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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한 May 21. 2024

#13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진흙탕 싸움을 기대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13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진흙탕 싸움을 기대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 사상검증, 좌파, 우파, 페미, 금수저, 흙수저.. 온갖 자극적인 워딩이 난무하는 화면 속에서 진흙탕 싸움을 기대하셨다면, 여러분의 기대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재미는 이와 다른 결에서 보장되어있으니 강력 추천합니다.  진흙탕


 싸움을 기대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 웨이브


좌파vs우파, 페미니즘vs이퀄리즘('이퀄리즘'이라는 용어는 현재 젠더 학계에서 연구/학술 자료 근거가 전무한 용어로 방송에서 사용되어 논란이 있었다. 이에 동의하는 바, 이하 글에서는 '안티 페미니즘'이라 칭한다.), 서민vs부유, 개방vs전통. 이념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의 참가자들은 '커뮤니티 하우스'에 입주하기 전에 사상검증 테스트를 하고 (마치 MBTI처럼) 위의 4가지 척도에서 사상검증코드를 부여받는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 규칙이 상대방의 사상검증코드를 추측해 상대방을 떨어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놓고 봤을 때, 이 얼마나 진흙탕 싸움이 일어나기 쉬운 세팅인가! 카메라 앞에서 서로의 이념을 비난할 수도 있고, 서로를 혐오하는 집단이 생길 수도 있고,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작당모의를 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시청자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반응과 분란이 생기기 딱 좋은 세팅이니 말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이런 추측들을 비웃듯 매우 세련되고 의미있는 방향으로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상금을 분배하고, 작은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물론 그때그때 누군가 상처를 받거나, 실망하거나,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 프로그램은 이념 갈등으로 얼룩져가는 한국 현대 사회에서 피어난, 성공적이고 희망적인 사회실험이었다는 평을 받았고, 최근에는 종영 이후 웰메이드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역주행 기록을 얻게 되었다.



https://youtu.be/9lCJUcxrJb0?si=TZJIrsq1NY9U3F1G

(위 영상은 프로그램의 역주행을 기념해 몇몇 참가자들끼리 회식한 영상이다. 프로그램을 전부 보고 봐야 재미가 있으니 미리 시청할 필요는 없고 이 프로그램을 전부 봤는데 여운이 끝나지 않았을 경우 그때서야 한번 쓰윽 볼 것을 추천한다.)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는 앞서 언급했듯 정치, 젠더, 계급, 사회윤리 4가지 영역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12명의 젊은 남녀가 9일 동안 리더를 선발하고 상금을 분배하는 정치 서바이벌 사회실험 프로그램이다. 서로를 처음 보게 된 12명의 참가자들은 서로를 알아가고 친해지며 함께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이런 평화도 잠시. 그들이 같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각종 미션에 열정을 보이고 있거나 차를 내려마시는 도중, 갑작스럽게 벨이 울리는 순간들이 많은데, 그때마다 메인 홀의 화면에서는 누군가에겐 충격적일 수 있는 멘트가 등장하곤 한다.



ⓒ 웨이브


해당 멘트에 동의한 사람은 00명입니다. - 하는 소리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극단적인 멘트에 동의한 사람이 방금 같이 웃으며 이야기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기분은 기묘해진다. 경계심이 한껏 누그러지다가도 그 순간만큼은 다시 서로에 대한 경계태세 모드가 되지 않았을까?


한편, '커뮤니티 하우스'에는 매일 리더를 뽑고, 새로운 결제활동 미션이 주어지며, 미션을 통해 거둔 상금이 분배되고, 호감도를 표시하고, 밤에는 익명 토론채팅이 열린다. 호감도, 리더 선정을 포함한 '커뮤니티 하우스' 내 규칙, 매일 생기는 각종 미션들, 불순분자 혹은 기자의 역할, 탈락 조건 등이 아주 디테일하게 설정되어있다. 가령 리더가 맞닥뜨리게 되는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들도 전부 앞서 언급한 4가지 영역의 이념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 리더인 지니는 하우스의 총 자금에서 자의적으로 본인의 돈을 선택해 가져가는 거주자들의 순서를 정하고, 공금을 어떻게 걷어야할지를 정해야했다. 이후에도 경제활동에참여할 멤버들을 결정하는 등 다양한 선택들을 맡는다. 이때 결정 기준은 리더마다 달랐다. 제작진들이 이를 설계하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감도 안 온다. 정말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 웨이브


제작진뿐만 아니라 큰 공을 세운 캐릭터들도 참 많았다. 특히 인상깊었던 참가자들은 벤자민, 테드, 슈퍼맨, 백곰, 하마였는데, 이들은 진심으로 이 프로그램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에 얼마나 진지한지, 어떻게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불순분자였던 벤자민은 조금 다른 결이다. 불순분자로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벤자민이 아니었으면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까지 재밌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 속 벤자민을 비유하자면... 이야기 속 꼭 등장해야하는 '갈등'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이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는 결국엔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사상코드만 놓고 보면 이 사람들의 가치관은 극과 극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조금 더 건강하기를, 조금 더 나아지기를, 그 세상 속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만큼음 그들의 신념은 같지 않았을까. 이를 위해 그들이 지금까지 힘껏 달려오며 쌓아온 소신과 지혜를 엿보면서 나는 그들을 그대로 존중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세상 속에서 이런 리더상이 많아지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생기고 말이다.



ⓒ 웨이브

https://youtu.be/DmW5jT3UkY4?si=_JVezmfQKjLgaMYB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슈퍼맨과 백곰의 토론이었다. 각각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에 속한 젊은 정치인들의 토론이 이렇게 재밌고 논리적일 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 편견을 와장창 깨부서준 장면이었다. 사상검증테스트를 받았을 때, 나는 좌파 1점이었다. 그러나 토론을 보고 있자니 슈퍼맨 의견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백곰의 의견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의견이 견고하고 건강하게 개진되어 두 사람 모두에게 설득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당에 속해있든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샘솟았다. 



ⓒ 웨이브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 중 하나는 빈곤에 대한 하마의 글이었다. 이 글은 '커뮤니티 하우스' 안팎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움직인 글이었다. 그만큼 이슈가 많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어느 사안에 대해 열을 올려 토론할 때마다 탁상공론이 될 것을 항상 우려하며 더 귀기울이고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논리를 두고 토론하는 것 이상으로, 누군가에게는 생존과 직결되어있을 수도 있는 그 모든 사안들에 쉽게 접근할 것을 지양하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작품을 쓰리라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도 개인적으로 경각심을 갖게 된 에피소드였다. 어떤 이야기를 표현하거나 주장하기에 앞서, 최소한 그 이야기 속에 마음 다해 다가가야한다는 것이다. 그게 그 이야기의 실제 경험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걸 배웠다.



ⓒ 웨이브


한편, 이 프로그램 참가자들 중 내 최애를 꼽자면 바로 테드였다. '굉장히 똑똑하지만 선한 사람'이 '커뮤니티 하우스' 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테드라는 사람이었는데, 이에 나도 동의했다. 이 프로그램 속 토론이 세련되고 건강할 수 있었던 게 슈퍼맨과 백곰의 공이 컸다면, 이 프로그램 속 서바이벌이 혐오 혹은 분란을 일으키기보다 작은 사회를 현명하게 꾸려가는 것으로 방향이 흘러가게 만든 건 테드의 공이 컸다. 어떻게 하면 다같이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공정하고 안전하게 이 사회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를 매일 고민하던 테드였다. 하우스 내 미션과 규칙들의 틈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그는 정말 천재같았다.



ⓒ 웨이브


벤자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벤자민은 이 프로그램의 재미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불순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벤자민은 아마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닐까? 대원외고-서울대 경영-서울대 로스쿨, 대한민국 토박이 문과 엘리트인 이 사람이 안경을 벗어던지고 어눌하게 말하는 교포를 연기하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너무 웃겨죽겠는데, 벤자민의 프로그램 내 활약을 보면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찐 교포 마이클과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 뒤에 찐 벤자민의 인터뷰 씬이 교차될 때마다 너무 웃겼다. 하지만 벤자민의 영어 실력은 상당하다. 찾아보니 대원외고 출신에, 영문학과를 복전했다고.. 갓생이다 정말.)


언급한 멤버들뿐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을 전부 아끼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매력은 ‘커뮤니티 하우스’에 입주해 생활하면서 참가자들이 자신의 사상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상황과 미션에 따라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서 왔다. 물론 각자의 신념에 따라 서로가 모이는 경우도 많았지만, 서로의 코드를 사전에 알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결속도 생겼고, 자신과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의 의견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고, 우리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립에 조금은 희망의 실마리가 있다고 믿게 해준 지점이기도 했다. 그래 이곳은 그냥.. 사람사는 곳이지 하고 말이다.


내가 이 하우스에 들어갔다면 어떤 사람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 고민은 ‘커뮤니티 하우스’라는 작은 사회가 아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큰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고민이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얼마나 진지한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어느 정도의 신념을 갖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의 제목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1화만 보고 결정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진흙탕 싸움을 기대하셨나요? 그렇다면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대해, 우리 사회에 진지한 사람들의 건전하고 세련된 토론에 목말라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당장 시작해보십시오.




※ 사상검증테스트 링크 (정주행을 시작하시기 전에 확인해보시면 더 재밌게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the-community-survey.web.app/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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