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시험에 대화는 사라진다
대화다운 대화로 살아가는 언어사회를 만들기 위한 캠페인 중 하나는 고부담 의사결정을 위한 속도시험에 대화 지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능력이나 구술능력을 평가하는 문항에 맥도날드화된 대화를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에서 평가활동은 중요하다. 사전에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잘 배웠는지, 뭘 모르는지, 교실 밖에서 얼마나 능숙한지 모두 평가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초‧중급 단계부터, 특히 어린 학습자일 때부터 언어평가 현장에서 대화의 형식성, 대화의 상호작용성이 심각한 수준으로 왜곡되어 있다. 시험에 등장하는 모든 대화는 맥도날드화 원리로 제작되고 통용되고 소비되고 있다. 큰 시험에 대비하는 대화교육의 병폐가 너무나 심각하기에 관행을 방치하고서는 무엇이든 바꿔볼 도리가 없다. 시험에서 대화 지문이나 문항을 삭제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이면서 타당한 해법으로 보인다.
수능, 토익, 오픽 같은 영어시험이나 토픽 같은 한국어시험은 입학, 졸업, 입사, 체류, 자격 취득, 승진 등과 같은 고부담 의사결정에 사용되고 있으며 수험자는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고득점, 혹은 목표 점수를 획득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필 시험의 ‘정답 찾기’ 전략처럼 말하기 시험에서도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시험 대비 기술이나 모범답안이 사교육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시험을 대비시키는 학원에서 사용하는 사전 대본은 소위 ‘족보’로 알려져 있다. 대리인을 통해 시험점수를 획득하는 극단적인 합리성이 일부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용인되기도 한다.
우리는 대화를 잘 배우고 싶다. 대화는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는 대화는 누구나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다. 유치원생, 초‧중급 수준의 언어학습자, 외국인 유학생도 감당할 수 있다. 위협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서로가 공유하는 공간적 자원이 활용될 수 있다면 누구나 상대방과 대화를 시작하고 의미를 협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맥도날드화된 대화에 포획되어 무력하고 무능한 화자임을 자처하는가? 우리는 왜 매끈하기만 할 뿐 인색하게 만들어진 대화문을 그토록 분해하고 분석하고 암기하고 있는가?
고부담 의사결정을 위한 속도시험에 맥도날드화된 대화가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다면 교재에서도 교실에서도 대화교육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시험에서 대화를 버리는 것이 대화교육을 살리는 것이다. 대화를 이용해서 어휘나 문법 지식, 혹은 구문을 이해하거나 생성하는 능력을 평가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장르의 글이나 말, 예를 들어 지침이나 지시문, 스토리, 발표문, 논설문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말 차례가 고작 4~8번인 대화문을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빨리 답을 찾게 하거나, 그와 비슷한 (효율적인) 대화를 해보라고 요구하면 다수는 불필요한 불안이나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등장하는 대화와 시험장 밖 실제적인 대화의 모양이 너무나 달라서 대화문을 활용한 시험의 (내용, 구인, 결과) 타당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대화하는 상황과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도 못한다면 대화능력은 부적절하게 추론될 것이고 해당 시험성적은 공정하게 사용되지도 못한다.
일상적인 대화를 시험에 굳이 사용하려면 대화의 기본적인 속성, 즉 비계획성이나 비예측성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야 한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누가 어떤 내용의 발화를 얼마만큼 하고, 한 편의 말 차례가 끝나면 다른 편에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지 등에 관해 사전에 계획되지 말아야 한다. 협상적이고 협력적인 대화에서는 말 차례부터 엄밀하게 통제되지 않는다. 말 차례가 교대되는 중에 말의 길이, 내용, 순서가 재구성될 수 있다. 화제 역시 자발적으로 생성되고 즉흥적으로 부연될 수도 있지만 전환도 가능해야 한다.
대화를 큰 시험에 사용하려면 구어 문법이 허락되어야 한다. 참조물 기반으로 대화를 유도하려면 참조물에 관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 수험자는 구어가 아닌 문어로 작성된 대화문을 만난다. 인색한 참조물 정보로 정답을 찾거나 1분 내외로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다급하게 말해야 한다. 그와 같은 시험의 절차는 대화다운 대화의 등장을 사전에 차단한다. 대화는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것인데 수험자는 고작 4~8번의 말 차례로 구성된 대화문에만 전념해야 한다. 결국 시험에 나올 만한 대화문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붙이며 분해하고 분석하고 암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앙상한 대화만으로 서둘러 정답을 찾거나 말하기를 마쳐야 한다면 지루하고 불편하고 잔인한 학습이다. 그런 시험만을 자꾸 준비한다면 시험장 밖에서 상호협력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호기심이나 잠재력마저 사라진다. 함께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가 결코 어려운 의사소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험을 대비하는 기술이 동원되어야만 할 것 같다. 대화능력을 효율적으로 측정한다는 명분으로 대화교육은 괜히 어렵고 불편해지고 있다. 큰 시험에서부터 대화를 없애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