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울프>를 보면서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늑대 인간을 다룬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1994년 잭 니콜슨이 주연한 영화 <울프>를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을 것 같군요. 저는 이 영화를, 아니 이 영화의 늑대를 좋아합니다.
주인공은 오랫동안 몸담아 온 출판사에서 천직으로 알았던 일을 내놓고 쫓겨나야 할 처지입니다. 극도의 위기감과 패배감 속에서 한밤중 차를 몰고 나갔다가 늑대에게 물리지요. 이후 그는 내재돼 있던 인간 본래의 야성을 점차 '회복'(회복이다!)해 나가게 됩니다.
무기력한 패배의식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배신하고 위기로 내몬 후배를 향한 반격의 고삐를 쥘 정도로 지혜롭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 돼 갑니다. 그는 더 이상 나약하고 파리하고 비겁한 실직자가 아닌 것이지요.
영화는 늑대로 변해가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야수성, 비열하고 야비한 경쟁의식, 사회적 위선 등을 야성과 대비시키면서 인간 본래의 원시성과 야성이 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침없는 힘과 의심 없는 사랑을 늑대의 속성으로 설정하면서 ‘인간 문명이 멸망해도 지킬 가치가 있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야성을 버리고 문명화한 지는 2만 년이 채 안 된다고 합니다. 야만성의 멍에를 씌워 야성을 사장시킨 후로도 인간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맹과 의리와 종족애를 버린 채 배신과 탐욕에 지배당했으며 교활하고 극악해졌다고 할까요. 배고프지 않고도 동포를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 됐습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주인공은 자신을 늑대로 변하지 않게 막아줄 부적을 준비합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데, 이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을 해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밤이 돼 발현할 야성을 물리적으로 억제하려 했던 것이지만 사랑하는 여자(암컷)가 공격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의지로 부적의 줄을 끊고 ‘강한’ 늑대로 변해 여자를 구합니다.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더라도 여자를 지키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쌍둥이 복제늑대인 온순한 스널프와 사나운 스널피가 싸움을 그치지 않아 격리시켰다는 신문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어요. 야생의 늑대는 싸움에서 지면 ‘졌다’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하지요. 이렇게 서열이 결정되면 싸움이 중단되는 것인데, 태어날 때부터 사람 손에 길러진 탓에 의사소통 능력이 없는 스널프가 스널피에게 패배의 뜻을 전달할 줄 몰라 생긴 불상사라고 전문가가 해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제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야생의 늑대와는 달리 학자들은 복제늑대가 짝짓기 의사를 주고받을 능력이 없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늑대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강력한 팀워크를 자랑하고 구성원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먹잇감을 임의로 잡지 않으며 약한 상대가 아닌 강한 상대를 선택해 사냥한다고 해요. 덧붙여 자신의 암컷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동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여자는 저로서는 매료될 수밖에 없는 기질을 늑대가 가졌더라구요.
사진에 대해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군요.
무리가 이동할 때는 노쇠한 늑대를 맨 앞에 세웁니다. 힘세고 날랜 젊은 늑대들이 바로 뒤를 따라가며 방어합니다. 이들을 뒤따라가면서 후방을 방어하는 늑대들도 포진돼 있습니다. 그럼 우두머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가장 뒤에 홀로 있는 늑대가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모두가 낙오하지 않고, 길을 잃지 않으며, 안전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영화 '울프'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야성'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박제되고 거세되고 순치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영화와 같은 선택지가 놓인다면 어떨까요. 내 안에 잠자는 야성을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갈까요, 아니면 잠금장치를 더 공고히 할까요.
선택은 오로지 그대의 것이지만, 파리한 도시의 그늘 속에서 오롯이 야성을 간직한 원시의 늑대가 문득 그리워지곤 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