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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May 09. 2018

"자살도 불사한다는 생각만이 솟구쳐 오르드군요"

군함도 최장섭 할아버지 자서전 풀이 (1)

의지가 강한 분들은 일본어를 독학한다고 하던데요. 저는 일본어책을 사두곤 9개월 동안 책 표지만 봤습니다. 그리고 지난달부터 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하면 한자 실력도 자연스레 늘 줄 알았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한문 까막눈입니다.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자서전에 적힌 한문을 읽지 못해서 취재원에게 연락했습니다. 죄송한 마음으로 선생님 댁에 찾아갔습니다. 20평 남짓한 이분의 집은 작은 도서관입니다. 한일과거사 연구자들에게 이곳은 보물섬일 겁니다. 여기를 봐도 금, 저기를 봐도 금입니다. 이곳을 찾으면 괜스레 숙연해집니다.  


기자들은 취재원의 말을 듣는 그 즉시 노트북으로 옮겨 적을 때가 많은데요. 취재원의 말을 녹음해서 글로 풀어내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 과정을 압축하는 겁니다. 저도 자주 그러는데요.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에 취재원 목소리가 가려질까봐 녹음만 했습니다. 하지만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카카오톡으로 재차 여쭤봤습니다. 내용은 이렇더군요.(주소지, 실명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1쪽) 

본인은 1929년 11월 10일 본적지인 전북 익산군 낭산면 00리 000번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 최00씨와 모친인 김00 사이에서 3남5녀 중 3남으로 태생하였습니다. 가나한(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여 났습니다. 8살 먹든 해에 전북 익산군 낭산면에서 낭산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계속해서 제2학년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우등생으로서 표창장을 받었습니다(받았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문사숙에서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수학했습니다. 1941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2쪽) 

그후 계속해서 한문사숙에 학업하였다. 대동아태평양전쟁 당시 나에게 부다치는(부닥치는) 고난의 불행은 어느 누구에도 있을 수 없이 꼬리를 물고 닥쳐오고 말었다. 장형(장남) 최00이가 일본 정부의 반역자라는 것이다. 웨야면(왜냐하면) 일본 근로모집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서 부친을(부친이) 대리로 함경북도 경성 아오지탄광으로 보내더니(갔더니) (아버지가) 몇 개월 되지 않해서(않아서) 좌측 손가락 4개가 절단됐다는 소식을 듯고(듣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병상에서 치료를 받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해방후에 이북에서 귀가하셧습니다. 가족들은 얼룩진 가정을 파괴시킴에 울부지졋다. 업친데다 덥친 격으로 일제강제노무자 모집자인 윤**은 죄 없는 어린 소년을 일본 노무자로 본인 최장섭을 형을 대리해서 일본노무자


(3쪽)

징용으로 보낸다는 것이였다. 모집자 윤**은 본인 최장섭을 옹고집으로 1943년 1월 28일자 본인 최장섭을 제휴하고(데리고) 익산 군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당일 10시 익산 군수는 임00이였습니다. 군수가 징용 당사자한테 웨(왜) 많은 사람 가온데(가운데) 이 나이 어린 소년을 보내고자 하자(보내려고 하느냐고 묻자) 모집자 이것은 형이 노무자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 대리 일본에 충성을 다하고자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자 익산 군수 역시 친일파의 소위로 갸우동(갸우뚱) 고개를 저의며(저으며) 말없이 방치했었다. 사실 본인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 고개를 떨구고 말엇다(말았다).  

그리하여 수십명을 데리고 경부선을 타기 위해서 완행 열차로 이리역에서 대전역으로 출발하였다. 기차가 고향역인 함열에 도착하니 어머니와 여동생이 마중을(배웅을) 나와 있더군요.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의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며 기차가 떠날랴고 하자 기차에다 절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할 떼(때) 소년 본인으로서는 뜨거운 눈물로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4쪽)

다시 기적 소리를 울리며 경부선을 대전역으로 출발할 적에 고향의 일행인 최00과 김00 서00도 눈물을 흘렸다. 기차는 어느듯(어느덧) 대전역에 도착하여 잠시 후 기다리였다가 경부선으로 가라타고(갈아타고) 아푼 다리를 절면서 부산역에 도착했다. 삼엄한 일경의 감시하에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부산항에 도착 즉시 우리의 일행을 인수하여 온 일본직원등인데 래중에(나중에) 알고보니 그 중 한 사람이 우리 일하는 소속인 누대의 원장 원전(하라다)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끝까지 사고 없이 데려 갈라고 가진(갖은) 아량 떨며 좋은 일터로 갈 것이니 안심하라는 것이였다. 잠시후 열낙선을 태우더니 약 30분 후에 잠수복을 내놓고 배에서 사고가 났을 때는 잠수복에 처한 사용 방법을 교육을 했다. 배가 곱푼데 겹쳐 배멀미에 시달리는 우리 일행을 이끌고 곤두래 만드래 하는 우리들을  밖으(밖으로) 내보내더니 잠수복을 입힌체 헤엄치는 방법을 교육시켰다. 일본 박다(하카다)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잠시 기다렸다가


(5쪽)

나가사키 항으로 기차에 올랐다. 일본 박다(하카타)를 떠나 후쿠오카를 지나 구마모토를 거쳐 가오섬을 떠나 나가사키역에 도착했다. 도망할레야 도망할 수 없는 기회가 상실되고 말렀다(말았다). 그 후 나가사키항에서 우리 일행의 몸을 싣고 거리 해상으로 약 28km나 되는 약 1시 걸려서 광업소인 단도 탄광에 도착해 보니 사면이 바다요 파도만 방파제인 주위의 옹벽에 부디쳐 우리들은 여지없이 창살없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이 함정에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구멍이 보이지 않더군요. 



하는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숙소로 가는데 위치를 가만이 살펴보니 사각형의 지상 구층 자리 APT 지하실에 숙소를 정해놓고 햇볓이 들지 않는데다 수기(물기)가 항상 차서 밤낫(낮)으로 전기를 사용하고 생활을 하여야 했다.

우리 보다 먼저 정착한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더니 참으로 앞으로 고생이 많켔습니다 하고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대들은 몇 개월 전에 정착한 소위 일본의 이름으로 누대 1소대원들이였다. 특히 우리들의 일행은 전라남북도의 사람이였습니다. 그 다음날 갱내에 착복할 의류는 검정색 한소대(한소매?) 반팔 상의와 하의 반바지 나누어준 뒤에 지하실 연병장으로 집합시켜 놓고 하라다 대장이 하는



(6쪽)

오늘은 여러분들의 일터인 장소를 견학할 것이니 지도자의 말을 잘 들어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말했다. 전기 공급하는 장소로 가더니 갱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 말했다. 전기 공급하는 장소로 가더니 갱내에서 사용하는 질머지는(짊어지는) 캽푸와 탄광에서 사용하는 햇트라이드(헤트라이트)의 창을 주며 갱내 해저 1000미터 이상이 되는 갱내로 가는 승강기를 이용하여. 소위 비행기보다 빠른 2분 정도 걸렸다.



갱내 입구에 도착해서 사방을 관찰해보니 사방에 울긋불긋한 전기불이 찬란하게 커여져(켜져) 있었다. 전기탄차가 왕래하는 찰나에 태평양전쟁당시 포로로 잡혀온 미군 등이 허기진 몸으로 탄차 끌고 수십명이나 되였다.

우리 일행 견학자들은 지도자의 인솔하에 지하 해저 터널에서 이웃의섬인 다카시마까지 전기탄차로 견학을 한 결과 일본 해저 지하자원 해중에 많니(많이) 있다는 것을 알엇다.

그리고 일어로 상하 사가노보리 시다노보리를 탄차로 속력내여 달리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달리는데 무서워 살 수가 없었다. 다카시마에서 견학을 마치고 도로 우리 일터인 --로 왔다. 우리 일행은 광부 등의 일자리인 탄처인 막장으로 왔다. 나는 내 생각에 이러한 막장에서 땀이 비오듯 솟구치고 있는 장소에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 문어지는 심정이였다.


(7쪽)

점심 떼(때)가 되여서 콩깻묵밥 한덩이를 먹고 난 뒤에는 고향부모생각이 간절이났다. 언제 고향에 간다는 기약도 없이 소모할 생각을 하니 정말 자살도 불사한다는 생각만이 솟구쳐 오르든군요. 끝으로 굼주림(굶주림)에 시달리고 사시상철(사시사철) 염(소금)으로 뒤범벅이가 되고 영양실조로 다리가 쥐가 나서 하루면 몇 명이 쓰러지는대 작업은 센데다 하루에 콩깨묵밥 3덩이로 연명을 하니 도저히 견딜랴고 하여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어느듯 2년 5개월이 지내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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