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키스, 와인, 떼루아
우리는 지금 이른 새벽, 동해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 서 있습니다. 새해 첫 일출을 보려고요. 실눈 같던 해가 어깨를 펴자 검푸르게만 보이던 바다가 해를 품고 보석처럼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눈앞에서 꿀렁꿀렁 파도를 토해내는 저 바다는 실제로 저기 있는 걸까요? 함께 타고 왔던 차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으면 저 바다는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요?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입증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뭔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해합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하는 일이라 그런 질문에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어찌 보면 존재를 입증하는 것보다 그 존재에 의문을 품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외부에서 일정 수준을 초과하는 에너지가 가해지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 상태가 지속되고 관찰이 가능해야 그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 수준으로 들어가면 차원이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이 정말 존재하는가를 의심하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증명은 그 사물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반응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대상을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존재라도 작용에 대한 반응을 측정할 수만 있어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찰이 가능하지만 어떠한 물리학적 법칙도 적용받지 않는 경우에 그것을 허상 虚像 또는 환상이라고 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마술사 혹은 일루셔니스트 illusionist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실제 존재한다고 여기거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무얼까요?
"무슨 이유가 있어야 현실을 인식하나요? 현실은 그냥 현실,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 아닌가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사과 한 개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과가 진짜 사과일까요? 사과는 진짜 우리 앞에 있는 걸까요? 볼드모트가 매직완드를 휘두르거나 타노스가 리얼리티 스톤을 사용해서 우리를 현혹하려고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요? 아니면 최첨단 프로젝터가 동원된 지극히 사실적인 홀로그램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요? 이 사과가 진짜 존재하는지는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먹어보면 됩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만져보고 촉감으로 추가적인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 둘을 비교해서 일치한 경우에 그것을 현실이라고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조금 일반화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이란 주입되는 다양한 정보들을 비교해서 일치한다고 판단한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충분해야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인식합니다.
만일 교차검증에 필요한 다른 정보가 없는데도 실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볼 겁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정보를 분석해서 찾아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존재를 검증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전문가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 그게 우리 일상 생활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워워~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봐 주세요.
그러한 교차검증에는 대부분 전문적인 훈련과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가 필요합니다.
떼루아 terroir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와인이나 커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접하셨을 겁니다. 제가 그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 프렌치 키스 French Kiss에서 였습니다.
떼루아는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와인에는 재료가 되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 지역특성, 기후, 제조방법 같은 것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기본 개념입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와인맛을 잘 모르는 여자 주인공에게 와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풍미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돌멩이와 나뭇조각 냄새를 맡게 하고, 그다음에 와인을 맛보면 그 돌멩이와 나무 냄새가 난다는 걸 알려줍니다.
(참고로 떼루아를 검증하는 과학적 연구가 많이 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걸 맹신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해당 에피소드가 나오는 장면을 살펴보면 남자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칸이 여러 개 나뉘어 있는 상자였습니다. 그 상자 안에 돌, 흙, 나뭇조각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지요.
(지금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투박하고 원시적인 아로마 키트 Aroma Kit입니다. 요즘은 다양한 향들을 화학적으로 추출해 향수처럼 만든 다음, 전문가 훈련용이나 테스트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업체가 생산합니다. 와인뿐만 아니라 위스키, 최근에는 커피 업계에서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
뭔 뜬금없이 떼루아 이야기냐구요?
좋은 와인아니 커피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독특한 향이나 맛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게 무언지 구별해내기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와, 여기서 스타 후르츠 star fruit(카람볼라 Carambola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과일로 단면이 별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스타 후르츠라고 불립니다.) 맛이 난다라고 하면 속으로 “뭔 O소리야?‘ 라며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로마 키트를 사용하고 나면 매우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와인이나 커피를 그냥 마시면 느껴지는 맛이 단순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 아로마 키트에서 몇 가지 향을 골라 냄새를 맡게 하고, 다시 한번 와인이나 커피를 마셔보라고 합니다. 다시 맛을 보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맛, 심지어 아까 맡은 향이 여러 가지 복잡한 맛 가운데 톡 튀어나와 혀와 코를 자극합니다.
아로마 키트에서 스타 후르츠향을 골라 맡고 나니까 커피에서 그 맛이 느껴집니다. ‘아, 씨. 이건 뭔 마술이야? 아까는 이런 맛이 안 났었는데?‘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미각 세계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와인이나 커피를 마실 때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융합되어 들어옵니다. 그리고 내가 상상했거나 알고 있는 두뇌 정보와 비교합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그 속에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많은 성분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특히 미뢰 味蕾와 후각세포가 서로 찾아낸 정보를 교차 조합할 때 수천 가지 새로운 맛으로 느껴진다는 걸 발견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정보들을 구분해서 인지할 수 있다면 더욱 풍요로운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교차검증 기법이 악용되기도 합니다.
“응? 그건 또 뭔 소리야?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을 어떻게 나쁘게 사용한다는 거지?”
그 방법 또한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들은 매우 예민하지만 반대로 속이기도 정말 쉽습니다. 교차검증에 필요한 정보를 일정 수준으로 조작해서 제공하기만 하면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실제와 허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권력자들이 정당성을 의심받는 위기에 직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재화나 그러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권한을 적절하게 분배하지 못했을 때 발생합니다. 그런 경향은 구성체가 크건 작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말을 잘 듣게 하려면 수하들을 잘 거둬 먹여야 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런데 권력자가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나 혼자 독식하고 싶을 때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대로 두면 구성원들이 반발하고 불만을 표출할게 뻔합니다. 권력자는 그걸 잠재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동원되는 보조수단이 바로 종교나 이데올로기입니다. 둘 다 실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들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그렇듯하게 꾸며냅니다. 그리고 그걸 책으로도 펴내지요. 그런다음 그걸 거창하고 화려한 의식을 통해 기념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고 하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고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한사람 두사람, 점차 그 말을 반복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정말 그런것 같아집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숭고한 존재를 위해서 내 생명과 재산을 다 바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누군가 만들어낸 환상이 그렇게 대중들을 하나로 묶어놓고 힘들고 배고프고 지랄 맞은 현실 속 고통을 잊게 만드는 명약이 됩니다.
실존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바로 사람이 그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어떤 대상에게는 가치를 의미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신뢰나 믿음과 연결 지을 수도 있겠네요.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그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는 도전적인 제목을 가진 책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책에서 도킨스는 종교가 가진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한 정의로 ”모순되고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것, 특히 정신장애의 한 증상‘을 예로 들었습니다. 무섭도록 비판적이지요?
하지만 도킨스도 종교가 우리 인류에게 네 가지 주요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했습니다. (문장을 잘 보시면 알겠지만 도킨스는 종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꼬는 겁니다.) 첫째는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와 ‘우주는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설명, 둘째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적 명령으로서의 훈계, 셋째는 ‘신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라는 위로, 넷째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는 아주 좁은 틈새와 같은 영감입니다.
비틀스 멤버로 유명한 존 레넌 John Lennon이 만들고 부른 이매진 Imagine이라는 노래를 대부분 아실 겁니다. 워낙 유명한 노래라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영어가사임에도 불구하고)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존 레넌 이매진 가사 중 일부-
어린 시절에는 그 노래 가사가 무얼 이야기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막연히 당시 유행하던 히피문화와 반전의식을 담았다는 정도만 알았지요. 그런데 가사를 찾아보면 존 레넌이 우리에게 “상상해 봐라 “라고 한 것들은 ”천국, 지옥, 국가, 종교 등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누구도 서로 죽이거나 죽을 필요가 없을 거라고 노래합니다.
이제 그만들 싸우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만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 만들어진 신, 파주, 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