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다운이 절대악이라는 편견 깨부수기
2010년대 후반, 제품 개발의 주도권이 서비스 기획자의 기능형 조직에서 Product Manager(Owner)의 목적형 조직으로 넘어오면서 PM/PO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돌던 미신이 있다. 필자는 이른바 바텀업 미신이라고 부르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객에게 먹히는 '진짜 제품'을 만드려면 제품팀이 주도권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고 경영진(혹은 높으신 분들)의 비용, 일정과 같은 제품 외 요소의 탑 다운 의사결정으로만 일하다 보니 고객의 니즈와 멀어지는 제품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진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드려면 바텀 업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
- 바텀 업 미신(필자)
대개 여기에 '우리 회사는 애자일하지 못하다'와 같은 푸념들도 덧붙여지는 것이 국룰.
오늘은 이러한 바텀 업 의사결정 문화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자.
이 글을 찾아서 들어올 정도면 대충 프로덕트의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니, 탑 다운과 바텀 업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개념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니, 간단한 개념을 잡고 가자.
탑 다운 의사결정은 말 그대로 의사결정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라고도 불리는데, 대개 현장에서는 탑다운이라 부른다. 어떠한 의사결정을 할 때 주로 경영진이나 리더급과 같은 '높은' 곳에서 의사결정을 담당하고, 개발팀(혹은 제품팀)과 같이 '낮은' 곳에서는 이 의사결정에 따른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담당하는 것이다.
경영진이나 리더급은 회사 전반의 더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으며, 제품 뿐 아니라 재무회계, 법무, 마케팅, 운영 등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관리할 수 있으므로 특정 이슈를 조금 더 거시적으로(버드 뷰 bird-view) 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때문에 좀 더 '종합적인' 판단에 따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지만, 다양한 도메인 영역들의 이슈를 종합하여 의사결정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의사결정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또한 특정 제품군의 사용자만 깊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최전선에서 제품을 담당하는 제품팀/개발팀보다 제품과 사용자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바텀 업 의사결정은 탑 다운의 정확히 반대다. 의사결정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라고도 불린다. 고객과의 최접점을 지니는 제품팀(혹은 개발팀)에서 제품에 대한 온전한 의사결정을 담당하고, 그에 대한 결과를 위주로 경영진이라 리더급과 조율한다.
장단점 역시 반대다. 제품팀(개발팀)은 매일 사용자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마주하기 때문에, 우리 제품을 고객들이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그들이 이후로 어떤 기능들을 원하는지, 어떻게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경영진보다는 훨씬 더 잘 안다. 일반적으로 제품팀(개발팀)은 개발에 필요한 모든 리소스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개발자 등), 사용자의 니즈가 있을 때 즉각적으로 이를 제품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사결정의 속도도 빠르다. 반면 '우리 제품'만 보기 때문에, 담당 제품 외 다른 부분들까지 챙겨볼 수 있는 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또한 일반적으로 제품팀(개발팀)에 속하지 않는 법무, 재무와 같은 영역들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를 챙기지 않는 이상은 이쪽의 이슈에 취약하다는 단점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PM씬에는 이상한 미신이 있다. 바텀 업 의사결정은 선이고, 탑 다운은 악이다. 바텀 업은 탑 다운에 비해 우월하며, 대부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좋음에도 바텀 업 의사결정 구조가 일반화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혹은 우리 회사)의 문화는 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며, 해외 유수의 기업들은 그렇지 않기에 바텀 업 구조를 통해 창의적이고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낸다.
일부의 과장은 있겠지만 이러한 믿음은 실재한다. 각종 PM 네트워킹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주제이며, 짧게 웹서칭만 해봐도 바텀 업이 ‘월등한’ 의사결정처럼 소개되어 있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각종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도서들 뿐 아니라, 해외 IT업계의 수많은 사람들 역시 역시 바텀 업에 대한 묘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어렵지 않다. 독자들도 아마 프로덕트를 만들다가 주변에서 필히 한 번 이상씩은 이와 같은 논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
사실 ’바텀 업 의사결정이 모든 것들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의 저편에는 탑 다운식 의사결정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숨겨져 있다. 이른바 ‘윗선’에서의 공감하기 힘든 의사결정, 무조건 실행해야 할 것만 같은 상명하복식 업무 흐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의 부서 간 책임 떠넘기기 등등.
맞다. 이들은 탑 다운 의사결정의 전형적이고 고질적인 폐해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텀 업 의사결정이 이 모든 이슈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만능 도깨비방망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 둘을 흑백 논리로 구분하는 것이다. 즉, 탑 다운과 바텀 업 의사결정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프레이밍되는 것인데,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가장 먼저 벗겨내야 한다. 이를 벗고 한 발짝 뒤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놀라울 만큼 탑 다운 의사결정과 바텀 업 의사결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회사는 탑다운으로만 일해서 짜증나"라든가, "저 회사는 바텀 업으로 팀이 주도권을 가져가지 훨씬 사용자 친화적이야"와 같은 말들이 완벽히 적용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금만 더 들어가보자.
당신은 당신의 제품에서 평소에 얼마나 많은 의사결정을 하는가? 버튼의 문구 위치, 결제하기의 문구 수정, 코드를 어떤 구조로 짤 것인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이 탑 다운으로 일어나는가? 대부분은 실무자가 현장에서 익혔던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결정이 일어난다. 승인권자가 검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초안을 만드는 것은 실무자이다. 실무자들이 현장의 고객 반응을 살펴보고, 여러 의견을 내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의 피쳐들이 만들어진다. 바텀 업이다.(물론 이런 경우까지 위에서 결정을 해주는 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명백히 마이크로 매니징의 영역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궁금한 것은 그런 사소한 의사결정의 방식이 아니었을 것이고,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 원리는 비교적 큰 의사결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탑 다운의 장단점으로 돌아가보자. 의사결정이 경직되고 느리게 보일 수 있는 것은 단점이지만, 필요한 정보를 여러 소스로부터 모으기 때문에 종합적인 뷰를 가지고 의사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다. 정보를 여러 소스로부터 모은다. 즉, 제품과 사용자에 대한 정보 역시 탑 다운 의사결정의 범위 안에서 모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품과 사용자 정보가 큰 의사결정에 제대로 녹여질 수 있도록 소싱하는 것은 바로 제품팀의 역할, 그 중에서도 PM의 역할이다. 설령 외형적으로 탑 다운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라 하더라도, 그러한 ‘탑’이 사용자와 제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품과 사용자에 대한 인사이트를 던져야 한다. 이러한 제품과 사용자 인사이트의 원천은? 사용자와 제품을 만드는 팀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이것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텀 업이다.
즉, ‘바텀 업’으로부터 발생한 제품과 사용자에 대한 인사이트가 ‘탑 다운’ 의사결정에도 잘 반영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칼로 자르듯 어느 의사결정은 탑 다운이고, 어느 의사결정은 바텀 업이라고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탑 다운 의사결정과 바텀 업 제품 인사이트가 잘 만나도록 하는 것이 PM과 제품팀의 역할이다.
너무 이상론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고, 잘 짜여진 조직 구조일 수록 이러한 환경이 잘 동작한다. 때로는 이러한 탑 다운과 바텀 업 의사결정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도록 의도적으로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이고, 대부분의 회사에서 예시는 PM이 상위 직급자와 가지는 주기적인 원온원 미팅이다. 이 원온원 미팅에서는 PM으로서 팀과 개인에 대한 헬스체크도 진행하지만, PM이 담당하는 제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올리는(바텀 업이다!) 역할도 한다. PM이 이 미팅에서 그 동안 얻었던 제품의 인사이트나, 지표 상의 변화, 특이사항 들을 잘 공유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중간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리더는 여기서 참고한 정보를 가지고 리더 레벨의 미팅에서 공유할 것이고, 공유하지는 않더라도 당신의 제품에 대한 하이 레벨 의사결정이 일어날 때 당신이 공유한 정보들이 잘 활용될 것이다. 반대도 있다. 리더와 PM이 라포를 잘 쌓아두었다면, 이 원온원 미팅에서 회사에서 현재 어떠한 중요한 일이 쿠킹되고 있는지가 PM을 통해 제품팀에 전달된다.(탑 다운이다) PM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회사 혹은 다른 부서에서 어떠한 이니셔티브들이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이것을 팀에 전파한다. 만약 내 제품팀에 예상치 못한 아젠다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 사이에 PM 혹은 리더가 컨텍스트를 제대로 공유하고 있지 못했다는 좋지 않은 시그널로 보일 수도 있다.
타운홀 미팅이나, 슬랙이나 팀즈 같은 업무 채널도 훌륭한 수단 중 하나이다. 보통 타운홀 미팅이라고 하면 ‘높으신 분들’이 회사에 대한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하는 자리 정도로 생각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듣다 보면 굉장히 중요한 회사의 전략 정보가 여기에서 공유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탑 다운이다) 제품팀은 타운홀 미팅을 통해서도 회사나 다른 부서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고, 담당 제품에 영향범위가 가는 이벤트가 있다면 미리 이에 대비할 시간과 여유를 확보할 수도 있다.또, 한가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은 타운홀 미팅이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다. 담당 제품에서 중요한 이벤트 혹은 회사의 모두가 알아야 할 만한 정보가 있다면, 제품팀이 타운홀 미팅에서 이를 전파하는데 활용할 수도 있다. 타운홀 미팅에 낄 짬이 아니라면, 리더가 이를 대신 발표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그마저도 어렵다면 슬랙이나 팀즈의 공개 채널에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방법도 좋다. 모두가 보는 곳에 게시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쑥스러울 수 있지만, 적어도 제품 관리를 담당하는 PM 입장에서는 빼서는 안될 중요한 행위다.
잘 만들어진 대시보드 역시 탑 다운과 바텀 업을 연결하는 훌륭한 도구다.대시보드의 가장 큰 장점은 의도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찾아와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제품팀 입장에서 담당 제품에 대한 중요한 지표들을 대시보드로 만들어 관리하고, 이를 공개된 채널에 게시하자. 대시보드 상 특정 날짜에 지표가 튀거나 할 때가 있다면, 채널에 공유하거나 자동으로 채널에 이벤트를 쏘도록 만들어 두는 것도 좋다. 회사의 전략 지표와 연결된 제품 지표가 있다면 이 역시 대시보드로 만들어두면, 회사 입장에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제품의 정보들을 지속적으로 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소위 ’높으신 분들‘이 실무와 동떨어진 탑 다운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은 다소 악의적인 프레이밍에 가까우며, 하이레벨에 대한 근거 없는 악마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제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제품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제품에서 발생하는 정보들을 끊임없이 소싱하여 전달해야 하며, 그러한 접점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면 그 접점을 구축하는 것 자체도 PM의 역할 중 하나이다.(이를 상방 alignment라 한다)
회사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고, 의사결정의 단계도 한 손으로 셀 수 없는 수준이 된다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액션만 담당해야 하는 경우 역시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까지 갔을 때의 의사결정은 대부분 전략 레벨의 의사결정이거나, 전사 차원의 빅 이니셔티브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의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위에서 언급했듯 탑 다운과 바텀 업 정보가 융합된 의사결정이다. 설령 탑 다운처럼 보이는 경우일지라도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탑 다운의 판단력과 바텀 업의 인사이트가 더 잘 만날 수록 더 좋은 의사결정이 내려질 가능성도 크게 높아진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과 접점을 구축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PM의 역할일 것이다. 상하방 alignment도 PM의 핵심 업무 및 역량에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이번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