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8. 여행의 결을 바꿔

이동의 여정

by 남해바다

라일레이에서 보낸 며칠은 마치 시간을 잠시 멈춰둔 것 같았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무심히 숨 쉬었고, 우리는 그 고요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라일라이에서 셋째 날.

산책 중 들른 작은 여행사. 벽에 걸린 지도, 투명한 바인더 속에 빼곡히 적힌 일정표, 낯선 지명들. 이름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질 듯한 유명 관광지 대신, 어쩐지 여백이 많은 곳이 자꾸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붙잡은 이름, 카오락(Khao Lak).


태국어로 ‘기준이 되는 산’을 뜻하는 이 지명은, 실제로도 오래전부터 뱃사람들이 방향을 정할 때 의지하던 기준점이었다고 한다.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등대 같은 산.

우리는 그 이름에 이끌리듯, 다시 여행의 결을 바꿔보기로 했다.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라일레이를 떠나 아오낭으로 향하는 짧은 뱃길.

도착하자마자 대기 중이던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왜 가볍게 오라고 했는지 알겠죠?"


나는 웃으며 물었다.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많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겠죠."


여행은 결국 가벼울수록 더 멀리, 더 깊이 갈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녀도 체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정의하려고 ‘짐’을 만든다. 직업, 성과, 타이틀, 관계들. 그것들은 한때 우리의 자부심이자 방패였지만, 동시에 우리를 무겁게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반면, 마음을 비우고 가벼워진 사람만이 돌발적인 경로 변경을 즐길 수 있고, 낯선 길모퉁이에서 피어나는 뜻밖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지면에 더 가까워진다.
반대로, 짐이 전혀 없으면 인간은 공기보다 가벼워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게일까, 가벼움일까?”
-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짐을 덜어낼 때 비로소 삶은 계획이 아닌 흐름이 된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를 끊임없이 되묻게 된다.

첫 번째 미니버스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환승지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숨결과 몸짓이 한데 얽혀 복잡한 기류가 생겼다. 작고 붐비는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눈을 피하거나 짧은 인사를 건넸다. 미니버스와 낯선 대합실, 환승지에서의 작은 몸짓들. 타인과의 마찰이 어쩌면 여행의 진짜 본질을 드러낸다.

두 번째 미니버스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자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현지 여행사들이 손님을 개별적으로 모아 보내고, 버스 회사가 그것을 한데 취합하는 구조다 보니 이런 상황은 흔했다.


덩치 큰 외국인들 사이, 결국 가장 왜소한 그녀가 뒷문 옆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좁고 불편해 보였지만, 그녀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괜히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허리가 좀 아프긴 한데, 한 번 정도는 괜찮아요. 두 번은 No."


그녀의 농담 같은 투정 속에는 묘한 단단함과 유연함이 공존했다.


호텔과 예약 차량으로만 채워진 여행에서는 타인과 섞일 일이 없다. 그러나 이런 예상치 못한 불편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를 더 살피고, 나 아닌 누군가의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여행은 우리를 ‘나’에서 ‘우리’로 부드럽게 옮겨놓는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대형버스에 몸을 실었다. 배, 미니버스, 다시 미니버스, 그리고 버스. 예상보다 훨씬 긴, 그리고 거친 5시간의 여정. 그러나 그 고단함조차 결국은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의 맛’이었다. 불편할수록, 서로를 더 묻고, 듣고, 달래고, 그렇게 관계는 조금씩 깊어졌다.

카오락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동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는 느린 의식 같았다.


짐을 덜어내며, 타인과 부딪히며, 마음에 남은 경계들을 천천히 지워가며, 우리 역시 조금씩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벼움이, 낯선 땅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자유롭게, 더욱 깊게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