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수 Sep 04. 2020

단순함, 그 최고의 경지에 대하여

지휘자 정명훈은 예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휘한 지 38년째가 되어서야 '원을 그리는 동작'의 테크닉이 가능해졌습니다."라고. 여태껏 상, 하, 좌, 우의 방향으로 절도 있는 동작과 함께 바톤을 움직이며 음악을 만들어 왔다면 이제는 둥글둥글한 '원'을 그리며 그 속에 음악의 시작과 끝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그다음은 일직선을 긋는 단계입니다. 그냥 일자를 긋는 거예요. 이 안에 음악의 처음과 끝, 모든 게 다 들어갑니다. 어느 예술이든 그 마지막 단계는 극도의 단순함이에요. 일평생 예술에 집중한 사람은 이 말을 금방 이해하더라고요. 최근 프랑스에서 와인 분야 장인을 만났는데 그분도 딱 제 생각과 같더라고요. 음악가로서의 제 목적은 결국 가장 순수한 것을 찾아가는 데 있는 겁니다."


어느 예술이든 마지막 단계는 극도의 단순함이라는 마에스트로의 말이 유난히 와 닿는다. 사실 화려함과 기술적인 측면이 중심이 되어서 발전하는 예술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건드릴 곳이 없을 만큼 물감으로 빽빽하게 들어 찬 캔버스와도 같으며, 산 꼭대기를 정복해 버린 등반가와도 같다. 예술에 있어서 '기교'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연장 테크닉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생산해 내는 가치는 어디까지나 기계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서 일반 예술가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예술가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게 마련인데, 일반적인 예술가가 더욱 정교한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해내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는 동안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예술가는 그 시점에서 완성의 '해체'를 시도하게 된다.


산을 오르는 등반가는 정상을 정복한 기쁨에 취했다고 해서 그곳에 눌러앉아 살 수 없다. 등반에 있어 정상이란 겨우 가야 할 길의 절반밖에 안 되는 어느 한 지점일 뿐이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그 산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술가는 기교로 완벽히 단련된 상태에서 조금씩 피와 살을 덜어내는 방법을 배워야지만 '예술적 승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예술을 통해 가고 싶은 곳이 저 먼 하늘나라라면 본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한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기교 그 자체만은 우리를 어디에도 데려다주지 못한다. 열심히 날갯짓을 해보겠답시고 팔 근육을 키운다고 해서 사람이 날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법이다.


언젠가 뉴욕 현대 미술관을 다녀왔다. 마침 앙리 마티스의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작품 활동 시기별로 각기 전시되어 있던 한 가지 주제의 네 개의 조각품에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조각들의 제목은 'Back (등)'이었는데 1908년 무렵 완성된 'Back I'을 처음 보고, 1913년 작 'Back II'와 1916년 작인 'Back III'를 거쳐 1931년의 'Back IV'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아주 놀라웠다.


(사진: 이동수 @MOMA, NY)

The Back Series, bronze, left to right: The Back I, 1908-09, The Back II, 1913, The Back III 1916, The Back IV, c. 1931, all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작품의 컨셉이나 기교적인 측면, 또는 생동감에 있어 1908년에 완성된 'Back I'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모습이다.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당시의 마티스에게 있어서 'Back I' 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산의 정상 과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약 5년 후인 1913년에 'Back II'를 발표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두꺼워진 팔과 다리인데 기존의 작품에다 extra material을 더 갖다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형상이 조금 단순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년 후에 등장한 'Back III'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두드러진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해체'가 진행되고 있으며, 머리와 등을 잇는 척추 부분이 유난히 뚜렷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로부터 약 15년의 세월을 거쳐 발표된 'Back IV'를 통해 우리 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극도의 simplicity 다. 곧고 분명하면서도 둥글둥글한 형상, 모델이 이마를 대고 있는 팔과 그를 땅으로부터 서있게 만드는 다리는 전보다 훨씬 크고 두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마티스가 비워내고 해체할만한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정제와 순수만이 남아있는 마티스의 'Back IV'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첫 작품인 'Back I'과 전혀 다른 차원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일례로 어제 발견하게 된 피카소의 'Bull (소)' 시리즈를 들 수 있겠다.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힘을 가진 역동적인 모양의 소를 피카소가 어떻게 그의 그림 안에서 해체하였는지 살펴보자.


피카소 1945년 12월 18일 作 'Bull' state VI, (사진: 이동수)



피카소 1945년 12월 26일 作 'Bull' state VII, (사진: 이동수)



피카소 1945년 12월 26일 作 'Bull' state VII 변형, (사진: 이동수)



피카소 1946년 1월 17일 作 'Bull' state XIV, (사진: 이동수)



이번 '소'의 마지막 단계의 경우에서 역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치할 정도로 비어 보이는 극도의 단순함이다. 애초에 자세하게 묘사된 근육질의 소는 온 데 간데없고, 소의 머리와 뿔, 몸통과 다리, 그리고 꼬리와 생식기의 흔적만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저 선 몇 개로 이루어진 듯한 피카소의 제14단계의 '소'는 첫 사진에 나타난 제6단계의 '소' 보다도 더욱 고차원적인 무게감과 위협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의 '소'에 드러나 있는 육중한 무게감을 가느다란 선 몇 개가 온전히 다 지탱하며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면서도 전혀 불안한 감 없이 '소'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한 껏 가벼운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 한겨울의 나무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로 인해 죽어있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나무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생명 에너지를 더욱 크게 느껴지게 만든다.


주변의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이 단순화된 형상의 예술 작품을 마주하는 경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에이. 이게 뭐야. 이런 것쯤은 나도 하겠다."라고. 하지만 가득 채워져 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비우고 난 후에 가벼워진 것과,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이 그저 가벼울 수밖에 없는 상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부자가 전 재산을 기부한 후에 빈 손으로 죽는 것과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누구 하나 돕지 못하고 빈 손으로 죽는 삶이 같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대개의 경우 클래식 음악의 진정한 애호가들은 음악의 궁극적인 장르로 실내악을 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규모가  심포니나 오페라 등을 섭렵하고  사람들이 달랑 두세  혹은 서너 개의 악기만이 합주하는 실내악 속에서 더욱 고차원적인 예술적 깊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고차원적인 장르는 시이며, 시에서 사용된 단어의 수가 적을수록  깊이가 더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한국의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가 격조 높은 것이 바로  때문이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자기 인생이라는 작품을 빚어가는 작가이다.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장인 정신을 갖는 일은 얼마만큼 가치 있는 인생을 창조해 내며, 또 얼마만큼 가치 있게 죽을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무엇이든 더 가지려 하고, 오로지 더 채워져 있는 상태만을 추구하는 현대 물질 만능주의의 세상에서 예술가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승화되는 길이 '단순함'과 '비움'에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언제나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라서 우리가 지금보다 더욱 풍성하게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 '해체'에 있다는 이 역설적인 주장이 피부로 와 닿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지휘자 정명훈은 지휘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기초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어느 단계를 지나가고 있는가. 정상을 향해 있는 힘껏 올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정상에 머물러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가. 이도 저도 아닌 이들은 산 언저리 어디쯤을 맴돌면서 '기왕 내려올 것 등반은 무엇 때문에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투덜거리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에 단순해지고 또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감을 가득 채워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매달려야 한다. 젊은 날엔 젊은 대로, 나이가 들어서는 또 그 나이대로 우리는 누구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조금 더 나은 삶을 살다 가기를 꿈꾼다. 하지만 더욱 고차원적인 삶, 그것은 스스로를 부수고 작아지는 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예술은, 인생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동수

매거진의 이전글 영역표시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