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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글 Sep 13. 2024

한 걸음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명대사

 “작은 파동에도 베이고 상처 나고 사람은 그렇게 나약하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크게 심호흡을 해 보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뭔가 큰 일이 난 것 같다. 내 심장 소리가 귀로 들리고 모든 내 신체리듬이 증폭되어 쾅쾅거린다. 그러니 정신이 몹시 소란스럽다. 어떨 땐 심장에 달린 고무줄을 누가 튕기는 것처럼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증상이다. 심장내과에 가서 기계를 달고 아무리 검사해 봐도 부정맥이 있긴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아픈 건 심장병이 아니라고 한다. 화병이란다. 이런. 약도 없다는 정신병 아닌가.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나는 마음이 여렸다. 말싸움을 하면 잠도 못 자고 화해할 방법을 강구했으며, 가족 내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감정의 쓰레기통을 자처했다. 분명 같은 한국말을 쓰지만 이해되지 못해 떠도는 단어들을 굳이 해석해주며 집안의 평화를 지키고자 애썼다.


성인이 된 오빠에게 아빠가 정해둔 밤 12시 통금은 무척이나 가혹해서 오빠는 매일 보란 듯이 12시를 넘겨 귀가했고, 나는 결혼 전까지 매일 밤 시계바늘을 돌렸다. 아빠가 자다 일어나면 집 시계는 늘 12시전이었다. 오빠가 오면 나는 온 집안의 시계를 다시 돌려놓고 잠에 들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참 다행이.

나는 시계를 돌리는 아이였다.

     

그러니 내 가슴은 밤이 되면 늘 두근두근 거렸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았다. 싸우면 어떻고 분란이 일어나면 어떤가. 그런 대담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옛날에는 이런 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마음의 감기처럼 따뜻한 용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계를 돌리던 내가 생각나 안타까웠고, 병동에 입원한 모든 환자들이 불쌍하고 애틋했다. 정말 착한 사람만 그 곳에 모여 있다는 말에도 동감했다. 병명 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그 곳은 다른 이에게 감정의 칼날을 겨눌 수 없기에 자신을 베는 사람들이 상처받은 채 모인 곳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제목처럼 희망찬 드라마는 아니다. 정신병동은 환자들의 특징상 자해가 흔하게 이루어지기에 도구가 될 수 있는 커튼이 달려있지 않아 가장 먼저 아침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드라마는 환자들을 잘 보살피고 싶은 마음이 커서 도리어 민폐간호사가 된 주인공 정다은이 정신건강의학과로 옮겨진 후 병동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시리고 아픈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좌절과 상실을 겪으며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했던 다은이 다시 희망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마도 미움 받을 용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 시선에 맞춰 내 영혼에 칼을 들이댄다. 그래서 우린 늘 끊임없이 아프고 불행하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 책들을 뒤적여본다. ‘미움 받을 용기책은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자기 수용을 제시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변할 수 없는 나와 변할 수 있는 나를 구분하여 변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영철 박사가 쓴 그냥 살자책에서는 포기와 수용을 분리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에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은 인정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것이 능동적 포기, 즉 수용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수용이 가장 어려운 분야가 바로 시험, 직장, , 입시, 공모전처럼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를 배우던 시절, 교육원 학생들이 가장 궁금해 했던 건 자신이 과연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을까?’였다. 선생님의 시선과 평가에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드라마 한 편을 합평받기까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과연 이 길을 가는 게 맞나 수도 없이 고민하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동기들을 보았다. 동기들의 한 마디가 뭐라고, 선생님의 평가 한 마디가 무어 그리 절대적이라고 그렇게들 힘들어했을까. 수업시간 평가가 최고가 아니었어도 단막극으로 단숨에 입봉 한 친구도 있었고, 선생님이 최고라 평가했던 학생이 1년도 안 되어 그만둔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작가적 소양이 있는지 없는지 한 눈에 보여도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작가가 된다는 말과 동급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드라마 작가로 입봉 하는 과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과 운이 작용하며, 무엇보다 끈기가 필요하다.

     

그 당시 나도 그랬지만 교육원 학생들에게 기초반, 연수반, 전문반, 창작반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평가과정은 마치 드라마 작가가 되는 직행버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교육원을 어느 과정에서 졸업하건 그 뒤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계속 공모전에 응모를 하든지, 능력껏 유명작가의 보조 작가 생활을 하든지, 운이 좋으면 제작사와 계약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과정도 드라마 입봉을 장담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늪에 빠지는 것 같애. 아까워서 더하고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하고. 그러다 어정쩡해져 버리는 거야. 계속 이 길을 가자니 붙을 거라는 확신도 없고. 포기하자니 그 동안 했던 게 아깝고. 조금만 더 하면 붙을 수 있지 않을까 싶고.“

     

서완은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인해 스펙이 필요 없는 공무원 시험에 계속 도전했다. 몇 년째 아깝게 시험에 떨어져 공시생 생활이 길어지자 서완은 게임에 빠지게 되고 그만 게임 속 세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장애 환자가 되고 만다. 서완은 다은을 중재자님이라 부르며 유달리 따랐지만, 병세가 나아져 현실로 돌아갔을 때는 계속되는 차가운 현실을 느끼고 그만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만다.

컴컴한 고시원 벽에 남긴 미안해요라고 쓰인 포스트잇. 그 곳에 드리운 빛 한 줌은 서완이 남긴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걸려온 서완의 전화를 받았던 다은은 그를 잡아줄 수 없었다는 죄책감에 현실을 부정하고 해리성 기억상실을 동반한 심한 우울증을 겪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은의 자살시도는 결국 정신병동의 보호입원으로 이어진다.

     

서완은 친구들에게 시험공부의 늪에 빠지는 걸 경고하며 , 510년 노력한 걸 누가 알아줘. 노력도 결국 붙어야 인정을 해주는 거야. 안 붙으면 우린 다른 사람들 눈에 노력 덜 한 사람들밖에 안 돼. 그니까 너넨 나처럼 되지 말라고.”라는 말을 남겼다. 어느 분야에나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매진중인 동기들 생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드라마 작가로서의 소양을 잘 갖추고 창작반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이 분야가 더 늪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구성도 잘 짜고, 말맛도 잘 내며, 대사를 입에 착착 붙게 잘 쓴다. 심지어 가슴 찡한 스토리도 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몇 년씩 계약하고도 중도 해지가 되거나 이 분야를 떠난다. 공평하지 않은 기회, 자본이 사라져서 얼어붙은 드라마 판, 그래서 검증된 작가만 쓰려는 기조가 더해져서 입봉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친구들이 공황장애나 불안장애, 혹은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들은 능력이 출중하다. 그러므로 계속 매진하든 혹은 다른 분야로 전직을 하던 간에 글을 잘 쓸 사람들이다. 드라마를 고집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그들의 선택이다. 단지 스스로를 미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최선을 다해 달려온 몇 년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 끈기와 근성이 꼭 어느 분야에서든 꽃을 피우리라 믿는다. 마음이 아플 때는 마음에 연고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이고 그렇게 쉬어가는 거다. 일단 반창고를 붙이기 전에 상처에 호오하고 숨결을 불어줄 사람이 옆에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다. 아프다고, 도와달라고, 옆에 있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 나만의 안전장치를 찾는 것. 답답한 일상에서 숨 쉴 구멍 하나를 찾는 것“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고 건강할 것 같은 남편이 불안장애 증상을 보였다. 방에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누워서 자려고 해도 마찬가지이고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 좀 덜하다고 했다. 나에게 얘기해줘서 고마웠다. 자존심도 세고 아픈 적도 없는 사람이라 털어놓기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서 도리어 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가까운 병원을 보냈고, 가고 싶은 곳을 가도록 했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했다. 병원에서는 조금 더 심해지면 공황장애라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서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기 시작했다. 그게 약속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저 옆에 있어준 것 밖에 없지만 남편은 잘 극복해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건강하게 잘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 여전히 답답한 방에서 자는 건 좀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산책을 하고 운동을 나가며 잘 극복하고 있다.

     

운전할 때나 놀이기구를 탈 때, 위험도가 있는 스포츠를 시도할 때 우리는 안전벨트를 맨다. 안전벨트는 하나보다 두 개가, 그리고 더 튼튼하고 많을수록 든든하다. 손에 땀이 차고 불안할 때 우리는 옆 사람의 손을 잡는다. 함께 있어달라고 말할 때 다시 숨이 쉬어진다.

     

     

“정신병은 관리의 병이래요. 하루 이틀이 아닌 장기전으로 봐야 한다고, 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다 얘기해 줘요. 저는 다은 씨가 혼자 비 맞을 때 우산 씌워 주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비 맞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실 중증의 우울증 환자에게 힘내라’, ‘극복해라는 조언은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울증에 걸린 다은을 돕는 방법을 묻는 유찬에게 황쌤이 조언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현관에 나가 운동화를 신을 기운이 없어. 먹고 자고 씻고 그런 기본적인 것들까지 하기 힘들고.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사람한테 숟가락을 들라고 하면 폭력이겠지?”


생각해 보면 내가 드라마를 접고 떠난 것도 몸과 마음이 지쳐 건강을 잃은 후였다. 면역은 날뛰었고 관절은 누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굳어갔다. 강직성 척추염을 진단받고 면역억제제를 투여하면서 조금씩 나아졌지만 허리가 아파도, 걷기가 힘들어도, 사실 나는 정말 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아플 용기도 없었고 내가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던 내 옆에서, 그 때 그저 같이 아픈 이야기 들어주고 손 잡아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마음으로 똑같이 응원한다. 여전히 드라마를 쓰고 싶은 동기들, 아직도 실력이 현역인 작가 선생님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싶은 나 자신까지.


“우리는 모두 낮과 밤을 오가며 산다.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경계인들이다”

     

친정아빠는 수면 공포증이 있, 나는 종종 가슴이 아프다.  친한 동네 이웃들도 우울증 약을 먹고 공황장애를 앓고 있. 집을 팔고 집값이 올라서, 부모님과 불화가 생겨서, 자식이 애먹여서, 여러 이유로 마음의 병이 와서 상담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만한 유명한 외과 의사선생님도 불안장애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사는 게 녹록치 않다. 불안하다. 그렇지만 앞서 화병을 약도 없는 정신병이라고 했던 말은 취소한다. 무지했다. 화병도 치료받아야 한다. , 병원을 찾아가서 만나는 의사선생님도, 마주앉은 우리들도, 사실 모두가 어딘가는 아프다는 걸 받아들이면 치료는 더 쉬워질 것 같다.

     

정신병원의 문턱을 넘는 데에는 두려움이 가장 큰 장애요소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 모두 다 저는 이런 병이 있습니다.’라는 명찰이라도 가슴에 달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밝음과 어두움을 함께 간직한 사람들임을 알고 그래서 밝음 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글 쓰는 일이 바로 그 한 걸음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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