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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아빠 육아
By 윤기혁 . May 19. 2017

일과 가정의 숨바꼭질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보고 (토마스 맥카시 감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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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회사로, 첫째는 학교로, 둘째는 어린이집으로, 모두 각자의 자리로 떠났다. 홀로 남은 나는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목을 빼고 앉았다. 빨래는 어제 했고, 청소는 내일 할 거다. 그러니 오늘은 이렇게 멍하기로 한다. 눈 앞으로 다가온 복직을 생각하니 싱숭생숭하다. 월요일 새벽 갑자기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학교나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상처받았을 때 모르고 지나쳐 녀석의 슬픔이 쌓이면 어떡하나 걱정하다가도, 같이 보낸 시간 덕에 아이들과 내가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보기로 한다. 정작 고민은 나다.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게 될 텐데, 낯선 업무와 동료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아등바등하겠다.  

육아와 가사에 정신줄을 빼앗긴 휴직 초기와 달리 최근엔 출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끔 생긴다. 레시피를 검색해 정성스레 만든 음식에 맛을 평하며 김을 찾거나, 땀나게 뛰어놀고 목이 따끔 할 정도로 책을 읽었는데도, 뭐가 부족한지 연신 아빠를 불러대는 녀석들을 보면 회사로 달아나고 싶다.  


 

지친 마음과 텅 빈 머리를 달래려 영화를 골랐다. 2015년 제작된 토마스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다. ‘세상을 바꾼 최강의 팀플레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띄는데,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단다.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에는 ‘스포트라이트’라는 특별취재팀이 있다. 4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신임 국장 배런(리브 슈라이버)이 제안한 의견을 수용해 보스턴 내 가톨릭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한 걸음씩 진실에 다가갈 때마다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나타난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담대하게 나아가는 기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추행 피해자들이 생과 사의 기로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고통이 신문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는 과정을 차분하게 담아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두 아이의 아빠로서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이란 사건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팀장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을 비롯해 사샤 파이퍼(레이첼 맥아담스), 마이크 레젠데스(마크 러팔로) 등 4명의 기자가 끊임없이 파고들어 취재한 후 결국 진실을 밝혀내는 모습에 ‘동료들과 합을 맞추며 일을 하던 때가 언제였더라?’ 하며 부러워했다. 집이나 도서관, 카페는 물론이고 식당, 버스정류장에서도 서류와 전화를 붙잡고 사실을 확인하며 긴 기다림을 견뎌야 했지만, 온 힘을 다해 밝혀낸 진실이 우리 사회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일이 되었으니 그 충만함이 얼마나 클까. 상상하는 내게도 짜릿함이 샘솟는다.  


 

그런 중 열혈 기자 마이크가 피해자들의 변호사인 미첼 개러비디언(스탠리 투치)과 식사하며 나눈 이야기에 잠시 멈칫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마이크에게 미첼은 “결혼은 했어요?”, “아내는 이런 생활을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묻는다. “당연히 싫어하죠!” 하며 답하는 마이크에게 미첼은 “그래서 난 결혼 안 해요.”라고 말한다.  

집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해결하려 냉장고를 열다가도 전화가 울리면 메모지를 들고 취재 모드로 전환해야 하는 마이크의 생활을 보면 아내가 그리 좋아할 것 같지 않다. 잠깐 등장하는 마이크의 집엔 아내는 물론 그녀의 흔적조차 없었다. 언제부터 없었는지,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혼할 때 서로를 아끼고 영원히 함께 하자고 다짐했던 마음이 변한 것에 마이크의 업무 특성이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신기하게도 마이크와 미첼은 모두 우리 사회의 가정이 더 안전하고 건강하도록 자신의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욱이 미첼은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고, 아이를 학대하는 것도 마을 전체의 책임이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데 그들에게선 가정이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일과 가정은 무엇이었을까?  

한쪽이 득을 보면 다른 쪽은 손해를 보는 제로섬(zero-sum) 같기도 하고,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튀어나오는 풍선 같기도 하다. 또 뱅글뱅글 자기의 꼬리를 잡기 위해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뛰 다니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단 둘이서 숨바꼭질을 해야 하는 비운의 단짝 친구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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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가정, 양자택일의 현실에서 육아휴직을 선택한 나에게 일이란 무엇일까?


 

우선, 나와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이다. 먹고 입고 잠잘 곳을 마련하려면 일정 수준의 돈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번 돈으로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으며 네 식구가 누우면 꽉 차는 방에서 함께 이불을 덮을 수 있다. ‘육아휴직을 하면 어떨까?’ 하는 고민할 때도 가장 먼저 줄어드는 수입을 어떻게 감당할지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회사를 다니면서는 야근이 잦더라도 빨리 승진할 수 있는 부서로 이동하고 싶어 한 적도 있고, 인사권을 가진 상사가 원하는 업무와 그 방향을 먼저 살피려 한 적도 있다. 직위가 높아지면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식사를 즐기며, 주위에 어깨를 으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일에 대한 사명감도 있었고 때때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여전히 나의 두 딸은 서로를 밀치기도 하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젠 아빠의 개입 없이도 화해하고 낄낄거리며 다시 놀만큼 자랐다. 이제는 출근해서 일을 통해 지속 가능한 존재감을 일구며 보람도 찾고 싶다. 물론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거쳐 상급학교로 진학할수록 다녀야 할 학원의 수가 늘어나 사교육비가 더 많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또 퇴직 후의 생계를 위한 자금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복직을 하면 이전보다 더 간절히 자리와 급여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온전히 일의 의미와 보람에 매달려보기로 한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A는 변하지 않는 조직 문화에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고, B는 이번엔 진짜라고 반복하며 지난번 모임에서도 말한 이직을 꼭 해내고야 말겠다고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능력자인 C는 높은 직급과 연봉으로의 이직을 권유받고도 지금 업무에 만족해하며, 승진 없이 같은 급여라도 현재의 일을 계속하면 좋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관리하는 능력이 부족하니 팀장이 되기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능률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효율적인 시간 활용도 가능해져 봉사활동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으니 회사도 좋고 자신도 좋다며 말이다. 경력이 쌓일수록 승진과 사직 사이에 놓이는 회사의 운영 시스템에서 그의 바람이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직장과 개인의 생활에 조화를 고민하고 일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에서 곧 그만의 독특한 대안을 찾을 것 같다.  


 

지금 내 머릿속은 일과 가정의 양립에 대한 고민으로 혼돈스럽다. 휴직을 하고 가정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지만 직장과는 단절된 시간이었다. 복직을 하면 아이들과 함께 보내며 느꼈던 기쁨과 충만함을 일에서도 함께 찾고 싶은데, 이는 과욕일까? 달라질 환경에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균형추를 어디에 어떻게 두어야 할지, 또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달라지는 돌발변수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다.    


 

스포트라이트팀이 아동 성애자 신부 50명을 확인하고 기사를 내려고 할 때, 국장 배런은 팀원들에게 전체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요청하며 말한다.


 

“(신부 50명의 아동 성추행을 보도한다면) 포터를 보도했을 때처럼 설전이 벌어지겠지. 그럼 잡음만 커지고 하나도 바뀌지 않아. 신부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집중해야 해. 관행과 정책. 교회가 혐의를 피하려고 법을 악용한 정황, 교회가 문제 신부들을 계속해서 다른 교구로 전출 보낸 정황, 상부에서 체계적으로 은폐한 정황을 찾으라는 거야.”


 

이 말을 듣고서 나는 또 엉뚱하게 일과 가정의 양립을 떠올렸다.  

내게 일과 가정은 두 그루의 나무였다. 햇볕을 잘 들게 하고 물과 거름을 챙기며 때로 이야기를 나누며 열정을 다해 돌보려 했다. 하지만 한쪽에 정성을 쏟으면 금세 시간이 흘러 어두워졌고 다른 쪽엔 물 한 번 뿌려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한다며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나무를 골라 건강하고 장대하게 키우려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포기한 쪽은 열매가 많지 않지만 잎이 무성하여 언제나 우리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스케이트 선수의 허벅지보다 큰 나뭇가지로 그네를 달고서 아이들을 신나게 해주는 나무였다.  

직장생활을 멈추고 가사와 육아를 시작하면서, 같이 땀 흘리고 소박한 밥상을 깨끗이 비운 후 까르르 웃다가 엄마 대신 아빠랑 잘 거라며 베개를 들고 다가오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새삼 ‘쉼’을 주는 나무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배런 국장의 “신부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집중해야 해.”라는 말에서 나의 삶을 이루는 일과 가정이 독립된 나무가 아니라 연리지(連理枝)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 나무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하나로 이어진 나무인데, 한쪽이 죽어가면 다른 쪽에서 영양분을 공급하여 살아나도록 돕는다고 한다. 어떤 날엔 일에만 집중하고, 또 다른 날엔 가정만 돌보았던 나는 가까스로 두 나무의 생명을 이어가긴 했지만 제대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없겠다. 아마도 얼마 더 그리 지냈다면 결국 일과 가정, 모두에서 나의 삶은 점점 빛을 잃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2012, 은행나무)>이란 책에서 ‘일의 의미’를 말했다.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신 상태에서도 안전한 출세길을 버리고 말리위 시골 마음에 먹을 물을 공급하는 일을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 (중략) ···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이라는 개념을 너무 좁혀서, 의사나 콜카타의 수녀나 과거의 거장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추앙받지 않으면서도 다수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일’을 ‘삶’이라고 읽었다. 내 삶이 의미 있다 느껴지는 건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많은 열매를 수확하여 가족, 이웃과 함께 나눌 넉넉함을, 그들이 지치고 넘어졌을 때 차 한 잔 내어주며 마음을 나눌 따뜻함을 가진 삶이라면 좋겠다.  

사람마다 하는 일은 제각기 다르고, 살아가는 가정 상황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니 일과 가정에서 개인의 선택 또한 천차만별이고, 각 개인에게서도 시기마다 둘의 가중치를 달리 하는 순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딱 정해놓고 이렇게 해야지 하는 방법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일과 가정이 서로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인식이 그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어두운 구름이 걷히는 출발점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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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영화로 본 아빠 육아
소소한 일상과 아빠육아 이야기
책 : 「육아의 온도」(s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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