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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Apr 24. 2017

덮어둘까? 아니면 열어볼까?

영화 <라자르 선생님>을 보고(필립 팔라르 감독, 2011)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왼쪽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아직 10분이 남았다. 옷맵시도 고쳐보고 구두도 힐끗 쳐다본다. 내가 이러는 것은 취업을 위한 면접을 앞둔 것도 아니고, 풋풋한 설렘을 지닌 소개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죄를 짓고서 경찰 조사를 앞둔 상황도 아니고,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려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8시 50분이 되면 현관 앞에 서서 “학교 가기 싫어.” 하는 고백으로 가끔 나를 멘붕에 빠뜨리는 아홉 살 첫째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학교 생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아이의 다른 면을 알게 되는 좋은 기회라고도 하지만 학교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이유 없이 쪼그라든다.  


 

드르륵 문을 열고 한 발 내디딘다. 교실을 안을 휘익 둘러보니 창가에는 아이들이 이름이 적힌 작은 화분들이 올망졸망 줄을 서 있다. 잘 닦여진 교실은 다섯 개의 책상이 하나의 모둠을 이루고 총 네 개의 모둠이 차분히 칠판을 향해 있다.  

가벼운 소개와 함께 인사를 나눈 후 선생님은 아이의 성향을 설명하신다. 학기 초의 모습과 달라진 지금의 행동,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신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아빠가 그리고 선생님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아이의 처진 기분을 알아채고 풀어주는 팁에서 학교 생활과 교우관계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노하우까지 생각을 나누어주신다.  

그리고는 그동안 외면했던 사실 하나 더 알려주신다. 아이는 밥 먹고 가방 메고 학교에 간다. 돌아와선 TV 보고 놀이터 가고 책 읽고, 씻고 다시 밥 먹고 자면 쑥쑥 잘 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넓어지는 관계 속에서 때론 아픔을 느끼고,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가끔 홀로 슬퍼한다는 것을. 하교 후 숱하게 “아빠~”, “아빠, 있잖아~”하며 시작했던 첫째 아이의 말들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누구나 겪는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이라며 지나왔던 일들이 생각난다.  


 

‘에고. 우리 쑥쑥이는 어디에 앉아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걸까?’ 


 

다시 교실을 살펴보며 짧은 반성을 하는 순간,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초등학교에 있었던 라자르 선생님과 알리스, 시몽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직접 아는 이들은 아니다. 2011년에 만들어지고 2013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필립 팔라르도 감독의 영화 <라자르 선생님>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초등학교 선생님이 교실에서 자살을 한다. 우유 당번이라 먼저 교실로 향한 시몽이 이를 발견했고, 같은 반 친구인 알리스는 창문으로 그 장면을 보게 된다. 시몽과 알리스 외에도 갑자기 선생님을 잃게 된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깊이와 넓이의 상처를 가슴에 새기게 된다. 이때 담임 선생님을 대체할 교사가 나타나는데, 다름 아닌 바시르 라자르 선생님이다. 그는 책상 배치를 반원 모양에서 모두 정면을 향하는 방식으로 되돌리고, 어려운 발자크 소설을 받아쓰게 하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문법 용어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바뀐 수업 환경에 투덜거리면서도 조금씩 선생님에게 적응하는 아이들. 어느 순간 덜컥 자신들의 진심을 쏟아내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던 라자르 선생님도 점점 아이들 속으로 들어간다. 실은 그도 캐나다로 망명하기 전 살았던 알제리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잃은 상처가 있다. 아픔을 가진 학생과 선생님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의 사건인 ‘죽음’이 아니어도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겪으며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타인은 물론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아이 간에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데, 우리는 이런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있고, 또 치유해야 할까?  

상처가 덧나지 않고 조용히 딱지를 이룰 수 있도록 침묵하며 덮어 두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함께 열어 보며 치유를 위한 정보는 물론 마음의 온도까지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 특히 그 상처가 가슴속에,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에서 선생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치료는 일명 ‘덮어두기’이다. 한 명의 심리상담사를 초빙해 아이들의 심리를 치료하겠다는 교장선생님은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힘든 학생이 있는지 묻고, 무엇이든 얘기하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교실에선 죽은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가 금기시되고, 교장 선생님은 이대로 아이들의 가슴에 딱지가 생겨 기억 속에서 떨어져 나가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찰랑이는 감정선은 위태위태하다. 상처의 자리와 깊이에 대한 고려 없이 빨간약을 쓰윽 바른 후 밴드를 붙이고 아물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물이 가득 찬 유리잔을 들고 파도가 울렁이는 배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라자르 선생님과의 수업 중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알리스가 자신의 글을 읽는다.  

우리 학교는 좋습니다. (중략) 자상한 선생님들이 머릿니는 없는지 충치는 없는지 싸우거나 슬프지 않은지 늘 보살펴 주십니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마틴 선생님은 떠나셨지만요. (중략) 비행기 조종사인 엄마는 자주 집을 비우십니다. 엄마가 빨리 오시면 좋겠어요. 제가 요즘 많이 힘들거든요. 마틴 선생님은 살아갈 용기가 없었나 봐요. 마지막으로 한 일은 의자를 차고 매달리는 거였죠. 그분의 행동 역시 폭력이라고 봅니다. 폭력을 휘두르면 벌을 받아야 해요. 하지만 그분은 벌 받을 수 없어요. 돌아가셨으니까요. 


 

알리스의 목소리가 또렷해질수록 학생들이 하나둘 집중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모습을 본 마자르 선생님은 아이들이 숨기는 대신 맘껏 얘기하고 싶어 함을 알게 된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단호하다. 침묵하란다.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감정을 억누르고 침묵하게 만드는 것. 타인의 감정을 누가 어떤 권리로 잠들게 만드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이 또한 폭력이라는 것이다.  


 

천장에 매달린 마틴 선생님을 제일 먼저 발견한 학생은 시몽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못되게 굴며 친구들에게 장난친다. 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죽은 선생님의 사진에 밧줄과 날개를 그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시몽이 그날의 상처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학생에 대한 체벌도 신체 접촉도 금지된 학교에서 마틴 선생님은 울고 있던 시몽을 안아준 적이 있다. 선생님의 품은 따스했지만, 바라던 엄마의 품이 아니어서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자신에게 키스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선생님은 곤란에 빠졌다. 시몽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너무도 무거웠다.  

침묵은 그를 더욱 짓눌렀고 점점 더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시몽의 마음에 귀 기울이지도 상처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우연히 ‘투척’이란 단어를 설명하던 중 시몽이 마틴 선생님에 대해 말하게 되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다. 횡설수설 죽음의 원인을 이야기하다가, 처음엔 “마틴 선생님이 저 때문에 자살했대요.”라고 했고, 나중엔 “저 때문에 자살한 거 아니에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죠?” 하며 눈물을 흘린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전부터 힘들어하셨대.” 하는 라자르 선생님의 말에 거대한 죄책감의 덩어리를 조금 덜어내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한다.  


 

모든 면에서 상처를 들추어 보는 것이 회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관찰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과 상처의 치유에 첫 단추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첫째 아이의 선생님과 마주하며 다소곳이 앉았으니, 다시 학생이 된 것 같다. ‘세상엔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자신만큼 주위 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배려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며 자신에 찬 사람이 많지. 하지만 상대의 의견을 확인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실을 덮어 짓누르는 것이 현실이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학교에선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와선 밥 먹고 잠을 자면 되는 일상에서 무슨 걱정거리가 있을까, 만일 있다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하고 내 아이의 일상을 단정 지었다. 내가 쌓은 벽이라는 장애물 없이 상대의 생각과 입장을 드나들면서 함께 공감하며 웃고 우는 것이 소통일진대 말이다.  


 

라자르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에서 자신의 상처를 담은 우화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소개한다. 자신이 먼저 읽으면 아이들은 그중에서 틀린 곳을 찾아내는 과정이 이어진다.  


 

부당한 죽음이 닥치면 할 말이 없다.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는다. 


 

올리브 나무 가지에 에메랄드 빛 번데기가 매달려 있다. 

내일이면 나비가 되어 활활 날아갈 것이다.  

- <‘훨훨’로 고칩니다.> 


 

(중략) 


 

나무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번데기를 지키기 위해 바람을 가리고 개미를 막아주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떠나보내야 한다. 

짓구즌 적이 우굴대는 험한 세상으로. 

- <‘짓궃은’으로 고칩니다.> 


 

(하략) 


 

우리 집에는 두 마리의 번데기가 있다. 언젠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떠남’이란 운명에 앞서, 홀로서도 제대로 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 나는 바람을 가리고 개미를 막아주는 나무가 아니라 번데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려는 나무는 아니었을까. 


 


 

첫째 아이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유치원을 다닐 땐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교를 다니는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며칠 전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꿈이 변했다고 했다. 미술학원을 다니니 미술 선생님과 화가가 되고 싶기도 하고, 수영을 배우면서는 수영 선생님이 되고 싶어 졌다고 한다. 앞으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란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아니 1년이 지난 후에 녀석의 꿈이 무엇으로 변할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어떻게 변하든 학생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는 라자크 선생님의 교실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면 좋겠다.  


 

교실은 집과 같은 곳이다. 여기서 우정을 쌓고 공부하고 예의를 배우지. 활기가 넘치고 인생을 준비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곳이다. 슬픔과 고통까지도 모두 함께 이겨나가야 해. 

-  


 

그리고 아빠인 나는 이렇게 라자르 선생님의 말을 바꾸어 실천하려 한다.  

집은 정원과 같은 곳이다. 여기서 밥을 먹고 배려를 배우며 추억을 쌓지. 웃음이 넘치고 서로를 위로하며 사랑을 나누는 곳이다. 오늘도 내일도 우린 함께 걸어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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