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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May 16. 2017

마음이 뚱뚱한 릴리아나가 되고 싶다

책 <모모>를 읽고(미하엘 엔데 지음, 1973)

맑다. 산뜻하다. 내 기분과 상관없는 오늘 날씨가 그렇다. 외출 계획이 없던 나는 뒹굴뒹굴하다 두 딸과 함께 동네 작은 도서관에 갔다. 녀석들은 책을 보기는커녕 시원한 코코아만 경쟁적으로 들이킨다. 그리고 곧장 앞뜰로 나가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무엇인가 만든다. 아이들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서가로 향한다. 어떻게 하면 화내지 않는 아빠가 될까 하는 마음에 육아서적을 뒤적인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만났다.  


 

먼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씻긴다.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고 깨끗해진 아이들은 다시 땀 흘리며 논다. 조용히 시선을 피한 나는 <모모>를 꺼냈다.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는 첫 장의 소개 글이 눈과 마음을 끌어당긴다.  

시간을 다루는 책 <모모>는 무너진 작은 원형극장에 사는 모모, 이 꼬마 소녀를 찾아오는 이웃 마을 사람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도로 청소부 베포와 관광 안내원 기기가 등장한다. 어느 날 일상의 행복과 풍요를 누리던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회색 신사들이 나타나고, 어른들은 시간은 물론 삶 전체를 빼앗기고 살아간다. 이런 변화를 알아챈 모모가 호라 박사와 거북 카시오페이아를 만나 사람들에게 시간을 찾아준다.  


 

절반쯤 읽었을 때, 회색 신사들이 모모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아내가 묻는다.  


 

“오~<모모> 읽는구나.”

“응. 읽었어?”

“응. 예전에 엄청 유행했었잖아. 회색 신사 나오고.”

“난 처음 읽어. 근데 많은 사람이 <모모>를 읽었는데, 왜 그래?”

“응? 그러게”

“․․․․․․.”


 


 

다시 찬찬히 읽었다.  


 

첫 시작에서는 신비로운 재주를 가진 모모가 부러웠다. 아니 그 이웃들이 부러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다음으로는 도로 청소부 베포가 존경스러웠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해 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그리고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관광객을 현혹하는 안내원 기기의 유쾌함을 닮고 싶어 졌다.  


 

“부자가 되려면 모름지기 재주가 있어야지. 모모, 약간의 편안함을 얻기 위해 인생과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한 번 보렴! 아니, 난 그렇게는 안 하겠어. 커피 한 잔 값 치를 돈이 없다 해도.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를 읽으면서 돈과 명성을 좇아 보낸 나의 어제를 보았고 조심스레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이내 막막한 오늘의 벽 앞에서 ‘내게도 30분 앞을 볼 수 있는 거북 카시오페이아가 있다면 좋으련만.’ 하는 푸념으로 귀결되지만 말이다.


 

언제나 없는 거리를 지나 아무 데도 없는 집에 빨리 가고픈 모모가 거북에게 말했다.

“부탁이야, 좀 더 빨리 걸으면 안 될까?”

그러자 거북은 대답했다.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거야.”


 

이런 삶의 이치를 깨달은(?) 거북을 간절히 원하다가 술집을 운영하는 니노와 그의 뚱뚱한 아내 릴리아나가 생각났다. 어느 날 니노가 구석의 탁자 하나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앉아 있던 노인들을 내쫓는다. 이런 행동이 불만이던 아내 릴리아나에게 그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아무튼, 난 초라한 술집 주인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저 당신의 에토레 아저씨 처지를 생각해 주다가 그러고 싶진 않아. 난 뭔가를 이뤄 내고 싶다구! 그게 무슨 죄 되는 일이야? 나는 이 가게를 번창시키고 싶어! 나 혼자만을 위해 이러는 건 아냐. 당신과 우리 애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구. 그래도 날 이해하지 못하겠어. 릴리아나?”


 

모모 앞에서 이런 말을 한 니노는 변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모모에게 찾아온 그는 “노인들이 모두 다시 왔어. 술집을 번창시키는 일은 허사가 되겠지. 하지만 내 마음이 다시 편해졌어.”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 “우리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요. 니노.”

(물론 나중에는 니노는 <니노의 빠른 레스토랑>을 운영하게 되지만.........)


 

+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에도 니노의 뚱뚱한 아내 릴리아나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아이와 생활하며 종종 작고 예쁜 옷이 갖고 싶다거나, 좁은 곳을 지나며 숨을 곳을 만드는 재주에 감탄하며 부럽다고 한다. 그러면 연신 "그럼, 아빠도 작아지면 되잖아."하는 녀석 말을 들으면 뜨끔하다.


 

마흔이 된 지금 키는 커졌고 몸무게는 증가했지만, 마음은 점점 작아져 좁쌀처럼 되었다. 심지어 그 좁쌀을 차곡차곡 쌓아 높다란 벽까지 만들었다. 그랬으니 모양새는 또 얼마나 위태로웠을까.

이젠 좀 더 작아지고 싶다. 나란 경제를 넘나들며 사람들과 쉽게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그래서 경제적으로 번창하진 못하지만, 마음 편히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릴리아나의 뚱뚱한 마음을 닮고 싶다.  


 

오늘 <모모>를 읽은 나의 10년 뒤는 어떨까?

여전히 '니노의 빠른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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