와의 교류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다움의 본질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뽀삐와 병걸이 피보호-보호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 관계 내 뽀삐의 역할은 단순한 애착, 확고한 의존, 맹목적 응원 등으로 한정되는 걸 넘어, 독립된 실재의 ‘타자’로 자리한다. 서로가 독립성을 유지한 채로 교류하여 각자의 존재를 성찰하게 만드는 역동적 상호작용의 장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존재의 실재성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됨을 시사했던 사르트르의 개념을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아, <19년 뽀삐>의 의인화된 개 뽀삐가 타자의 실재성을 획득하는 방식, 뽀삐라는 타자의 존재와 병걸과 나누는 교류의 형태를 확인하여 반려동물 웹툰의 서사적 방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1)


1)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이 동물툰을 이데올로기의 수동적인 반영물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화적 텍스트는 시대적·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거기에 완전히 종속된 것도 아니다. 많은 동물툰이 동물을 힐링의 도구로 타자화하여, 인간-비인간 관계의 비대칭성을 강화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동물툰은 바로 그러한 담론의 초월 가능성 역시 보여주고 있다.”며, 해당 글의 목적성을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유인혁, 「한국 웹툰 ‘동물툰’에 나타난 힐링의 이데올로기」, 대중서사연구 제30권 2호, 2024. 217p.



2. ‘존재론적 타자’로서의 뽀삐


image.png © 마영신, <19년 뽀삐>, 씨네21북스


<19년 뽀삐>의 도입부, 뽀삐는 자신의 보호자인 병걸을 “병걸이 형”이라고 소개하며, 난생 처음 나간 공원에서 본인이 사람이 아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병걸, 병걸 엄마와 함께하는 생활이 보이는데, 여기서 뽀삐는 병걸과 병걸 엄마의 보호를 받으며 수동적이고 일반적인 존재이다. 아직 1살에 불과하기도 하다. 병걸이 학교로 나가고 병걸 엄마마저 출근을 하면 집에 혼자 남겨지는 뽀비는 홀로 공놀이를 하거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병걸이 돌아오고 있음을 눈치 채어 신나서 뛰거나, 병걸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밥에 고기가 두 덩이나 들어있음에 만족하며 잠든다. 여기서 뽀삐는 한 개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2)을 이미 획득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세계관 내에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19년 뽀삐>는 만화적 허용을 통해 동물을 의인화하여 타자로 승격하고, 인간과 서로 ‘소통’하는 관계임을 전제한다.3)4)


2) “정체성이란 한 개인의 특성이다. 정체성은 연속성을 지니며 따라서 기억이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성별, 직업, 국적, 인종 등으로 다양한데 가장 대표적인 정체성 요소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름과 개인의 동일성(identity)이 인정되어 정체성(identity)이 확인되는 것이다. 고슬기, 「후안 호세 미야스 단편소설에서의 반려동물을 통한 정체성 유희」, 스페인어문학 제114호, 44p.
3) 병걸은 산책을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목줄을 끈다. 여기서 뽀삐가 “멍!(잠깐!)이라고 외치자, 병걸은 같은 컷에서 뽀삐가 있는 뒤를 본다. 병걸은 멈추고, 뽀삐가 풀숲으로 들어가 배변하는 상황을 기다림으로 채운다. 이는 단순히 수나우라 테일러가 말한 “개별 동물이 원하고 필요로 하고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갔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작품 속 인간과 동물의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기에 일상적인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는 동물이 가진 삶의 주체로서의 권리와 요구, 인간이 한 개체의 삶 모두를 받아들이는 ‘응답’의 태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요구, 그 요구에 응하는 행위의 단면을 묘사하는 게 아닌,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살고 함께 배우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전제인 것이다. 최미정, 「반려동물 소재 시작품을 통해 본 ‘새로운 관계 만들기’의 가능성 검토」, 문학과 환경 제22권 3호, 문학과 환경, 2023, 226p 참조.
4)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은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인간중심으로 타인(他人)에 국한된 타자를 다루었으나, 데리다는 타인을 넘어 동물까지도 포괄하는 새로운 관점의 타자 이론인 ‘동물타자’ 개념을 제시하였다. 해당 개념 역시 ‘인간화’의 의혹, 공산의 산물 등 오류 가능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19년 뽀삐>는 독자에게 뽀삐는 ‘의인화된 개’로, 작중 인물들에게는 철저히 평범한 ‘개’로 구분지어진 채 전개된다. 따라서 뽀삐는 동물타자 개념으로의 확장되지 않고, 타자 이론만으로 설명 가능하다. 이솔, 「사르트르와 동물 타자의 문제 -인간중심주의(anthorpocentrism」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 2024, 21-32p 참조.


시간은 빠르게 흘러 뽀삐가 5살이 되고, 병걸은 14살이 된다. 병걸 엄마가 폐결핵 판정을 받으면서 병걸 가족이 지방의 이모네로 가게 되면서 뽀삐의 환경도 달라진다. 원래 집 안에서만 살던 뽀삐까 전원주택 마당에 본인만의 집이 생기면서 밖으로 왕래를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뽀삐가 집 밖으로 나간다는 행위는 더 이상 해당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병걸의 의식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뽀삐가 집 밖으로 나감으로써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병걸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뽀삐는 병걸의 인식, 즉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온전히 통제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다른 ‘의식’으로서 현전하게 된다.5) 뽀삐가 독립된 주체로서 탈바꿈하여, 병걸이 동일화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실존적 타자가 되는 것이다.


5)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성 옮김. 동서문화사. 2012.; j. p. Sartre, L'être et le néant, Paris: PUF, 1989, 460p.; 이솔(2024), 같은 글, 18p 참조.


밖을 돌아다니는 뽀삐의 일상이 특별하진 않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고, 대화를 나누며 동네 개들의 과거에 대해 듣는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개 ‘검순이’가 생긴다. 어느 날, 검순이의 집에 크고 마른 개가 찾아 와 검순이에게 교미를 시도하려 한다. 이를 본 뽀삐는 “야!! 검순이한테서 떨어져라.”, “뭐, 시발아.” 라면서 싸움도 불사한다. 이내 싸움이 시작되지만, 거칠게 대응하던 기세와는 대비되게 달려오는 적을 두고 겁에 질려 눈을 감는다.


여기서 뽀삐의 주체성 확립과 <19년 뽀삐>의 동물 간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먼저 뽀삐의 주체성 확립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뽀삐는 의인화된 타자이다. 기존 반려동물 웹툰 서사 내 작품들 또한 반려동물의 시점에서 독백을 통해 전한다. 그러나 이는 특정 상황에 대한 반추, 짐작과 상상을 통한 인간의 애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다. 반려동물 시점으로 인해 중심 서사에서 직접적으로 인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 짐작에 의한 변화를 간접적으로 독려하는 형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개채성의 인식은 존재의 타당성 인정을 통한 상호주관적인 세계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관계를 맺는 주체성의 확립을 시사한다.6) 싸움 도중 겁에 질려 눈을 감는 행위는 뽀삐의 나약함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본능적 공포, 더불어 ‘이질적 촉발(hétéro-affection)’ 사고7)가 가능하다는 반증이다.


6) 김영임, 「반려동물의 시적 구현이 갖는 ‘동물로의 전회’ 가능성 검토 -최근 발표된 동물 시를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제70집, 2021, 26p 참조.
7) ‘나는 자신의 경험의 영역에서 타자를 구성하는 자이다’라는 자기 촉발(auto-affection)의 관념과 달리, ‘의식은 타자의 존재 속에, 그리고 타자의 존재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는 개념으로 개인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타자와의 조우를 인지하는 것이다.


image.png © 마영신, <19년 뽀삐>, 씨네21북스


뽀삐가 새로운 친구 ‘나비’를 만나고 제일 처음 하는 인사는 “난 뽀삐라고 해.”였다. ‘이름’의 부여 여부는 뽀삐가 반려동물로서의 지위를 갖기 위해 중요한 조건이다. 여타 동물과의 차별점이 생기는 것이며, 개별 정체성을 가진 독립된 개체로서의 특성을 되찾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 관문이자, 동등한 ‘행위자’로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또한 뽀삐와 나비가 서로의 이름을 공유하는 형태를 독자가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해당 작품의 동물 간 세계관에서 별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19년 뽀삐>는 뽀삐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인간과 소통을 하는 건 아니지만, 동물 간 세계관에선 인간처럼 소통하며 행동함에 따라 독립된 개체로 연결되는 시간을 형상화하며, 고유의 타자성을 가지고 또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뽀삐는 병걸 이모의 동네에서 많은 사건을 겪는다. 나비가 다른 유기견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 형은 나한테 절대 안 그럴 텐데…”라며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던 순진하던 시기를 지나, 개를 훔치는 부부의 집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다시 또 몰래 집 밖으로 나가 검순이와 교미를 한다. 그리고 이때 뽀삐를 찾으러 나온 병걸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사망하게 되고, 뽀삐는 병걸과 이전에 살던 동네로 돌아간다. 뽀삐는 본인을 찾다가 병걸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갑자기 엄마가 없어진 것뿐이다. <19년 뽀삐>의 현실성은 뽀삐의 지능에 의해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image.png © 마영신, <19년 뽀삐>, 씨네21북스


뽀삐의 무지(無知)는 그야말로 유아적이다. 자아란 각자의 내면에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외부와 맞닿은 상태에서 타자와 더불어 있는 존재란 사실을 자각하고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뽀삐의 지능은 인간에 준하는 사고가 가능할 뿐, 배려의 이면이나 일상적 행위의 미세한 차이를 느낄 만큼 수준 높지 않다. 주관의 제한성을 벗어나진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8) 병걸 엄마의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 뽀삐는 본인의 집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한다.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병걸, 병걸 이모네 부부가 돌아왔을 때에도 뽀삐는 배고프다는 생각만 하다, 해맑게 “어? 왔다! 형! 형!”을 외친다. 무지에 의한 긍정을 비난할 수도 없으며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뽀삐의 순진함이 못마땅한 건, 동물-인간의 권력적 대칭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뽀삐를 원망하기보다 애틋하게 여기게 되는 것 또한 권력적 대칭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8)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후설(Edmund Husserl)은 유아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만약 성찰하는 자아인 내가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통해 나 자신을 나의 절대적인 [초월적] 자아(absolutes transzendentale ego)로 환원할 때, 나는 이 경우 ‘고립된 자아(solus ipse)’가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내가 현상학이라는 명칭 아래 일관되게 자기 해명을 추진하는 한, 나는 고립된 자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 현상학은 ‘[초월적 유아론](transzendentaler Solipsismus)’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은 아닌가?” 해당 맹점에 대해 사르트르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유아론적 세계에 갇혀 있다면 존재의 차원이 아닌, 인식의 차원에서 타자에 접근하므로 ‘타자’ 그 자체가 아닌 ‘타자에 대한 관념’으로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설은 ‘공감을 통해 타자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사르트르는 타자를 ‘항상 나의 인식을 초과하는 실재’로 보았기에 발생한 견해의 차이이다.;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데카르트적 성찰』, 한길사, 2009, 151p.; 이솔(2024), 같은 글, 12p 참조.


뽀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병걸 이모네 부부로 인해, 병걸은 전에 살던 동네로 가게 된다. 계획은 병걸 아빠까지 함께 사는 것이었지만, 그의 경우 일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사실상 뽀삐와 단둘이 지내는 것이다. 뽀삐는 다시 병걸과의 생활, 방 안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병걸이 집을 나서면 혼자가 되고, 또 병걸이 오면 꼬리를 치며 반기는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낸다. 뽀삐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친구, 연인을 만났던 시간은 끝나고 모두 추억으로 남았다.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뽀삐도 병걸도 나이를 먹는다. 성인이 된 병걸은 자연스레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지만, 뽀삐는 집 안에 남아있는다. 그리고 점점 노쇠한다.



3. 의인화된 동물-인간의 상호교류


앞서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을 통해 의인화된 동물 뽀삐가 획득한 타자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벙걸, 즉 동물-인간의 관계 내 병걸은 뽀삐란 타자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19년 뽀삐>에서 뽀삐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병걸에겐 개 짖는 소리로 들릴 테다. 마영신이 담아내는 지독한 현실성9)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 뽀삐가 병걸을 “형”이라고 칭하든, 반가워서 꼬리를 치든, 추위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든 병걸은 짖는 뽀삐, 꼬리 치는 뽀삐, 몸을 떠는 뽀삐로 보인다. 오랜 시간 봤기에 아는 경험을 토대로 반응할 뿐인 것이다. 의인화에 따른 뽀삐의 속내는 실상 독자만 아는 정보다. 해당 작품에서 뽀삐와 병걸의 상호교류는 뽀삐의 종횡에 힘입어 구체화된다. 다시 말해, 웹툰 속 뽀삐를 통해서 독자에게 내용을 전하고, 독자는 의인화 된 뽀삐가 전달해 준 정보를 토대로 병걸의 서사를 조망하여 소통의 환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가 보는 <19년 뽀삐>의 뽀삐와 병걸 간 상호교류는 뽀삐가 전한 정보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9) 마영신은 <연결과 흐름>, <엄마들>, <아티스트>, <락> 등의 작품 등을 통해 꾸준히 내면적 욕망, 허위의식, 관계의 긴장 등을 보여주었다.


병걸에 대해 말하기 전에 병걸의 특이한 외양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걸로 보인다. 병걸은 장발의 소유자이다. 왼쪽 귀가 없어 긴 머리로 가렸다. 병걸의 학교 생활에서 장발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장애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폭력성으로 발현된다.


image.png © 마영신, <19년 뽀삐>, 씨네21북스


병걸에게 있어 뽀삐는 가족 같은 강아지이지만 유일한 가족은 아니다. 뽀삐는 정서적 교감과 애착 관계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만, 병걸의 사회적 고립감을 해결할 존재, 혹은 무비판적이고 수용적인 존재로 기능하지 않는다. 작품의 초반부, 병걸은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문자 한 통을 받는다. “야 경식이가 너보고 귓병신이라고 욕하더라 ㅋㅋ;;” 병걸은 제일 친구였던 경식이 본인을 뒤에서 욕했음에 실망하고, 어두운 방에서 뽀삐를 안고 운다. 병걸의 눈물을 눈물을 보는 뽀삐는 조금 서글픈 표정으로 “또 우네 형…”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뿐이다. 본인을 욕한 친구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팔굽혀펴기, 섀도복싱 등을 하는 병걸을 보면서도 뽀삐는 ‘병걸이 형은 그날 이후 좀 무서워졌다.’고 생각하면서도 “형 놀자~”를 외친다. 물론 병걸에겐 개 짖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을 테다.


가족의 이사로 인해 병걸은 전학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뽀삐만큼이나 다양한 경험을 한다. 호감이 생기는 여학생이 생기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가 무리의 우두머리 친구의 심기를 건드려 은밀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 병걸에게 있어 가장 큰 사건이었다. 병걸은 은밀한 무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성격이라 이내 우두머리 친구와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맞게 되는데, 이때 뽀삐가 현장을 목격한다. 뽀삐의 대처가 기가 막힌데,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동네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을 끌고 와 병걸을 때리는 이들을 함께 공격한다. 타격의 충격으로 인해 배를 움켜쥔 채 몸을 말고 있는 병걸을 지키겠다는 것처럼, 그 앞에 도열한 개 4마리 중엔 우두머리 친구가 키우는 개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인간을 공격한 건 아니지만, 공격 태세의 개들은 충분히 위협적이므로 병걸의 싸움은 그렇게 일단락된다. 일상은 다시 이어진다. 병걸은 뽀삐에게 귀에 입으로 바람을 부는 장난을 걸고, 뽀삐는 평소처럼 “아이 간지러워.”(189p)하며 귀를 비빈다. 하지만 병걸의 표정은 어둡다. 은밀했던 따돌림이 거리낌 없는 따돌림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뽀삐가 개를 훔치는 부부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이때 발생하고, 잔뜩 겁에 질려있던 뽀삐는 병걸의 손에 의해 구출된다. 이처럼 뽀삐와 병걸은 서로의 극적인 순간을 운명처럼 함께했다.


image.png © 마영신, <19년 뽀삐>, 씨네21북스


그럼에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연쇄성을 이해하는 건 병걸 뿐이다. 병걸의 고초 역시 오롯이 병걸만의 몫이다. <19년 뽀삐>는 뽀삐가 인간사회의 이해관계에 무관한 한 마리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이는 여타 반려동물 웹툰 서사와 차별화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유인혁(2024)이 지적했던 것처럼 동물-인간의 관계성 내 동물을 감정적 기능을 위해 사용하는 이야기로 읽히지 않도록 하며, 동물을 편익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제한하지 않고 하나의 독립적 주체로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연구에선 일부 반려동물 웹툰에서 “긍정적인 반려인”이란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이라고 설명힌다. 이러한 통제는 인간의 긍정적 자아 구축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기와 반려동물을 적절히 돌볼 수 있는 건강한 자아를 획득”하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19년 뽀삐>도 병결에게 돌봄과 책임의 역할이 주어지지만 뽀삐가 심리적 편익의 제공처로 전락하지 않는다. 비대칭의 관계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을 위한 자원이 아닌 타자로서 공존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이는 뽀삐를 찾으러 나온 병걸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병걸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병걸의 양육에 대한 부담감과 미래를 고민하던 병걸 이모 부부는 뽀삐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자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병걸은 벌컥 화를 내며 “뽀비는 절대 안 돼요!!”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나 본인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전에 살던 동네로 이사하고자 한다. 이사 전날 밤, 일전에 싸움을 벌였던 친구들의 앞에 나타나 폭력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그리고 뽀삐에게 간다. 뽀비는 병걸이 등장을 반긴다. 그리고 병걸은 말한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때 되면 알아서 잘 들어왔는데. 오토바이… 아니, 아니, 개백정만 없었어도…”10) 이때 뽀삐는 벌벌 떨지만, 앞 장면에서 추위에 떠는 장면이 나온 바 있다. 그렇기에 뽀삐는 전후 맥락을 이해하며 병걸이 본인을 버릴지도 몰라 떠는 게 아니며, 그저 어떤 말을 하는 병걸을 추운 상태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병걸은 “이제 형하고 집에서 같이 살자”고 말함을 통해 돌봄과 책임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한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사고로, 본인의 인생에 주어진 시련이자 관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초연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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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병걸 엄마의 교통사고는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트럭에 치이게 되면서 발생했다. 마영신, 『19년 뽀삐 1』, 한겨레출판, 2016, 240p.



4. 존재 중심 세계관이 보여주는 ‘인간다움’


동물-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담론들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축적되어 왔다. 김광연(2019)은 반려동물의 사람의 양식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으며, 동물도 생명 그 자체로 본래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며11) 문성원(2024) 또한 동물들이 동물의 영역을 ‘동물’이라는 단수로 칭할 수 없으며, 무한한 복잡성과 차이를 지닌 타자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12) 송경란(2021)은 소설을 중심으로 반려동물이 정서적 결핍 완화의 도구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여생을 함께하는 존재로서 고찰하고 동물과 인간 공존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13) 최미정(2023)은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시들을 살피며 동물-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과 가능성을 검토한 바 있다. 동물에 대한 이해, 논의를 통해서 동물이 인간과 같이 “삶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보았다.14) 이들의 공통된 입장은 서민규(2023)가 말한 것과 같이 “인간중심의 세계관(anthropocentrism)에서 존재 중심의 세계관(ontocentrism)”으로 사고를 전환하여,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존재를 포괄할 수 있는 열림 개념으로의 갱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새로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으로 연결되기도 한다.15)


11) 김광연, 「동물 생명의 가치와 인간과의 공존 -반려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이중적 태도-」,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8권 3호, 2019, 97p 참조.
12) 문성원, 「동물과 인간 사이 -타자로서의 동물과 인간의 책임-」, 시대와 철학 제35권 3호(통권 108호), 2024, 7p 참조.
13) 송경란, 「또 다른 가족 서사_반려동물과 가족의 의미 재해석 -윤이형 소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를 중심으로-」, 한국어와 문화 제30집, 2021, 38p 참조.
14) 최미정(2023), 위 논문, 213-214p 참조.
15) 서민규, 「’인간다움’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접근 -포스트휴먼 시대의 실재론」, 교양교육연구 제17권 1호, 2023, 124p 참조.


뽀삐와 병걸이 원래 살던 동네로 이사를 오고, 병걸은 검정고시를 패스한 뒤, 공장에 취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 혹은 이미 알던 사람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다. 병걸이 바쁘면 바쁜 만큼 뽀삐는 외로워지지만, 여기서 뽀삐는 돌봄과 책임의 역할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내적 성장을 독려하는 존재로 기능하지 않는다. 점점 쇠약해지며, 이전에 비해 홥발한 활동을 하지 못할 뿐, 타자로서 병걸의 옆에 존재하면서 ‘타자’로서 실재한다. 뽀삐의 인간다움은 종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존재이기에 조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뽀삐와 병걸은 동물-인간이 아닌 존재-존재, 즉 서로의 실존적 교류로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19년 뽀삐>가 제시하는 인간다움은 존재 중심의 세계관에서 성립된다. 인간다움은 자율적 주체로서 고립적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뽀삐는 이러한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구현한 존재이다. 이는 반려동물 웹툰의 새로운 서사적 방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다움의 문제를 다시금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19년 뽀삐』라는 단일 작품을 대상으로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타자 개념을 통해 의인화된 반려동물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작품 내 뽀삐가 지닌 의인화 수준과 그에 따른 교류의 양상은 서사적 설정에 기인한 측면이 크며, 모든 반려동물 서사에 일반화하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더욱이 『19년 뽀삐』의 세계관 자체가 독자적이기에, 보다 다양한 장르와 작품을 횡단하는 비교 분석을 통해 타자 개념이 반려동물 서사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응용되는지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본고는 존재론적 타자 개념을 중심으로 교류적 인간다움의 형성을 조명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상호작용, 돌봄의 정치학 등 보다 복합적인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또한 뽀삐와 병걸의 관계가 도달하는 공존 상태에 대한 평가, 종 차이로 인한 한계 등에 대한 비판적 고찰도 이후의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나아가 『19년 뽀삐』와 같이 동물이 적극적 주체로 등장하는 웹툰 서사는 향후 디지털 매체 특유의 상호작용성과 독자 참여성이 더해질 때 새로운 형태의 존재론적 교류를 실험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반려동물 웹툰을 넘어 인공지능, 로봇, 포스트휴먼 존재들과의 교류 서사로 논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도 현대적 서사 이론과 함께 고민할 중요한 문제적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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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만화 연구와 비평⟫ 2025 상반기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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