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
만약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인생을 특정 주종에 말아먹기로 했다면, 맥주나 소주보다는 이왕이면 클래식 칵테일이나, 위스키 같은 걸 택하는 게 낫지 않냐는 게 내 지론이다.
재산 전부와, 심신의 건강과 유의미한 인간관계를 술로 가득 찬 수영장에 버려야 한다면, 참이슬의 수영장 보단 진과 버무스가 3:1 비율 정도로 섞인 수영장에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난 아직 어떤 수영장에도 내 인생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딜 가던 선택권이 있다면 무조건 드라이 마티니를 마신다. 그리고 앞으로 쓰고 싶은 글(들)은 한잔의 마티니에 담긴 나의 이야기들이다.
처음 마티니를 마신 TPO를 정확히도 기억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보라색 조명을 비춘다. 매년 5월 말, 뉴욕대학교 학생들의 졸업식 날에 졸업을 기념하고자 뉴욕의 랜드마크는 보라색으로 물든다. 그리고 졸업식 낮에는 뉴욕 양키 구장에 보라색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이 관중석을 채운다. 내 졸업식에 딱히 누가 오진 않았다. 하지만 유학생의 졸업이란 대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뉴욕 양키 구장까지는 꽤 긴 시간 지하철을 탔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애들과 그 구장에 앉아서 다소 지루한 세리머니를 마쳤다. 그들은 각자 가족과 친구들과의 축하 자리를 가지려 헤어졌다. 혼잡한 양키 구장을 홀로 서성이다 인파가 줄어들 때쯤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고 미드타운 맨해튼의 적당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먼 친척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술을 한잔 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드링크 메뉴를 훑었다. 그 리스트에서 마티니를 고른 이유는 그나마 가장 익숙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007 영화에서 봤을 테다)
“마티니는 독한 술인데 괜찮겠어?” 먼 친척은 물었다. 허나 취직도 못한 채로 사회에 내던져진 학부 졸업생 1일 차에게 무서울 건 없었다.
흰색 식탁보 위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 얇은 유리잔이 안착했다. 잔에는 올리브가 담겨 있었다. 첫 모금의 감각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1시간 남짓한 점심 후에 친척은 헤지펀드 매니저여서 그랬는지 밥을 먹자마자 오피스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무척이나 취한 상태였다.
밖으로 나왔는데 날이 너무 밝았다. 난 한동안 걷다가 집과 조금 떨어진 공원 벤치에 앉아서 찬란한 햇살 아래 나답지 않게 셀카를 한 장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