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공부
독서를 할수록 정치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든 따라가다 보면 결국 정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뉴스를 보면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스토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 100부작 일일연속극을 60화부터 보는 느낌이었다. 흥미가 떨어져 갈 때 즈음 <이재명 피습 사건>이 터졌다. 나에게 그 사건은 신작 드라마가 되었다.
1화부터 따라간 그 드라마는 두 가지 양상을 보였다. 테러 VS 조작. 공중파와 대다수 인터넷 언론은 테러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따로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조작'을 주장하는 부류였다. 그들의 채널 몇 개를 구독해서 집중적으로 시청했다. 프레임 단위로 분석한 영상과 다수의 추론들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도 젓가락이니 손가락이니 의견이 갈렸고 비현실적 가정이 범람했다. 경찰, 119, 병원, 기자, 시민, 유튜버 그리고 범인까지 포섭하여 자작극을 벌였다는 주장에 이르자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는 현상을 파악할 때 '오컴의 면도날'을 떠올린다. 오컴의 면도날의 골자는 "대다수의 현실은 단순하게 작동한다."라는 의미다. 메트릭스 세계관이나 외계인 창조설이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오컴의 면도날을 따르는 것이다. 자작극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립되려면 너무나 많은 예외가 필요하다. 내가 이재명이라는 가정도 해보았다. 일단 그 많은 사람을 포섭할 자신이 없다. 한 명만 양심선언을 해도 모든 것을 잃는데 그런 모험을 한다? 조작을 할 거라면 통제 가능한 환경에서 CCTV 증거만 남겨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나는 '테러'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재명의 자작극을 밝혀내겠다는 사람들. 당시 나는 그들을 '보수'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돌아보면 성급한 결론인데 좁은 안목의 나에게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진보'에 마음이 기울었다. 태생이 진보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지난 대선 때 이재명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뉴스에서 얼핏 봤던 윤석열의 언행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을 뿐이다. 보수 쪽에서는 나를 멍청한 중생이라 비판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 감으로 찍을 수밖에.
지금은 이재명의 자작극을 주장하던 부류를 보수가 아닌 '극우'로 인지한다. 극우라는 표현을 써서 미안하긴 한데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극좌'는 없을까? 극좌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극좌로 불리지 않고 '종북' 또는 '빨갱이'로 불리고 있었다. 극좌보다는 이쪽이 더 자극적이고 모멸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극좌라는 표현이 많지 않은 이유가 고작 그런 사정이었다니 정치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정치 성향이 세습되는 원리 중 하나는 그들 부모와 주변 환경을 통해서 특정 정당의 첫인상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았다. '두 번째 첫인상'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 또는 사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세월호를 통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과 이태원부터 정치 뉴스를 챙겨본 사람은 분명 다른 감각을 갖는다. 정치의 첫인상이 이재명 피습 사건인 나는 보수보다 진보에 치우치기 쉬웠다. 이걸 벗어나는 게 정말로 힘든 것 같다.
20대의 정치 첫인상은 페미니즘인 경우가 많다. 이쪽으로 입문한 사람들은 진보나 문재인 정권에 호감을 갖기가 어려울 것이다. 첫인상은 바뀌기 어렵기 때문에 페미 논란에 분노하여 정치에 입문한 20대도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젊은이의 보수화를 걱정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떠올려보자는 소리다. 첫인상과 거리를 두지 못한다면 객관적 시각을 갖기가 힘들 것이다. 내가 처음에 이재명 피습 사건에만 몰두해서 보수 전체를 이상한 집단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일단 진보로 방향을 틀었다. 이재명 피습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지만 관성 탓도 있다. 나는 전라북도 익산 출생으로서, 지역감정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전라도 태생인 것이다. 나의 배경이 설득력을 잃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다. 지역감정은 60~70년대 정치적 목적으로 탄생했지만 정치판에서는 변명일 뿐이다. 스스로 수없이 되묻는다. "내가 전라도 태생이기 때문일까?", "대구에서 태어났다면 달랐을까?"
오컴의 면도날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이재명 피습 사건이 조작일 확률도 있다는 말이다. 훗날 조작으로 밝혀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스스로 매국노임을 반성하며 살아가야 할까? 정치는 인문학이 아니기 때문에 팩트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앞으로 쓰게 될 수많은 정치 글은 하나하나 불안을 내포할 것이다. 때문에 정치 이야기는 안 하는 게 맞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나이 탓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한마디가 마음을 움직였다. "중도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진보든 보수든 나쁜 놈은 널렸기 때문에, 한쪽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그쪽의 부당함까지 포용한다고 비칠 수 있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중도가 맞다. 양비론을 주장하는 쪽이 더 객관적이고 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중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선택을 해봤다. 이 불안감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