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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cine 수다

<리얼 페인> 대문자 T랑 F가 여행가면 생기는 일

by 장혜령



<리얼 페인>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법을 배우는 인생 수업 같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생가를 찾아가는 두 사촌의 여정을 통해 민족의 역사에서 개인의 역사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과정을 환기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할머니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애도하던 ‘벤지’와 ‘데이비드’는 극명히 다른 성격처럼 티격태격 하나 개인, 가족, 나아가 정체성의 동질감을 깨달으며 오늘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대문자 T와 F의 달콤살벌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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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사는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는 딸과 아내를 둔 가장이다. 온라인 광고 대행 업무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가정과 일의 양립을 목표로 하던 중 과부하가 걸렸던 그는 매일 깨어 있느라 잠도 부족하다.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있는 처지다.


정신없이 일에 파묻혀 살던 중 어릴 적 형제처럼 자라온 사촌 벤지(키에란 컬킨)와 할머니를 기리는 폴란드 패키지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유산으로 여행경비까지 주셨는데 유난히 각별했던 벤지는 일정 마지막에 할머니가 살던 동네를 가자고 제안했다.


한편, 벤지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기복을 가진 친구다. 한없이 처음 보는 사람과도 말이 통하는 친화력을 발휘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하면, 세상 우울함을 다 가진 사람처럼 군다. 조울증을 앓고 있으며 엄마 집 지하실에 얹혀사는 백수다. 할머니를 생각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정도로 극단적인 성격이다. 하고 싶은 말은 일단 던지고 보는 기분파다.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은 안중에도 없고 불안한 시한폭탄 같다. 대신 사과를 하며 뒤 수습은 늘 데이비드의 몫이다. 대체 어느 장단에 비위를 맞춰야 할지 몰라 데이비드는 시한폭탄을 안고 여행하는 기분이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유대인 3세이자 미국인인 둘은 폴란드라는 조국이 가깝고도 먼 낯선 나라다.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잘 모르기 때문에 패키지 투어를 신청했던 거다. 마치 관광객처럼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가기 위한 일환이었던 거다. 하지만 유대인 수용소로 가는 기차 안에서 돌연 주체하기 힘든 죄책감이 떠오른 거다. 일등석에서 제공되는 프리미엄 서비스가 불편하다며 꼬리 칸으로 가버린다. ‘80년 전 선조들은 같은 철길을 화물칸의 가축 취급을 받으며 끌려갔을 텐데 남일처럼 즐겨도 되는 거냐’며 양가적 감정을 호소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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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끊는 벤지를 처음에는 모두 불편했지만 여행이 무르익을수록 조금씩 공감하게 된다. 아픈 역사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렇다고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체화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투어의 첫 번째 시작을 알리는 ‘게토 봉기 기념비’에서 벤지가 보여준 위트는 ‘진짜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의 희생에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색다른 방식이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진지하고 결연한 동상 앞에서 동심으로 돌아간 듯 흉내 내는 즉석 연기는 내 이야기를 객관화하는 장치로 연결된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느라 소원했던 둘은 오랜만에 여행길에 오르며 잊고 지낸 기억을 차츰 떠올린다. 여행은 낯선 곳의 설렘과 불편함이 동반되는 일이지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갈 용기를 얻게 되는 모순적인 일이다. 여행은 머물기 위해 떠나야만 하는 이중적인 행위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인생과도 같다. 철저하게 세운 계획도 어처구니없이 작은 일로 틀어지기기 마련인 것처럼. 이쪽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뚫거나 좀 돌아가는 여정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과정인 셈이다.


슬픔을 공감하는 색다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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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민족 전체의 트라우마인 거시 역사를 개인의 미시 역사와 나란히 한다. 슬픔에 대처하는 진정성 있는 공감을 자아낸다. 겉으로 보면 폴란드를 여행하는 로드 무비 장르성이나, 전쟁의 역사를 공유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결합되어 남일 같지 않다. 여행이 시작되면 동반되는 설렘, 불편함을 거쳐 뜻밖의 난처함을 해결하고 익숙해질 때쯤 헤어져 아쉬움을 알아차리게 된다. 돌아가는 내내, 혹은 일상에서도 여행은 휴식이자 치유, 영감의 원천이었음을 깨닫는다.


몇 년 전 겨울, 서대문형무소를 탐방했던 기억이 <리얼 페인>을 보며 떠올랐다. 전쟁을 겪지도 않았지만 나라 잃은 설움, 독립과 광복을 위해 스러져갔던 선조들의 기개, 분노, 한을 공간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전달받을 수 있었다.


리얼한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벤지처럼은 아니었지만 책이나 미디어로 배운 민족의 역사를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전해지는 감각이었다. 도심과 가까운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일상과 가까운 서대문형무소의 거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봤다. 잠시 머물다 갈지언정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애도하는 방식임을 깨닫게 되었다. 역사의 무게감을 견디며 실제 겪지 않았지만 타인의 상처를 공감하는 법을 영화에서 배웠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1세대 유대인은 허드렛일로 버텼고, 2세대 유대인은 힘든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키워준 부모 덕에 전문직 종사자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세대 유대인은 신세 한탄만 하며 부모 밑에서 안주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선조들의 희생 없이 지금의 내가 살아갈 수 있었을지 먹먹한 마음이 따르는 대사다.


민족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로 대입해 볼 때 수많은 기적으로 살아남아 세상에 나온 벤지가 수면제로 삶을 마감하려 할 만큼 힘든 일은 무엇이었을지, 마음의 병을 얻게 이유가 어떤 일이었을지. 각자의 복잡한 속내를 상상하게 하는 진솔한 이야기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네 고통을 공감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고통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벤지가 비로소 자신을 보듬게 되는 시작을 응원해 달라는 메시지다.

가족사를 통해 민족 역사를 말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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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번째 영화를 선보인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출 능력은 연기를 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은 안긴다. 사촌끼리 티격태격하면서 해외 패키지여행을 함께하는 소소한 영화에 반짝이는 윤기를 더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흐르는 폴란드 출신인 쇼팽의 음악은 클래식의 잔잔하고 우아한 선율과 시너지를 이루며 극의 활력을 더한다. 키에란 컬킨과 제시 아이젠버그와 인연이 있던 엠마 스톤이 제작자로 변신해 원석을 알아본 능력도 발휘한다.


영화는 오프닝의 공항에 앉아있는 벤지와 수미상관의 형태를 취하며 끝난다. 분주한 공항 속에서 다양한 인종, 성격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안정을 취하는 벤지를 비추며 삶의 순환성과 연속성을 말한다. 별일 일어나지 않아도 마음 따뜻해지는 정서는 영화 <바튼 아카데미>를 떠올리게 한다.


제시 아이젠버그 가족의 역사를 소재로 만든 <리얼 페인>은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키에란 컬킨에 남우 주연상을 안겼다. 그 또한 <나 홀로 집에>로 데뷔해 불우한 가족사를 뒤로하고 배우로 성공한 극적인 일화가 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는 순간을 또다시 증명했다. 무미건조한 삶이 드라마틱한 영화가 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작은 기적을 위서라도 각박한 세상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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