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백서
직장생활백서 35편 ‘거절 당할 용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그 후 직무 전환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독자의 상황을 지레짐작하여 메일로만 회신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듯하여 연락처를 주고 받은 후 20여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통화를 끊은 후 그 분에게 조언해드린 내용과 전하지 못한 내용을 조금 보강하여 독자의 동의를 구한 후 편지 형식으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To. 저자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메일을 보내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문의 드립니다. 저는 직장인으로 매일 출퇴근길에 네이버 비지니스 탭을 정독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님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 네이버 메인 글로 올라와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절 당할 용기' 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너무 공감을 하고 배움을 얻어 검색을 하여 저자님의 책도 구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자님께 문의 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아이디어 기획을 좋아하지만 현재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고 있는 8년차 개발자 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이디어 구상하는 것을 좋아하여 사내 공모전에도 참가해서 상위 성적도 거두고 사외 공모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디어 구상과 기획을 할 때 정말 행복합니다.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무언가 하나 생각이 날 때마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내 기획부서로 전배도 생각해봤지만 동료들은 기획부서로 이동하면 업무에 치여 지금처럼 기획하는 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무엇을 기획하던 윗사람의 생각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냥 지금처럼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기획을 하라고 조언합니다(최근엔 마음 맞는 동료와 아이디어를 구상하여 소프트웨어 개발을 해서 스타트업을 할까 고민 중이기도 합니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저는 아이디어 기획을 남보다 잘 할 자신 있고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지금처럼 개발을 하면서 공모전을 참가하여 커리어를 쌓을 것인지.. 아니면 부서를 이동해야 하는지..저를 알지 못하시지만 후배라고 생각해주시고 제 방향성에 대해 조언 하나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o. 독자님.
우선 제 글을 읽고 공감해주시고 책까지 구매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독자님께서 거절 당할 용기를 무릅쓰고 장문의 편지를 쓰셨기에 저 또한 제 조언에 있어서 거절 당할 용기를 가지고 진심을 다해 씁니다.
이직과 전직은 직장생활이 끝날 때까지 직장인에게 던져지는 어려운 숙제 같습니다. 필자도 17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이 일이 나한테 맞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출근길에도 불청객처럼 찾아옵니다. 급여라는 이름으로 다달이 통장에 꽂히는 것을 보면서 현실적으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이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직은 나이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많은 독자님의 고민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결론적으로 독자님에게 직무 변경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말씀 드리는 ‘일에 관한 환상과 변명’을 직무 전환을 위한 체크포인트라 생각하시고 체크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린 어릴 적부터 꿈을 말했습니다. 아니 ‘말한다’라는 능동보다 꿈을 말하길 강요당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죠. 과학자, 건축가, 경찰, 선생님 등 장래희망을 말하고 번복하는 과정에서 우린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와 직업을 선택했죠. 전공 선택이 그러했던 것처럼 직무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며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떠밀리듯 일을 선택해야 했기에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한테 맞는가?’라는 질문을 중년이 되어서도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일은 발전도 더디고 딱히 주목 받지도 못하는데 옆에서나 저 멀리서 왠지 있어 보이고 주목 받는 일이 보입니다. 저 일을 하면 조직에서도 인정을 것 같고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소위 ‘있어 보이는 일’입니다. 전략, 컨설팅, 기획, 프로젝트 매니저 같은 직무뿐 만 아니라 소위 ‘사’자가 들어가는 전문직도 그런 일들 중에 하나죠.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왠지 있어 보이는 그 일’도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피상적인 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이디어 기획은 ‘있어 보이는 일’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수 많은 매체에서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아이디어의 성공 사례에 화려한 조명을 쏟아 붇습니다. 얼마나 있어 보이는 일입니까? 갑자기 떠오른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유명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비즈니스 현장에서 ‘아이디어’ 만이 비즈니스의 성공을 결정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누구도 그렇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는 수 없이 많은 요소 중에 하나일 뿐이며, 어떤 시장 환경을 만나고 있느냐와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수백만 가지로 달라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복잡한 비즈니스를 단순히 ‘탁월한 아이디어’ 하나로 귀결시켜버리고 그런 ‘창의적’인 인재를 찾느라 기업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아이디어’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과대한 기대는 역설적이게도 아이디어만 내면 할 일을 다 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거나 ‘저건 내 아이디어 덕인데..’라는 아이디어 만능적 사고에 빠지게 만듭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실행이 훨씬 중요하고 초기의 설익은 아이디어는 실행을 통해 수 십 가지의 세분화된 아이디어로 변형 및 발전됩니다. 그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 시장의 환경과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정말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재탄생하게 되죠.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야 하고 팔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도 벌어야 하죠.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치열하겠습니까? 초기 아이디어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아이디어 기획만큼 폼 나고 있어 보이는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기획이라는 것은 그렇지 못합니다.
앞서 거절 당할 용기에 쓴 글처럼 아이디어 기획은 1번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99번 거절 당하는 것입니다. 동료로부터, 상사로부터, 후배로부터 지적과 냉소, 무관심을 참아내는 것이죠. 연말이 되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냉정한 성과 평가도 받아야 합니다. 생판 모르는 고객은 어떨까요? 심한 경우 당신을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귀담아 들어주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아이디어 기획은 그런 일이 본질입니다. 이 일이 과연 있어 보이는 일일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기획자가 있다면 아직 기획의 본질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에 대한 환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하는 일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반복되고 시시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누군가에 의해 늘 지시 받고 질책 받아야 하는 일이 직장인의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 내내 ‘에이. 회사 당장 때려 쳐야지~ ’ 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이 ‘있어 보이는 일’은 현실 도피를 유혹합니다.
이런 도피는 근본적으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조직 내에서 중요하게 평가 받지 못하고 스스로 하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일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결국 직무 실력이나 역량을 높이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 최면과 같이 ‘내가 저 일을 했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자기 변명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의 일이 비즈니스에 있어서 의미가 없는 일이라면 여러분의 회사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기업은 인력 운영에 있어서 최적화를 지향하죠. 최적화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정리해고는 없을 것입니다. 기업은 결코 쓸모 없는 인력에게 월급을 공짜로 주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고 있는 쓸모 없는 일에 월급을 주고 있다면 회사가 심각하게 방만하게 운영되는 것이고, 아마도 여러분은 그 경력으로는 결코 이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일 하나 하나는 비즈니스에 있어서, 기업 조직에 있어서 결코 없어서는 안될 일이죠. 품질 담당자가 품질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조직 내 각자의 역할이 다를 뿐 그 역할의 무게는 모두 동등합니다.
위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독자님은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하고 싶다’라고 답한다면 다음을 제안해드립니다.
개발자인데 어떻게 하냐고요? 개발자이지만 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개발자라고 해도 아이디어 기획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개발자가 기획자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개발자는 실제 상품을 현실화 시키는 역할을 하니까요. 그리고 개발 자체에서도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기획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개발자는 ‘저건 내 일이 아닌데..’라며 선을 긋습니다. 대다수가 역할과 전문성이라는 이름 하에 관여하고 싶지 않는 영역에 대한 선을 명확하게 그어버립니다. 그렇게 선을 긋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파는 것’이죠. 대부분의 직장인은 ‘파는 일’은 영업이 하는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비즈니스를 제대로 이해하시고 아이디어를 제대로 기획하려면 직접 팔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 기발하고 창의적이며, 전무후무한 독창성이 갖춰진 아이디어가 머리 속에만 있다 하더라도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잡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잡념이 누구나 인정하는 아이디어가 되는 과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으스대며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인정하라고 떠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고객이 될 누군가에게 먼저 ‘팔아보는 것’입니다.
팔아보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고객이 누군지 특정하기도 힘들고, 그 고객과 약속을 잡기도 힘들죠. 그 고객이 자리를 뜨지 않게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그 고객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직접 해보시면 비즈니스가 무엇인지 본질을 이해하게 됩니다. 고객은 왜 돈을 내는 것이며, 어떤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지, 경쟁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수많은 고뇌 끝에 오감으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도 수없이 생겨나는 스타트업의 CEO들은 아이디어 기획자여서가 아니라 팔아보는 체험 속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는 결코 책이나 강의에서 나오는 이론 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죠.
팔아보는 경험을 하기 위해 영업을 도와주는 개발자가 되어보세요. 우리가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그 일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술이나 일 만능주의 빠지고 반복되는 일에 무뎌지다 보면 비즈니스의 궁극적인 역할인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비즈니스의 본질, 기획의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동료 영업담당자와 함께 고객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그 영업 담당자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렇게 팔아보면 고객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고객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기획의 시작입니다.
영업 현장에 함께 동행하기 어렵다면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개발자가 되어보세요. 오늘부터 아이디어를 메모해보세요. 제가 1,000가지 아이디어 노트를 만들어 627개의 아이디어를 써 나간 것처럼 아이디어 발상만이라도 꾸준히 해보시길 바랍니다. 자신 스스로에게 아이디어 기획에 대한 열정이 있음을 ‘매일’, 그리고 ‘1,000가지 목표’라는 꾸준함으로 증명해 보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실 수 도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제 시간이 부족한지 봐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평범한 직장인이며 팀장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스스로 신사업을 개발 중입니다. 매일 두 곳 이상 제안을 하는 영업도 하죠. 회사에서는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퇴근해서는 LG CNS 블로거 글 기고, LG그룹 블로그 글 기고, 약 20명의 대학생 멘토링과 스타트업 컨설팅도 하고 있습니다. 1,000가지 노트에 아이디어를 기록하고 두 번째 책을 쓰기 위한 원고를 메모해둡니다. LG인화원 진급 강사여서 강의자료도 만듭니다. 동시에 두 아이의 아빠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바쁘게 일상을 보내지만 결코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진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주어진 시간에 몰입하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더딜 것입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겠죠. 그런데 꾸준히 해보세요. 꾸준함으로 그 일에 대한 열정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다 보면 시간의 문제도 아니고 직무 전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도하다 보면 능력을 인정받게 되거나 또는 이제 더 이상 기존의 개발 역량으로 성장할 수 없는 때가 오게 됩니다. 그 때 하셔도 됩니다. 꾸준함으로 열정을 증명해 온다면 그때 해도 역량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이디어 기획이라는 그럴 싸하고 있어 보이는 일을 흉내 내느라 비즈니스의 겉 바퀴만 도는 것보다 현재 하는 일에서 비즈니스의 본질을 깨우치고 여러 경험과 역량을 차곡차곡 쌓아가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력에 있어서 너무 먼 점을 연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먼 점을 연결하게 되면 실패의 가능성이 훨씬 커집니다. 충분한 시간과 돈을 가지고 있다면 실패도 좋은 자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까운 점을 꾸준히 이어가시길 권해드립니다(참고 글 http://blog.lgcns.com/1105).
서로 주고 받은 이 메일이 하나의 점이 되어 독자님의 성장에 디딤돌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