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재배의 지리적 확산 a
1.
캅카스 지방에서 자라던 포도는 기원전 3,000년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전파되었다. 그리스보다 앞선 이집트의 포도 재배는 나일강 삼각주와 멤피스 교외에서 점차 남쪽으로 퍼져나가, 서부 사막의 오아시스까지 확산했다. 이집트인들은 커다란 돛의 천으로 만든 자루에 포도송이를 집어넣고 밟아 으깬 뒤 막대기로 자루를 비틀어 즙을 짠 다음, 지하창고에서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다. 이집트 벽화에는 고대 이집트에서의 포도 수확, 포도주의 양조ㆍ저장ㆍ운송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집트에서의 포도 재배를 엿볼 수 있게 한다(아래 그림).
고대 그리스에서 포도나무는 트로이 성 함락 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1184년 에게해 지방에 들어왔다. 그리스인들은 식민지와 해외 무역 기지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아 섬에 포도나무를 보급했고, 기원전 600년에는 이베리아반도에도 포도나무를 옮겨 심었다. 포도 재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때(기원전 4세기)에는 저 멀리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2.
프랑스에서는 기원전 500년 페니키아인들이 오늘날 마르세유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골(Gaul)인의 땅에 최초로 포도나무를 들여왔다. 이후 로마 세력이 팽창하면서 프로방스 지방은 포도나무로 뒤덮였다. 이때 생산자들은 자기네 노동의 결실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는데, 골인이 생산한 포도주로 정복자 로마인들의 식탁을 차려 주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골 땅에서 포도 재배가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했다. 골인의 타고난 재능과 노력은 오늘날의 프랑스 포도주를 탄생시켰다.
프랑스에서 포도 재배 확산의 출발 장소는 지중해 연안이었다. 골인이 닦아 놓은 포도 지역, 즉 로마제국 시기 갈리아 지방의 나르보넨시스 - 오늘날 주로 프로방스와 랑그도크에 해당하는 프랑스 남부 - 에서 프랑스의 다른 지방으로 포도 재배가 확산한다. 남부 지방의 중심도시는 나르본과 마르세유였다. 나르보넨시스의 영향을 받은 보르도 지방에서는 1세기부터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 3세기 초 부르고뉴까지 전파된 포도 재배는 몇십 년 뒤 북쪽의 알자스까지 뻗어나갔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주 생산지 중 몇 군데는 로마인들을 통해 포도 재배가 전수되었다는 뜻이다.
1098년 부르고뉴에 설립된 시토 수도회가 12~13세기 늘어난 수도원들을 통해 부르고뉴는 물론 프랑스의 다른 지방과 독일에서 포도밭 개간과 보호 정책에 힘쓴 결과 포도밭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포도나무 품종을 개량하고, 좀 더 완벽한 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꾸준히 연구했으며, 포도 재배에 알맞은 기후조건, 즉 기후 개념을 적용해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밭에 울타리를 둘러침으로써 부르고뉴 포도밭의 고유성을 확립했다. 울타리를 뜻하는 클로에 포도밭을 탄생시키고, 수도원에 지하저장소를 지음으로써 포도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포도 재배 기원지에서 주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포도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기원후 500년경에 이르러서는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지중해와 남부 유럽, 그리고 서부 유럽에까지, 포도 재배가 가능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기원지에서 유럽으로 포도 재배가 퍼져나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다.
포도를 재배하지 않았던 지역의 사람들이 포도 재배 지방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포도나무 묘목을 가지고 옴과 동시에,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에 관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와 전파하는 경우이다. 가끔은 포도 재배 기술자와 포도주 생산업자들을 데려오거나 심지어 납치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포도 재배지는 포도주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다.
포도 재배는 또 식민지를 따라 전파되었다. 그리스는 식민지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포도주 양조법을 전했다. 그리스로부터 양조법을 배운 로마제국은 제국의 속주에 포도와 포도주를 확산시켰다. 현재 유럽의 주요 포도 재배지와 포도주 생산지는 과거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유럽에서도 프랑스, 독일, 헝가리는 로마 시대부터 포도주 산업을 시작한 나라들이다.
포도주는 종교나 문화 행사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포도주가 필요한 유럽 전역에서 포도 재배를 널리 퍼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고대 문명국가에서는 거의 모두가 포도주를 신을 연상시키는 음료로 생각했고, 제례 의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에서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했던 포도주를 바쳐야만 했다.
포도주가 다른 지방으로 전해진 근원적인 힘은 포도가 수익성이 높은 작물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포도주가 사치품으로 규정된 지방에서는 거래량에 한계가 있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했지만, 전반적으로 포도주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포도주는 수 세기 동안 유럽,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대규모로 수출되고 수입되는 상품이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몇몇 지방에서 포도주 생산은 장기적인 경제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인 산업이었다.
마지막으로 포도주 문화를 대변하는 포도주 시장이 생겨남으로써 포도 재배지가 더 넓어졌다. 포도주가 종교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이용되는 분야가 점차 넓어지자, 포도주 수요가 급증했고, 포도주 거래시장이 형성되었다. 고대에는 포도주가 전파되는 속도가 느렸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처럼, 특권층만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2~3천 년 뒤 로마제국에서는 모든 계층이 포도주를 즐겼고, 이처럼 늘어난 수요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더 넓은 포도 재배지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포도주 생산량과 시장을 이용한 거래량은 꾸준히 증가했다.
4.
초기에 그리스 포도는 다른 농작물, 특히 올리브와 함께 재배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포도만 경작하는 밭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아르고스 등 인구가 많고, 포도주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도시 근처에 포도밭이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들어 포도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양조장은 그리스의 중심지로 진출했지만, 포도밭은 육로보다는 바다나 강을 통해 운송하는 쪽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들었기 때문에 주로 해안에 분포했다.
그리스를 통해 포도주 산업을 알게 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점령지에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생산기술을 전수하였다. 1세기 무렵에는 기후조건에 적합하고, 경제적ㆍ문화적 환경이 허락하는 로마제국 내의 모든 지방에서 포도주가 생산되었다. 이때 유럽의 포도밭과 포도주 생산지는 로마를 중심으로 남쪽의 크레타섬, 북쪽의 잉글랜드, 서쪽의 포르투갈, 동쪽의 폴란드까지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제례 의식에서 특별대우를 받던 포도주는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식인정함으로써 그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에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포도주에 대한 수요는 엄청났다. 동시에 포도주 자체의 상업성도 뛰어났기 때문에 포도 재배는 널리 확산하였다.
로마제국의 힘이 미친다는 것은 로마 문화의 확산을 의미한다. 로마제국의 힘은 포도 재배의 지리적 확대에도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다. 포도주는 로마인에게 다른 소비재 그 이상이었고, 로마 문화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측면과 함께 이런 문화적인 이유가 결합하여 포도 재배는 로마군단의 발자취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로마인들은 멀리 떨어진 브리튼 섬의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브리타니아는 포도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기후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포도주 산업은 암포라(포도주 용기)까지 제작하며 활발하게 전개되는가 싶더니 금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중세에 유럽 전역에서는 대부분 그리스도교 전래와 함께 포도 재배가 전파되었다. 여러 지역에 분산해 설립된 교회들은 의식에 사용할 포도주를 얻기 위해 주변에서 포도 재배가 가능한 곳, 어디서든지 포도밭을 만들었다. 당시 포도주는 상하기 쉬워 장거리 운송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포도 재배지와 거리가 멀었던 지방에서 포도밭의 등장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비니차 교단의 증언에 의하면, 폴란드에서는 중세 초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포도 재배가 시작되었고, 독일 서부 지방에서는 포도밭 수가 6세기부터 꾸준히 증가하더니 300년 뒤에는 팔츠에서 83곳, 바덴에서 23곳, 뷔르템베르크에서 18곳의 마을이 포도주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인강 유역, 프라이징과 같은 지방은 그리스도교 선교사에 의해 포도 재배가 시작된 곳이다. 이뿐만 아니라 드물긴 하지만 중세에는 그리스도교 전래 외 다른 이유로 포도 재배가 시작되거나 확대된 지방도 있었다. 헝가리 북부를 침략한 마자르족은 9세기 말에 캅카스와의 접촉을 통해 포도 재배 및 포도주 생산기술을 전수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1000년경부터는 유럽 곳곳에서 포도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포도밭이 확대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포도주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유럽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고, 또 수도원에서 농지개량법을 연구ㆍ보급함으로써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한 때였다. 이로 인해 1000년에서 1300년까지 300년 동안 유럽 대륙의 인구는 4천만에서 8천만 명으로 폭증했다. 인구증가는 도시 성장과 무역 증대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다시 부유한 중산층과 상인 계급을 출현시켰다. 따라서 부유층을 상징하는 사치품, 즉 포도주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서 포도밭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포도 재배가 적합하지 않았던 지방의 교회,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수요도 폭발적이었다. 포도주는 잉글랜드, 발트해 연안에까지 수출되었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 하면 세계적으로 알려진 포도주 생산지다. 포도밭이 많아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교회, 수도원이나 지방의 포도주 수요보다는 바다 건너 잉글랜드 시장에 보르도 포도주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보르도 지방의 아키텐 공작과 나중에 잉글랜드의 왕이 된 헨리 플랜태저넷이 결혼한 1152년 이후에 헨리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보르도는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고, 잉글랜드에 포도주를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점차 포도밭은 보르도에서 인근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13세기 초반 보르도는 유럽의 주요 포도주 생산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15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와 영국 간 전쟁이 일어나는 등 유럽의 정세 불안 시기에는 보르도를 포함한 유럽의 포도주 산업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포도 재배가 처음 시작된 곳은 포도 재배의 북한계선에 해당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독일 남부의 보덴 호수 주변 지역이다. 중세에 시토 수도회가 기후 특성을 고려한 포도 재배 적지로 낙점한 독일 지역이다. 현재는 모젤강과 라인강 유역이 독일에서 포도 재배에 가장 적합한 기후와 토양을 지닌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페인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양조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페니키아의 영향이었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식민지를 개척할 정도로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이후 약 4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린 고대 제국이다.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12세기에 이베리아반도 남부 연안에 그들의 포도주 문화를 전파했다. 그곳의 타르테소스(Tartessos)인이 페니키아 상인으로부터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생산기술을 전수하고 이곳에 적합한 품종을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에서 발견된 당시 페니키아인의 무덤에서 나온 포도 씨앗과 포도주 항아리가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반도는 토양이나 기후조건이 포도 재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지리학자 에스트라본(Estrabon)은 페니키아인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스페인산 헤레스 포도주를 창시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증명하듯 헤레스에서 4km 떨어진 카스티요 데 도나 블랑카에서 페니키아인이 운영하던 기원전 4세기경의 광산에서 포도 착즙 시설(스페인어 lagar)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페니키아인이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했음이 증명된 셈이다. 이베리아반도는 여러 민족이 지중해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각축전의 전초 기지가 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여러 민족이 시기를 달리하여 지배하는 장소가 되었고, 페니키아인에 이어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한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은 이곳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김상빈(역), 2018, 와인의 지리학, 푸른길
이은선(역), 2002, 포도주의 역사, 시공사
최영수 외, 2005, 포도주에 담긴 역사와 문화, 북코리아
한경비지니스(2012.2)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