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술이 문제다.
저번주에 오랜만에 대학교 후배를 술자리에서 만나 근황을 물어보자,
“제가 기획한 첫 전시가 다음 주 금요일에 창덕궁 근처 갤러리에서 오픈이에요!”라고 하는 바람에,
“아 그럼 꼭 가야지!!!”라고 내 본연에 소주 1.5병을 더한 판단력이 답해버렸다.
그리고 이번주 초에는 카톡으로 초대장이 옴으로 인해, 난 약속을 안 지키는 그저 그런 놈이 되거나, 굉장한 귀찮음을 감수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운명에 처했다. 귀찮더라도 그저 그런 놈이 되긴 싫었는지, 난 일을 조금 일찍 마치고 종로3가역으로 향했다. 8월 말이면 여름은 다 갔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그날 여의도에서 종로 3가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더웠다.
전시장은 창덕궁 돌담길 왼편으로 세로로 쭉 늘어지는 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산발적으로 위치한 카페들과 소품샵들을 지나, 5시 2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도착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생각 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난 들어가기도 전에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왜였을까.
5평 남짓한 공간에는 검은색 옷을 입은 여유 넘쳐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하고 있었고, 한쪽 벽면 테이블에는 전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의 올리브, 값싼 치즈 그리고 화이트 화인이 산개해 있었다. 인파 속에 후배가 보였지만, 바빠 보여서 말을 걸진 않았다. 대신 난 그냥 아무 말 없이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봤다.
2m 높이의 캔버스 작품이 한 8개 있었는데, 시니컬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낙서 같았다. 각각의 작품은 작가의 감정상태의 좌표로서의 점이라는데… 나의 감정상태는 물음표를 3개 찍었다. “???”
그래도 기회비용을 최대한 상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작품을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며, 최대한 감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의 감정상태의 좌표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로 현현되었다: “Go Home”
후배와, 후배의 상사와 적당히 예의를 차릴 정도의 스몰톡 겸 작별 인사를 하고 전시장을 나왔다. 입구에는 전시의 작가로 보이는 여자와 그 친구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 살짝 목례를 하며 그 담배 연기를 뚫고 다시 창덕궁 거리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서 역까지 갈까 하다가, 다소 선선해진 날씨에 마음을 바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몇 걸음 안가 어느 한옥 건물 외벽에 나의 이목과 호기심을 자극한 한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마치 영화의 티저 같이 외부에서는 한 점의 그림만 보였고, 그 옆에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폰을 만지는 한 소녀가 보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 한 점의 그림은 공작의 깃털을 연상케 했다. 조금 더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는 볼 수 없던 디테일들이 보였다. 얇고 고운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을 굽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쪼그려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서서 말했다.
“전시 보러 오셨나요? 이 전시는 ‘작가가 궁금한 것을 확대해서 표현한다’라는 주제로 만든 전시예요”라고 설명했다. 다소 어색한 느낌의 큐레이션은 전시장 알바가 할법한 멘트였다.
“아 그렇군요… 아무나 들어가서 봐도 되는 전시인가요?” 나는 물었다.
“아 네네, 편하게 들어오세요!” 라 말하며 두 계단을 올라 미닫이 문을 왼쪽으로 열며 날 초대해 주었다.
들어가 팸플릿을 받고 2평 남짓되는 좁은 공간을 오가며 여자는 작품을 설명해 주었다. 가까이 봐야만 볼 수 없는 디테일들이 담겨있었다. 직선, 곡선, 잉크의 번짐, 명암들. 그리고 캔버스 위 복잡한 패턴들은 만년필로 하나하나 그린 것들이었다.
설명을 듣는데 주어가 어느새 “작가가” 에서 “제가” 로 바뀌는 것을 듣고, 내 앞의 여자가 이 전시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덧붙였다.
“제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다음 주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RISD)로 공부하러 가요”
그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굉장히 진솔한 종류의 울림이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술가의 꿈을 안고 RISD에 가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여름. 아주 짙은 농도의 기대, 가능성, 설렘, 도전의식으로 점쳐진 여름을 끝을 나고 있는 한 작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스크 위에 나란한 작가의 두 눈에서는 신선하고 산뜻한 기운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나로서 무척이나 응원하고 싶은 성질의 것이었다. (작품 옆에 붙은 빨간색 스티커로 보아 내 응원 없이도 잘할 것 같았지만) 그래서 난 오늘 하루 간, 아니 근 1주일간 처음으로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한 것 같다.
“앞으로 작가님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길 바라겠습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방금 굉장히 아름다운 것을 봤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고, 호기심을 자극하여,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음. 나에게 영감을 주는 아름다움. 어느 금요일 퇴근 후 굉장한 귀찮음을 감수할 만한 그런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며 여름이라기에도, 가을이라기에도 애매한 8월 말의 창덕궁 거리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