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고(장 피에르, 뤽 다르덴 감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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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일까? ‘연애’, ‘결혼’, ‘출산’. 이렇게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컬어 ‘3포 세대’라고 했다. 그 후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추가로 포기한 ‘5포 세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7포 세대’가 등장했고, 지금은 포기할 게 너무 많아 ‘N포 세대’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된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 너무도 흔한 일상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가능한가, 하면 또 삶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주말에 신나게 놀고 일요일 밤까지도 건강하던 아이가 월요일 아침에 갑자기 체온이 올라 39 °C를 훌쩍 넘을 때가 있다. 주로 감기이지만 몸살이나 독감을 지나 며칠간 요양이 필요한 질병일 때도 있다. 이런 일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주위에 부탁할 친척도 마땅치 않은 아내와 나, 둘 중 한 명은 아이를 간호하기 위해 출근을 포기해야 한다. 이른 시각에 직장이나 돌봄 센터에 늦은 부탁을 하고 사정하는 것이 반복되니 서로가 불편하다. 결국 아이를 직접 돌보겠단 마음으로 육아휴직을 선택하지만, 이제는 가정 경제의 한 축이 주저앉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가끔 1년 간의 휴직 후 다시 직장으로 복귀할 권리를 포기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등골이 오싹하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과거엔 ‘선택’이란 단어와 함께 ‘도전’이란 말을 떠올렸는데, 요즘은 ‘포기’라는 단어가 짝을 이룬 것 같아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가진 게 뭐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것도 없는 데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고민이 우리 사회의 현실만은 아닌 모양이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이란 형제 감독은 벨기에를 배경으로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코티아르)는 우울증으로 휴직 중이다. 복직을 앞둔 어느 금요일 오후 전화가 울린다. 직장 동료 줄리엣이다. 사장이 반장을 통해 산드라의 복직과 천 유로의 보너스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직원들에게 물었다고 했다. 결과는 천 유로의 보너스! 그런데 반장이 일부 직원에게 산드라 복직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며 선택을 강요했기에 월요일에 재투표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제 산드라에게 주어진 선택은 직장 동료를 일일이 찾아가 자신의 복직을 지지해 달라고 ‘설명하고, 부탁하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산드라가 16명의 동료를 찾아가 말하고 듣고, 오해받고 이해하고, 사과받고 좌절하는, 주말을 차분히 담아낸다. 운명의 월요일 아침 재투표를 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면서 끝난다.
시원한 액션이나 실감 나는 컴퓨터 그래픽,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대리 만족을 주는 해피 엔딩은 없다. 때로 건조하고 주로 불편하다. 가끔 외면하고 싶은 장면도 있다. 그럼에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우리의 현실이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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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vs 1,000 유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휴직 중인 동료의 복직과 1,000 유로의 보너스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결정을 할까? 더군다나 업무는 이미 대체인력인 계약직이 잘 수행하고 있고, 회사 사정은 당분간 나아질 기미가 없다. 그가 복직을 하면 누군가는 퇴직해야 한다는 소문도 흘러 다닌다. 이쯤이면 결론은 자명한 것이 아닐까?
산드라는 자신을 지지한 2명의 도움을 받아 남편과 함께 1,000 유로를 선택한 다른 14명의 동료를 찾아 나선다. 무거운 걸음으로 한 명씩 만나보니 실직한 아내와 곧 대학생이 되는 자녀로 인해 갑작스레 돈이 필요하게 된 이도 있고, 주말엔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이도 있으며, 이혼하고 새 출발을 위해 가구를 구입해야 하는 이도 있고, 1,000 유로를 1년 치 전기료와 가스비라며 보너스의 가치를 알려주는 이도 있다. 재계약을 위해 반장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이도 있고, 자신이 집에 없다고 답하라는 목소리를 인터폰으로 흘려보내 산드라의 자존감을 꾹꾹 눌러주는 이도 있다. 반면 찾아온 산드라를 보고 눈물 흘리며 미안하다고 천 유로를 선택한 것에 사과하며 이전에 산드라가 자신을 도와준 기억을 꺼내는 동료도 있다. 동료를 찾아가는 산드라는 자신의 복직이란 이유가 있고, 천 유로를 선택한 동료 또한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동료들을 만나고 그 이유 하나하나를 알아갈수록 산드라는 더욱 힘들어진다. 일자리를 구걸한다는 좌절감에서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지지하겠다는 이에게는 동정이란 느낌까지 받는다. 급기야 우울증 치료약을 통째로 먹었다가 병원에 실려가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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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 사회의 경제상황이 어렵지만, 수년 전 유난히 조선과 중공업 분야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많은 인원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대상에 신규직원까지 포함시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때 창원의 대기업에서 일하는 한 차장을 만났다. 그는 이번 인력감축에서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단지 1년간의 유예인지 씁쓸하게 자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네 살 딸아이를 둔 30대 대리가 구조조정에 포함되어 퇴직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려워진 회사 사정에 갑자기 인력감축이 추진되었고, 최근 2-3년간 인사평가가 기준으로 활용되었던 모양이다. 업무능력보다는 승진시기, 연공서열의 문화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진 평가는 승진시기가 남들보다 길게 남았던 그에게 유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팀 내 업무 평판이 좋았던 그가 퇴직의 대상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자의 육아휴직에 대해 물었다. 노조의 보호를 받는 생산직에서 딱 1명 있다고 했다. 여성의 경우도 1년을 채우는 경우가 거의 없는 실정이니, 남성에게 육아휴직은 곧 퇴사를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급여가 조금 줄어도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근무시간을 조절할 선택지는 없다고 했다. 오로지 All or Nothing 뿐이라고.
내가 처음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부서장과 인사 담당자는 물론이고 주위 동료들에게도 휴직의 필요와 당위에 대해 불쌍한 눈을 하며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아내는 뭐하냐? 1년 후에도 똑같은 문제가 있을 텐데 미리 다른 방법을 찾아봐라.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있는 거냐?” 등등 질문의 옷을 입은 화살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나의 업무는 당분간(?) 남은 동료들이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니,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함 보단 미안함이 더 했다. 다행히 휴직도 하고 1년 후 복직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부서장이 남자 육아휴직자라서 팀원으로 안 받으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뭐 이해 못 할 말도 상황도 아니지만, 마음이 참 그랬다. 규정을 따라 사용한 것을 혼자만 누린 혜택으로 보고 다른 희생을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작용한다 느낄 때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지를 갖고 살고 있을까?’하는 막다른 골목의 높은 벽과 맞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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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투표가 끝나고 산드라는 동료들과 포옹한다. 많은 이의 공감과 지지를 얻었지만, 결과는 8대 8. 과반을 넘기지 못해 산드라는 복직하지 못하게 되었다. 갑자기 사장은 짐을 챙기는 산드라와의 미팅을 요청한다. 복직과 보너스로 첨예하게 대립된 회사 분위기를 말하고는 통합을 위해 천 유로의 보너스와 산드라의 복직을 모두 실행하기로 했단다. 다만,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동료의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복직을 하는 조건이다. 즉, 계약직 동료의 재계약이 불가하다는 뜻이다. 이제 산드라가 ‘나의 일자리’와 ‘너의 일자리’ 중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녀는 어떤 결정을 했을까?
영화를 보며 기분이 좋았던 유일한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 장면이다. 산드라가 사장의 제안을 거절하며, 계약직과의 재계약 거부 또한 단순히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해고’라고 말한다. 산드라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두 아이와 함께 임대 아파트로 이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남편에게 전화한 그녀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밝았다.
“우리 잘 싸웠지? 나도 행복해”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우울증의 그림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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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와 동료들의 모습이 차분히 내 머릿속에 가라앉을 때쯤 한 인물이 조용히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다름 아닌 남편 마누(파브리지오 롱기온)다. 그는 산드라가 처음 투표 소식을 알려준 동료 줄리엣의 전화를 힘없이 끊었을 때 다시 연결해 준 사람이고, 아이들을 챙기며 아내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차로 이동하며 함께 기다리는 사람이며, 중간중간 힘들어 지칠 때마다 옆에서 응원하며 지지하는 사람이다. 화가 많고 자주 삐치는 나에겐 너무도 침착하고 이성적인 남편이다.
한 동료로부터 반장이 아팠으니까 예전만 못할 거라고 했다는 말까지 전해 듣고는 숨 막혀하는 산드라에게, 남편 마누는 “누구라도 무너져. 나도 그럴 거고. 복직해서 동료들과 몇 주만 보내면 다시 전처럼 일할 수 있어. 더 나아질 거야.” 하며 산드라의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한다. 그때 산드라는 몸서리치며 그의 손을 털어낸다.
아빠와 아들이 모두 직장 동료인 곳을 찾아갔는데,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를 두고 둘 사이 물리적인 충돌까지 일어나는 상황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은 산드라가 “너무 외로워. 여보” 하자, 남편 마누는 “해낼 거야.”라고 말한다. 남은 시간과 동료의 수를 헤아리며 좀 더 힘을 내길 바라는 남편에게 지친 산드라가 “당신이 가는 거 아니잖아.”하고 감정을 쏟아낼 때 “원한다면 같이 갈게.”하며 차분히 대응한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은 아내와 그녀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남편.
남편 마누의 모습이 놀랍다가도 사실 그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겠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겠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들은
어떤 선택지를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