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중년 여인을 위한.
패셔니스타는 아니지만 스타일에 대한 동경은 있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평범한 몸매에 평범한 미적 감각의 소유자로서 남들 눈에 근사해보이기란 만만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중년으로 접어들고 나니, 큐티 섹시 발랄 이런거 말고 귀티나고 우아한 스타일링이 최고다.
그래도 마흔이 훌쩍 넘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온 덕에, 해야할 것 보다는 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건강을 위해서 몸에 좋은 것을 많이 먹기 보다는 몸에 나쁜 것을 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처럼 스타일 또한 수많은 패션 권장 사항을 따르는 것보다는 나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Don'ts 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할 것 같다.
40대 중반의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감각의 소유자가 귀티나게 스타일리시 해 보이려면 가급적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열해보겠다. 나는 패션 전문가도 아니고, 매우 주관적인 아이디어라는 것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물론 가슴을 활짝 핀 당당한 애티튜드와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미소를 겸비하고 실크나 캐시미어와 같은 고급 소재의 의류에 파인 주얼리를 매치한다와 같은, 국영수를 중심으로 암기과목을 빈틈없이 공략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 같은 뻘소리는 하지 않겠다.
나이들수록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원색을 세련되게 소화하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다.
중장년 아즈마이와 아즈바이들의 등산 패션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산에서는 눈에 띠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등산 패션의 비비드함은 납득이 가는 바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빨간색 가다마이를 걸쳤다가는 부채만 들면 88올림픽 개막식 때 입장하는 국가대표 선수 느낌이 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직접 경험해봤다.
조금이라도 세련되어 보이려면 쨍한 원색에서 더 흐려지거나 탁해져야한다.
즉, 핫핑크보다는 인디언 핑크가, 초록색 보다는 수박색 또는 올리브 그린이 우아하다.
물론 멋진 스트릿 패션 사진에서 비비드한 의류를 멋지게 소화한 처자들이 떠오를 수 있다. 대단히 문화 사대주의적인 발상이지만 그네들은 대게 서양인이거나 최소한 모델같은 몸매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래도 정 비비드한 색상이 끌린다하면 가방이라 스카프, 모자 등과 같은 소품에 한정시켜야 한다.
한때는 블랙 앤 화이트를 입으면 딱 떨어지는 카리스마를 뽐낼 거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허나 나이 불문하고 젊은 층에서도 블랙 앤 화이트는 생각보다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 합창단의 일원처럼 지나치게 엄숙해 보이거나 펑퍼짐한 몸매의 소유자가 입으면 이화학당에 다니는 구한말 신녀성이 떠오르기 십상이다.
대비라 함은 단지 흑백에만 그치지 않는다. 핫핑크나 개나리 노란색의 널뛰는 발랄함을 블랙으로 눌러주면 세상 그런 센스쟁이가 없어보일거라는 계산으로 빨간 코트에 블랙진을 입은 내 모습은 자꾸만 화투짝 비광의 주인공인 우산을 쓰고 있는 남자가 연상되었다. (실존했었던 일본의 서예가라고 한다.)
스트라이프 티셔츠로 대변되는 프렌치 시크의 감성이 왜 나를 비롯한 내 주변에서는 좀처럼 볼 수가 없는지 그 이유를 대강 알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뭐라도 논리적인 스타일 분석을 내놓고 싶지만... 모르겠다....그냥 안 어울린다. 빠삐용 같다. 아마도 강한 대비는 발랄함과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젊은 처자들이 더 잘 소화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의류 뿐만 아니라 악세사리 포함, 색깔이 세가지가 넘어가면 시선이 교란되면서 조잡스러워 보인다.
더 슬픈 것은 색상이 많을 수록 뭔가 멋을 부리고는 싶어서 노력은 한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색깔의 제한은 코디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로 내 옷장 안 의류의 전체 색상도 제한해야한다.
검은색과 흰색을 포함한 세가지 색의 의류만 소유해야 멋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패션 전문가도 있는데, 이건 내겐 극한의 미니멀리즘이고 블랙 화이트 포함 다섯가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너무 단조로운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컬러가 가진 스펙트럼을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내 의류의 색상을 블랙,화이트,핑크,베이지,블루 총 다섯가지로 제한한다고 해보자.
핑크의 범위는 인디언 핑크,페일 핑크,코랄,말린 장미색 등등 무척 다양하다. 베이지와 블루도 이런식으로 다양해진다. 이렇게 따지면 그 일본 디자이너의 주장대로 세 가지 색 안에서 돌려입는 것도 꽤나 현실적으로 들린다.
한때는 의류 쇼핑을 할 때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거나 갖고 있지 않은 컬러를 선택하려고 애썼더랬다. 불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예컨데 니트 가디건을 구입한다치면, 베이지색상은 있으니깐 이번엔 초록색을 사보자...뭐 이런식이었다.
그 결과 내 무지개 동산 옷장은 각자 개인기를 뽐내기 바쁜 오합지졸들만 모인 축구팀 같은 형국이 되었다. 그중 한두명의 플레이어를 뽑아 시너지를 내게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세련된 착장을 위한 선택의 난이도와 피로도가 무척 높은 옷장이 되어버렸다는 뜻. 결국 스타일리시한 착장이 나올 확률은 컬러의 가짓수과 반비례 해서 낮아진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그리다보면 붓질을 딱 그만해야할 때가 있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어 물감을 덧칠하면 색상은 점점 똥색이 되고 심지어는 물을 잔뜩 먹은 스케치북에서 때가 밀린다.
우리의 얼굴을 도화지라고 하면 채색을 '그만둬야 할 타이밍'이 나이 먹을수록 점점 일러지는 것 같다.
진한 화장이라함은 단순히 요란한 색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조 가죽을 한꺼풀 덮은 듯한 파운데이션, 깜빡이 인형 같이 인위적으로 바짝 서있는 과장된 속눈썹, 자로 한번 재보고 싶은 두께의 무거운 아이라인, 연극 무대에 서도 될 법한 강한 쉐이딩 등은 이미 노화가 진행된 피부와 이목구비가 소화하기에는 그 무게감이 상당하다. 나름 퇴폐적인 시크함을 추구하며 공들여 스모키 메이크업을 했는데 트로트가수 느낌이 난다면 얼마나 서글픈가...
다들 아시겠지만 옷의 가짓수와 스타일리쉬함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옷이 많으면 그 안에 꼭 나의 매력을 갉아먹는 이중첩자 같은 놈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모르고 있다면 스타일리시함과는 영영 이별이다.
연예인이나 셀럽을 제외하고 그동안 봐온 지인들의 룩(LOOK)중에서 한 손에 꼽는 베스트 룩이 있다.
20대 사회초년생 시절, 어느날 타임 (또는 마인) 스타일 곤색 수트를 입고 온 그녀를 보고 나는 귓방맹이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을 느꼈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비율과 살집의 소유자였으며 얼굴은 미안한 말이지만 평균 이하였다. 당시 나는 멋쟁이들의 시크릿 장소라는 동대문 제일평화시장에서 구입한 90년대 후반부터 2000대 초반 여심을 사로잡았던 브랜드인 '에트로'st 페이즐리 패턴의 앙상블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 옆에 있으니 그 공들여 고른 폴리에스테르 가디건이 마치 엄마옷을 빌려입은 듯 부끄러웠다.
내가 그녀의 스타일 앞에 기가 죽은 것은 단지 내가 명품 카피를 입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20대 초반이 짭을 입으면 어떻고 나이롱을 입으면 좀 어떤가. 내 부끄러움의 원천은 나를 가장 빛내주는 스타일이 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옷은 죄다 입어보는 다양한 시도에 있었다.
그녀를 열 번 만났다 치면 내가 열 벌의 제각기 다른 의상을 선 보일 때 그녀가 그 멋진 수트를 입은 모습을 서너번은 본 것 같다. 연한 베이지 색상의 실크탑과 구김 하나 없던 촤르르한 '정장'을 단벌신사 처럼 즐겨입던 그녀는 그러나 전혀 궁상스럽지도, 지루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연이틀을 같은 옷을 입으면 큰일나는 저주에 걸려있던 나를 비롯한 다른 처자들보다 더 인상깊은 차림새로 기억에 남아있다.
40대 이후로는 좀 뻔하다 싶을 정도로 나만의 스타일을 정립해야한다. 아무개 하면 떠오르는 시그너쳐 룩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허구헌날 거기서 거기인 옷들을 매일 같이 갈아 입고, 이런 저런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보는 것은 20대 때나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중년 여인이 오늘은 커리어우먼, 내일은 섹시 컨셉, 낼 모레는 청순 가련형 등, 스타일의 변주가 크면 클수록 반전 매력은 고사하고 자칫 관종처럼 보일 수 있다.
발망 재킷은 특유의 디자인으로 존재감을 발휘해야한다.
하늘로 솟은 어깨뽕과 더블 단추 등의 시그너쳐로 이것이 발망이다 하고 말해야지 옷에 쓰여진 'Balmain Paris'라는 글씨로 '이 옷은 발망이고요, 불란서쩨입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는 순간, 뭔가 메이커에 한맺힌 사람처럼 보인다.
가방 등의 악세서리 포함 로고가 두 개 이상 존재감이 드러나면 안된다.
우리가 속물이라 할 지라도 속물인 티가 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몽클레어나 캐나다 구스 같은 프리미엄 패딩처럼 팔뚝에 로고가 박힌 것이 특징인 의류는 예외이다.
보통 검은 의상은 가장 시도하기 쉽고 무난한 색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날씬해 보이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을 뽑았으면 썪은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말처럼, 나는 블랙을 입었으면 조금이라도 시크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세련미가 배제된 블랙 의상은 우중충함만 남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면 여직원들이 다들 맞추기라도 한 듯 검은색으로 쫙 빼입고 오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얼핏 보면 상조회사 직원들이 따로 없다.
나름 블랙 의상으로 신경쓰고 왔는데 평소보다 덜 멋있어 보이는 아이러니는 꽤 흔하게 볼 수 있다.
다짜고짜 검은색으로 통일하면 중간 이상은 갈 것이라는 안일함은 검은색의 장점보다는 다소 어둡고 초라해 보인다는 단점만을 부각시킬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두드러진다.
올블랙으로 입는 것이 스타일리시하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중년의 여인은 검은색도 좀 더 신경써서 입어야지 안그러면 자칫 우환있어 보일 위험도 있다는 뜻이다.
나잇살이 드러나게 꽉 끼는 옷은 물론이거니와 내 몸에 너무 딱 맞는 옷도 귀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직장 선배 중에 옷걸이가 꽤 괜챦은 여인이 있었다. 적당한 키에 동양인 치고 팔다리도 길쭉하고 살짝 마른 듯해 의상 소화력이 당연히 좋을 수밖에. 항상 단정하고 깔끔한 오피스룩을 추구하던 그녀의 스타일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살짝 빈해보였다. 결코 촌스럽거나 옷을 못 입는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지만 그녀가 가진 하드웨어에 비해서는 아쉬운 결과다.
그러던 어느날, 자로 잰 듯 딱 맞는 원버튼 기본 블레이저를 입은 그녀를 보고 우연찮게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너무 딱 맞는 핏감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원버튼 기본 블레이저는 단추를 잠그면 숨쉬기도 힘들어보일 정도로 타이트했고, 어깨선은 새끼 손가락 하나 들어갈 여유도 없이 딱 맞으니 멀쩡한 그녀를 이른바 '어좁얼큰'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가 항상 고수하는 무릎까지 오는 H라인 스커트 대신에 무릎을 가리는 펜슬 스커트를 입으면 그 길고 쭉 뻗은 종아리가 더 우아하게 돋보일 것 같았다.
타이트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날씬해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선배 처럼 날씬한 사람은 널널한 옷을 입으면 더 여리여리해 보인다. 그렇다고 나이들면 낙낙?한 옷만 입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것은 날씬해보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너무 딱 맞는 옷은 제복이나 유니폼을 연상시키고 젊은이들에게는 매력적인 제복을 중년의 여인이 입으면 어딘지 모르게 팍팍한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이는 정장 뿐만이 아니라 캐쥬얼한 복장에도 통용되는데 아무리 자랑하고 싶은 토르소의 소유자일지라도 상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쫄티 보다는 단추를 두어개 풀고 입은 셔츠가 더 섹시하게 고급져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정신적,물질적으로 안정과 여유가 생기는 것이 바람직하듯이 그러한 철학이 패션에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밖에도 미키마우스 같은 캐릭터가 그려진 옷, 너무 씨게 말은 파마, 밝은 색깔의 헤어 칼라, 옷의 구김과 보풀, 칠이 벗겨진 낡은 구두, 장소 상황 불문하고 보부상처럼 큰 가방만 매고 다니는 것, 통굽 신발, 형광색 매니큐어, 공주풍의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옷, 바지 엉덩이 부분에 드러나는 빤스라인, 너무 얇은 소재의 옷 등등의 자질구레하고도 기본적인 금기사항은 언급하지 않겠다.
이 무슨 패션 우울증 환자의 독백이냐,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지루하게 입고 다녀야 한다는 거냐 하며 반감을 갖으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 이는 필자의 취향이 듬뿍 담긴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이며, 이 모든 것을 헛소리로 만들 수 있는 몸매와 미적 감각의 소유자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이 당신일 수도 있다.
다만 스타일면에서 중간 이상은 가고 싶은 40대 필부(匹婦)인 필자가 기억력이 나쁜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나와 비슷한 감성과 취향을 갖고 계시는 다른 독자분들에게 불필요한 쇼핑을 방지하고 구린 스타일링으로 인해 하루의 기분을 잡치는 일이 없게끄름 드리는 당부라고 생각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