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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보지 않으려다
매일 손해 보는 우리

베트남 한 달, 증명 없는 삶을 경험하다

by 최두옥

신뢰가 만드는 효율성


최근 베트남에서 한 달을 지내며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호이안 참섬에서 진행되는 스노클링을 예약하는데 선수금도, 신분증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정원 30명 중 한 명이 늦어서 결국 못왔는데 가이드는 '그럴 수도 있다'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며칠 후, 현지 친구와 함께 매물로 나온 빌라를 보러 갈 때도 비슷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브로커에게 말하면 별다른 절차 없이 당일이나 다음 날 바로 볼 수 있었다.


hoian_snorkeling-02.png 복잡한 등록절차나 선수금이 필요하지 않았던 베트남 호이안 참섬 스노클링


처음엔 이런 쉬운 진행이 낯설어서 '사기 아니야?' 하는 생각까디 들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이런 경험을 하다보니 이게 바로 '신뢰가 비용을 아낀다'는 말의 실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흔히 선진국일수록 체계적인 증명 시스템을 갖췄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학습된 불신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사전 증빙, 보증금, 신분 확인 절차들이 사실은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증빙사회의 역설


모든 것을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사회는 표면적으로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은 상당한 부작용을 낳는다.


우선, 모든 행위에 비용이 붙는다. 단순한 예약 하나에도 서류를 준비하고, 확인하고, 보증금을 걸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비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개인의 것이지만, 결국 사회 전체의 거래비용으로 누적된다.


둘째, 역설적이게도 시스템을 악용하는 이들에게 유리해진다. 증빙 서류를 정교하게 조작하거나 형식적 요건만 갖추면 실질적 신뢰와 무관하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완벽한' 서류를 갖추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셋째,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문화가 고착된다. 실제 신뢰 관계나 실질적 내용보다 문서상의 완결성이 더 중요해지면서, 관료주의의 늪에 빠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크로지에가 지적했듯, 과도한 형식주의는 조직과 사회의 경직성을 높이고 혁신을 가로막는다.


미셸 크로지에 (Michel Crozier)는 프랑스 사회학자이며 『The Bureaucratic Phenomenon』(1964)의 저자로, 과도한 형식주의와 관료주의가 조직의 경직성을 높이고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했다.



100% 안전을 위한 감시사회


물론 증빙을 요구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상황이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1%의 예외를 막기 위해 99%의 사람들에게 감시와 증명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 개념을 떠올려 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널드 코즈는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는 모든 거래에 과도한 비용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계약서 작성, 이행 감시, 위반 시 처벌 등에 드는 비용이 거래 자체의 가치를 잠식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전제하고 체크하는 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감옥에 가깝다. 감옥은 완벽하게 안전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trust-attitudes.png "대부분의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국가별 응답률


신뢰와 처벌의 균형


신뢰 기반의 사회가 작동하려면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신뢰를 배신하는 소수에 대한 강력하고 신속한 제재다. 신뢰를 악용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명확하고 강력해야 한다. 공동체가 작동하고, 평판이 중요하며, 위반 시 다시는 그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깔려 있어야 한다. (내가 머물렀던 호이안의 경우, 대도시인 호치민이나 하노이와는 달리 공동체와 평판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 같다)


이는 에스토니아의 e-거버넌트 시스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디지털 ID 하나로 거의 모든 행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신뢰를 남용하는 경우 매우 강력한 처벌이 따른다. 신뢰와 책임이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갈 방향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전 증빙보다 사후 책임의 시스템이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며 사전에 체크하는 대신, 기본적으로 신뢰하되 배신에 대해서는 명확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구조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평판 시스템이 고도화되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신뢰가 측정 가능하다. 과거 거래 이력, 리뷰, 평가 등이 투명하게 공유된다면 복잡한 사전 증빙 없이도 충분한 신뢰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에어비앤비가 좋은 예다. 이 플랫폼은 낯선 사람의 집에 머무르는, 한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거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핵심은 상호 평가 시스템이다. 게스트와 호스트가 서로를 평가하고, 이 평판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연구에 따르면 충분한 긍정적 리뷰를 가진 호스트는 인종이나 나이 같은 사회적 편견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신뢰 점수가 높으면 예약 전 복잡한 신원 확인 없이도 거래가 성립되는 것이다.


둘째, 신속하고 명확한 처벌 시스템이 필요하다. 신뢰를 배신한 이들이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위반 시 명확한 불이익이 따라야 한다. 법적 처벌뿐 아니라 평판 하락, 시스템 접근 제한 등 다층적 제재가 필요하다. 우버의 평점 시스템이 이를 보여준다. 운전자는 4.6점 이하로 떨어지면 계정이 정지될 위험에 처한다. 승객 역시 낮은 평점을 받으면 서비스 이용이 제한된다. 이런 명확한 기준이 있기에 대부분의 사용자는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중요한 건 처벌이 꼭 가혹할 필요는 없지만, 확실하고 신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반 시 즉시 불이익이 따른다는 것을 알 때, 사람들은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셋째, 신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증빙을 요구하는 것을 '철저함'으로, 신뢰하는 것을 '순진함'으로 여기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신뢰는 나약함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며, 그것을 쌓는 것이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은 논란이 많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신뢰할 수 있는 행동에는 보상이, 신뢰를 저버린 행동에는 제재가 따른다는 원칙의 명확성이다. 신용 점수가 높은 기업은 세금 감면, 행정 절차 간소화 등의 혜택을 받고, 낮은 기업은 시장 접근이 제한되고 공개적으로 명단이 게시된다. 우리는 이 시스템의 감시 측면을 경계해야 하지만, '신뢰에는 보상이, 배신에는 대가가'라는 원칙만큼은 배울 만하다.



한국으로 돌아오며


베트남에서의 한 달은 내가 얼마나 많은 '준비'와 '증명'에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했다. 신뢰는 공짜가 아니다. 하지만 불신의 비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에 살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신뢰하되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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