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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곤의 '바람의 노래'를 펼쳐 읽다

바람에서 사랑까지 — 레옹의 사유

by 레옹

바람은 내 귓불을 스쳐가지만 나는 늘 늦게 알아듣는다.
지나간 것들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내 곁에서 말을 걸어왔음을 뒤늦게 배운다.

어쩌면 삶은 “조금 늦게 알아듣는 예술”인지도 모른다.
그 느림 속에서 나는 사라진 것의 의미를 배우고, 흔들린 마음의 결을 찾고, 사랑의 방향을 천천히 알아간다.

오늘은 조용히, 그 늦은 깨달음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40여 년 동안 한국 대중가요의 결을 써 내려온 작사가 김순곤(1958~).
그가 만든 ‘바람의 노래’를 한 소절씩 펼쳐 내 마음의 작은 서재에 올려두고, 한 장 한 장 넘기듯 이 노래의 속내를 걸어가 보려 한다.

바람에서 시작해 사람의 온도까지 닿는 그 긴 여정을...






1. 바람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늘 마주하면서도 듣지 못한 시간이 길다.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 뺨을 스치고 지나가던 미세한 숨결, 어딘가로 급히 흘러가던 그 흔적들...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내게 무언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내 침묵에 먼저 말을 걸어줄 이는 드물다.
바람 역시 그저 스쳐갈 뿐이다.
그 흐름 자체는 소리의 형태이다.
나는 늘 경험하고 나서야 뒤늦게 조합하고, 마침내 ‘아,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바람은 이미 한 번 불어 지나간 뒤다.

어쩌면 ‘바람의 노래’란, 말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삶이 나를 통과하며 남겨 놓은 미세한 흔적들의 합일지도 모른다.
상처가 나를 지나간 방식, 한 사람의 사랑이 머물다 떠난 시간, 실패가 남긴 온도의 변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바람의 형태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살면서 언젠가 듣게 되는 그 ‘바람의 노래’란,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이 말을 걸어와서가 아니다.
내가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삶을 이해하려 할 때, 고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사랑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펼칠 때, 그제야 나는 바람이 전하는 말을 천천히 알아듣기 시작한다.

바람은 늘 나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늦게 알아듣는 쪽은 언제나 나였을 뿐.



2. 소멸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꽃이 지는 순간은 언제나 슬프다.
눈앞의 아름다움이 흩어질 때, 그 잎사귀들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을 때...
그 모습 자체가 한 사람의 마음을 말없이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꽃이 진다는 것은 끝이 아니다.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흐름이고, 이동이며, 다음 계절을 향한 조용한 준비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실을 대체로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이 소절은 결국 조용히 묻는다.
“때가 되면, 섭리를 알게 되는가?”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고, 빈 가지에 바람이 닿아야 새 싹이 움트는 법이다.
이별이 있어야 만남이 가능하고, 비워내야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나는 이 이치를 늘 지나서야 배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왜 그리 아팠는지, 왜 붙잡을 수 없었는지, 왜 반드시 흩어져야만 했는지.

이해는 세월의 뒤편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때가 되면 가르쳐주고, 눈물이 설득해 주고, 상실이 우리를 조금 더 넓은 사람으로 만든다.

“꽃이 지는 이유를…”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월이, 경험이, 눈물이 선생님이었다는 걸.



3. 인연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누군가 떠난 자리에 외로움을 품은 고요가 남는다.
마음 한구석에 얇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빈자리.
그곳은 비어 있는 듯 하나, 마음이 오래 머무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연은 떠나면서 흔적을 남겼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여백, 마음에 생긴 작은 골짜기, 쉽게 지워지지 않는 멍자국 같은 것들.

그러나 그 빈자리는 결국 또 다른 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모든 만남은 이별이 남긴 여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노래 속 메시지는
이별과 만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떠나는 배가 있다면, 들어오는 배도 있다는 것.

이 두 움직임을 같은 축 위에 놓는다.

우리는 흔히 말을 잃은 자리에서 새로운 감각을 되찾게 되고, 닫혀 있던 마음의 틈에서
또 다른 사람이 빛처럼 스며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떠난 사람이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자리는 비워졌다가 단순히 채워지는 ‘칸’이 아닌 서로의 시간과 온도가 겹치고 이어지는 남겨진 이야기가 된다.
그 사람의 자리는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빈자리 덕분에 나는, 더 넓어진 마음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움직이는 방식이며, 바람처럼 이어지는 삶의 결이다.



4. 그리움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이 노래 전체에서 가장 깊은 철학이 담긴 문장으로 스며든다.
스쳐간 인연이 정말 사라질까?
그리움은 어디에 닿는 것일까?

사람은 떠났어도 그때의 감정과 표정, 숨결과 목소리,
함께 지나간 시간의 온도는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기압처럼 움직인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내 안에 자리한다.
말의 껍질을 벗어 공기가 되고, 오래된 기척이 되어 가끔은 바람처럼 나를 스쳐간다.

최규영 시인이 말한
“모든 소멸은 공기의 형태로 온다”는 문장이 이 소절과 겹쳐진다.
인연도, 그리움도, 결국 ‘바람’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흔적을 남기지 않는 듯하지만 심장을 가장 먼저 흔드는 것.
잡을 수는 없지만 부재를 통해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

그게 스쳐간 인연이고, 그게 오래 머무는 그리움이 아닐까.

사람은 떠났지만 그 마음의 온도는 남는다.
그리고 그 온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다시 살아내는 순간들 속에서 또 바람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내게로 온다.

모든 인연이 결국 그렇게, 우리 안에 작은 기류로 남는다.
소리 없이, 형태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5. 무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이 문장은 겸손이 아니라 고백이며 조용한 외침이다.
아무리 연륜이 깊어진다 해도 삶의 일부분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 인연이 엇갈리는 이유, 사랑이 찾아왔다가 말없이 사라지는 사건처럼, 이 모든 것은 지혜의 문제가 아닌 시간과 상처, 그리고 성장의 문제다.

나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이제는 안다’고 착각하며 지나쳤던가.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알았던 적이 없다.

어쩌면 깨달음이란, 시간 속에 묻어 있다 바람에 실려 내게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알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인정하고 견디는 일일지도.

내 처지를 인정하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조용히 열리기 시작한다.

지혜는 저 끝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품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6. 삶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살아가는 방법은 사실 단 하나다.
견디는 것.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워야 할 위대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결국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조금씩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부서졌다가, 천천히 이어 붙여졌다가, 다시 흐르는 사람으로 돌아오는 과정일 뿐이다.

이 고백에서 묘하게 따뜻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뭔가 거창한 말이 아니라 정말로 오래된, 그리고 ‘대단치 않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방법은 언제나 단순했다.

복잡하게 만든 건 언제나 내 자신이었다.



7. 고뇌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네”



이 문장은 인생의 ‘경험치’를 품고 있다.
살아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음색을 지닌 문장이다.

실패는 언제나 아팠다.
그때마다 마음 한편이 부서졌고, 나는 종종 그 부스러기를 주워 담을 힘조차 없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그 실패들이 모여 나를 “사유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고뇌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복병이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조금씩 더 단단해졌고, 조금씩 더 깊어졌다.

비켜갈 수 없다면 그 시간을 그대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고통을 피하면 배움도 피하고, 고뇌를 미루면 성장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삶의 순간순간 나는 이 문장을 조용히 되뇐다.

“그래, 피할 수 없다면 당당히 맞서자.”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는 건 견디는 힘이 조금 더 자라는 일일 것이다.




8. 사랑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세월을 견디고, 그리움을 이겨내고, 실패를 배우고, 사람의 온도를 느끼고 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다.

사랑은 대상이 아닌 태도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라보는 특별한 방식이 되는 순간.

그때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에필로그 — 바람은 결국 사랑으로



한 소절씩 사유를 건너오며 나는 알게 되었다.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흔적이고, 상실이고, 무지이고, 삶이고, 고뇌였다는 것을.

모든 것이 지나가고, 어떤 것은 떠나고, 어떤 것은 다시 돌아오고, 어떤 것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이 마지막에 가서 조용히 하나의 형태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 형태가 결국 모두 ‘사랑’이라는 것을 배운다.



바람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이 여정을 나는 지금 어디쯤 지나고 있을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오늘, 어디쯤 지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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