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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월 Oct 13. 2024

1화> 그저 살아가는 중입니다

         “아얏!!”     

하늘 위에 구멍이 난 것처럼 우르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온갖 감정 조각들이 짐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짐은 비명 소리를 한 번 낼뿐, 익숙한 듯 감정 조각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화를 내! 소리를 질러! 

           감정을 참기만 하니까 다 뒤섞이기만 할 뿐이잖아?”     


짐의 답답한 속을 알아줄 리 없는 주인을 향해 짐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짐의 말이 들렸다면 이렇게 처리 못한 감정들이 많을 리 없지. 감정조각들로 가득 쌓인 공간에서 주인을 안타까워하는 짐의 한숨 소리만 커져갔다.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짐은 아까보다 더 속도를 올려 청소를 이어나갔다. 바닥에 깔려 있던 빨간 조각들이 빗자루 솔에 쓱쓱 쓸려나갔다. 바닥은 빗질 소리와 함께 조금씩 새 하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하얀 정사각형 방에 얼룩덜룩한 색들이 묻어 있는 이곳은 마음 저장소다. 마음 저장소로 말할 것 같으면 주인이 느끼는 감정들이 흘러들어오는 곳이다. 여기서 쓰고 남은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면 주인은 그 감정들에 휩싸여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감정 조각들을 청소해야 하는데, 짐이 이를 도맡고 있다.    



짐이 언제부터 일을 시작했는지 저 먼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아마도 마음의 방 주인이 세상에 태어난 날부터 일거다.  ‘응애’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에 발걸음을 내딛던 날. 짐은 마음의 방에 떨어지는 눈물 조각들을 청소하기 여념 없었다. 그 눈물 속에는 두려움, 공포, 신기함, 안정감 등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두려움 조각이 많이 보였던 주인은 아마 처음 마주한 세상이 조금 겁이 났나 보다. 그래도 그 감정이 깊어지지 않게, 잠시 스쳐 지나가 기쁨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짐은 열심히, 열심히 빗질을 하고, 닦았던 기억이 난다.      

 


웃음이 많은 주인이 즐거운 순간에는 일부러 해피한 조각들을 남겨두기도 했고, 슬픔에 빠졌을 때는 조용히 눈물 조각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감정들을 모두 다 처리할 수는 없었다. 미처 청소하지 못한 조각들은 마음의 방에 자리를 잡아 자신의 색을 물들였다.      

 

감정들을 다 청소하지 못한 자신의 탓일까. 아니면 여러 감정들을 살피지 않으려 했던 주인의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마음의 방에 회색빛 감정 조각들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색 감정 조각은 무기력, 무감각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이게 쌓이면 좋지 않다. 주인의 감정이 온통 무감각해니까. 그리고 다른 감정들을 뒤덮을 만큼 강하니까.  이런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고, 마음의 방은 온통 회색빛 감정 조각들로 물들여졌다. 지금 이곳은 온통 회색빛이다. 반짝이던 감정들도 모두 회색으로 물들여졌다. 주인은 다른 감정들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됐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느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오늘도 그랬다. 주인이 기상을 한 순간부터 회색 조각이 쉴 틈 없이 흘러들어왔다.      


         ‘귀찮아... 눈 뜨기 귀찮은데 눈이 떠졌네...’      


주인의 목소리다.      

         

        ‘그냥 영원히 자고 싶다....’      


   눈을 뜬 아침이 싫은가 보다. 주인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일 뿐, 화석이 된 마냥 손가락 하나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각하는 거라고는 그저 만사가 귀찮다는 마음뿐... 의지와 관계없이 매일 눈이 떠지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괴로웠다.      


         ‘왜 인간은 활동이란 걸 해야 할까? 잠만 자며 살 수는 없나? 

         영원히 눈 뜨지 않고 살 수 없는 걸까?‘      



주인도 이 질문이 아주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망처럼 되지 않을 것도 안다. 다만, 눈을 뜬 후에 느끼는 싫은 감정들을 매일 같이, 똑같이 느끼기 싫을 뿐이다.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귀찮을 뿐인데 밤이건 낮이건 잠만 잘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주인은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SNS를 켜고 피드에 올라오는 대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청소부 짐의 일은 줄어들었다. 주인에게 메마른 감정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웃긴 피드를 봐도, 슬픈 걸 봐도 아무 감정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하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차라리 울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각하게 있는 모습이 더 안쓰럽기만 했다.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이 있다. 안 좋은 감정을 건강하게 해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병이 생긴다는 의미다. 그렇다. 주인은 병이 들었다. 우울증이라는 나쁜 병이. 세상에 어떤 놈이 우울증은 감기라고 했을까? 짐이 봤을 때 우울증은 마음의 암덩어리다. 오랜 시간, 어쩌면 10년이 넘도록 치료해야 하는... 언제 완치가 될지 모르는 무서운 병이다. 스스로 나을 의지가 없다면 더 치료가 어려운 그런 병이다.      


주인은 지금 병에 지고 있는 걸까, 이기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주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짐은 생각했다. 두고 볼 수 없었던 짐은 나쁜 생각을 털어내고 주인을 향해 소리쳤다      


      “ 이봐! 주인!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한다고~! “      


주인을 움직이게 하려면 일단 무기력한 마음을 덜어내야 하기에 마음의 방에 물든 회색 감정 조각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깊이 진하게 새겨졌는지 몇 번을 닦아도 쉽게 옅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럴수록 짐은 더 힘을 내서 청소를 이어 나갔다.      


        “오늘은 꼭 씻어야 한다고. 지금 며칠 째 안 씻고 누워 있기만 하는 줄 알아?

       오일이야. 오일. 거지도 절을 할 지경이야 

       내가 오늘은 꼭 씻게 할 거야. 

      무기력한 기분! 오늘은 그만 사라져 주겠어? “      


무기력한 감정에 휩싸여 씻는 것조차 하기 힘든 주인을 일어나게 할 방법은 열심히 감정들을 청소하는 것. 그 방법 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열심히 닦아 줬으니 오늘은 일어날 수 있을 거야’      


그 마음과 정성이 통해서였을까. 짙은 회색으로 가득 찼던 마음의 방이 조금씩 옅어지며 연한 회색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언제고 다시 짙은 회색이 되겠지만, 단 몇 분 만이라도 주인이 무기력함에서 이겨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자신이 곁에 있으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속삭이며 짐은 청소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주인은 누워있는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짐이 열심히 쓸고 닦은 덕분이다. 주인은 곧 갈아입을 속옷과 잠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 짐은 이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더 힘을 내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진짜 씻어야지. 더러워 죽겠다.  

         하아..... ”     



주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물줄기를 맞으며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주인은 힘겹게 샴푸를 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기름기로 찌든 머릿결은 샴푸를 해도 풍성한 거품이 나지 않고 겉돌기만 한다. 거품을 내기 위해 물을 더 묻혀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인은 샴푸를 한 번 헹구고 나서 다시 샴푸를 짜고 거품을 낸 뒤 머리를 감는다. 기름기가 한 번 씻겨져 나가서인지 이번에는 거품이 풍성하게 나기 시작했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감는 주인은 씻지 않아도 머리 감은 효과가 나는 제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제품이 있다면 힘들게 침대 밖을 나서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샤워까지 마친 주인은 수건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방으로 들어갔다. 드라이를 하며 머리를 말릴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 그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버린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주인의 이런 상태에 안달복달하는 건 어느새 짐의 몫이 되었다. 어떤 날은 자신이 좀 더 빠르고 깨끗하게 청소를 못해 주인이 무기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이라도 주인이 움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할 때마다 밀려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밀려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자신이 주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어떤 감정에 휩싸이지 않게 지워주는 거니까. 그래도 오늘은 한 가지라도 한 게 어디인가. 그리 생각하며 짐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개운하게 잠에서 깼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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