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니면 돼"의 윤리적 딜레마
예전 어느 유명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벌칙을 피하기 위해 다급하게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이 짧고 강렬한 외침은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주었다. 누군가 불행을 겪는 상황에서 나만 쏙 빠져나가는 그 얄미운 안도감은, 사실 우리 내면에 숨겨진 가장 원초적인 자기 보호 본능을 통쾌하게 건드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예능이라는 가상적이고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타인의 가벼운 불운은 '샤덴프로이데', 즉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은밀한 기쁨으로 유쾌하게 소비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호가 텔레비전 화면을 벗어나 우리의 일상, 직장,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사회 관계망 속으로 들어온다면 장르는 순식간에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뀐다.
"나에게만 좋은 것이 과연 진정으로 좋은 것일까."
"나에게만 유독 친절하고 식당 종업원에게는 무례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의 즉각적인 이익과 타인의 손실이 교차하는 아슬아슬한 지점에 서게 된다. 이때 "나만 아니면 돼"라는 사고방식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무척 영리한 생존 전략처럼 보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자신을 철저히 파멸로 이끄는 가장 비논리적인 선택이지 않을까.
이러한 현상의 기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인 생존과 사회적인 생존의 차이를 명확히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육체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안락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고대 동양의 철학자 순자는 이를 성악설이라는 개념으로 날카롭게 통찰했다. 인간의 본성은 이익을 좋아하고 타인을 질투하는 이기적인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철학이 시대를 초월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을 비관하고 체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위(僞)'라는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설파했기 때문이다. 교육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원초적 이기심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이타적인 방향으로 다듬어가는 뼈를 깎는 과정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성숙한 어른의 궤도에 오를 수 없다. 심리학자 로렌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에 비추어 보아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처벌을 피하거나 즉각적인 개인의 보상만을 좇는 전인습적 단계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은, 주민등록증을 가진 신체적 어른일지 몰라도 도덕적,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갇힌 미성숙한 어린아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어떻게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이 딛고 있는 아주 작은 톱니바퀴 하나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하지만 시스템 전체가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릴 때, 그 어떤 개별 톱니바퀴도 홀로 온전하게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구체적인 현대 과학과 최신 기술의 사례를 통해 들여다보면 문제의 본질은 더욱 선명해진다. 최근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거대 언어 모델의 발전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며 두려워하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정렬 문제(Alignment Problem)'다. 인공지능에게 특정한 목표 하나만을 극대화하도록 학습시키면, 그 인공지능은 자신에게 부여된 좁은 의미의 목표, 즉 자신 시스템에게만 최적화된 좋은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주변 환경을 무참히 파괴하거나 인간의 윤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극단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전체 시스템의 거시적인 목적과 인공지능 개체의 미시적인 목적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이 치명적인 오류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의 우울한 단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최적화하려는 근시안적인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결코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없다.
앞선 글을 통해서, 거대 언어 모델의 근간이 되는 '어텐션(Attention)'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면 이 비유는 더욱 깊어진다. 이 혁신적인 기술의 핵심은 문장 내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가 서로 얼마나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는지 가중치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문맥 전체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만약 인공지능이 오직 바로 옆에 있는 단어, 즉 지극히 좁고 제한된 문맥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결코 인간처럼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사회적 생존 방식도 이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동일하다. 우리의 뇌와 마음이 오직 '나'라는 가장 가깝고 유혹적인 단어 하나에만 매몰되어 주변 이웃, 동료, 사회라는 거대한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결국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오류 투성이의 문장처럼 처참하게 망가지고 만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은 사회라는 거대한 텍스트 속에서 문맥을 잃어버린 채 홀로 고립된 단어가 되겠다는 자기 파괴적인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사회는 함께 살아가야 하고 돕고 돕는 이타적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이를 경제학과 투자 이론의 관점으로 치환해 보아도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동일하다.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에서 가장 경계하고 금기시하는 것은 모든 자산을 하나의 바구니에 담는 행위, 즉 국소적인 최적화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오직 현재 시점에서 가장 수익률이 좋아 보이는 단일 종목, 즉 '나의 즉각적인 이익'에만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은 시스템 전반의 붕괴 위험을 방어하지 못하는 극도의 취약성을 내포하게 된다. 진정으로 훌륭하고 지혜로운 투자 전략은 다양한 자산군에 폭넓게 분산 투자하여 시장 전체의 충격을 유연하게 흡수하고 장기적인 우상향을 도모하는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언급하기로 한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망 역시 거대하고 복잡한 포트폴리오와 같다. 타인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이타적인 행동, 당장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조직의 룰과 윤리를 지키는 행위, 누군가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은 단기적인 장부상으로는 내 자원의 심각한 손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전체의 신뢰도를 탄탄하게 높여, 결국 내가 속해 있는 생태계 자체가 붕괴해 버리는 이른바 '체계적 위험'을 방어하는 가장 확실하고 수익률 높은 분산 투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에 투자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즉각적인 이익과 안위만 탐하는 이기주의자는, 결국 단 한 번의 불가피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안전망 없이 파산해 버리는 탐욕스러운 투기꾼의 말로를 걷게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진화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이 주창한 포괄 적합도 이론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이 왜 자신의 친족에게 그토록 헌신적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지를 냉철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 유전자를 일정 부분 공유하는 친족의 생존을 돕는 것은, 결국 나의 희생을 딛고서라도 내 유전자의 생존 확률을 전체적으로 높이려는 유전자의 이기적이고 치밀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대 사회의 인간은 유전자를 단 한 방울도 공유하지 않는 완벽한 타인과도 촘촘하고 복잡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이는 현대 인간에게 생존의 의미가 단순히 맹수로부터 도망쳐 육체적 생명을 연명하는 1차원적인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생존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쓸모를 증명하고, 타인으로부터 가치와 평판을 인정받아 커뮤니티 내에 머무르는 '사회적 생존'으로 고도화되었다.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이라는 현대판 부족 사회를 떠올려 보자. 동료가 겪는 업무적 어려움을 철저히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의 고과와 성과만을 챙기는 "나만 아니면 돼"형 인간은 단기적인 분기 평가에서는 승진이나 포상을 쟁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긴 호흡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는 동료들의 신뢰라는 그 어떤 스펙보다 중요한 '사회적 자본'을 영영 잃게 된다. 평판과 신뢰를 잃은 개인은 중요한 의사결정과 정보 네트워크에서 서서히 소외되고, 치명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구의 자발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며, 결국 조직이라는 냉혹한 생태계에서 쓸쓸히 도태되고 만다.
뇌과학 연구 결과들 역시 이러한 사회적 생존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명확한 데이터로 뒷받침한다. 우리가 이타심을 발휘하여 타인을 돕고 협력하는 순간, 우리 뇌의 보상 회로에서는 쾌락을 유발하는 도파민과 결속력을 높이는 옥시토신이 다량으로 분비된다. 이른바 '헬퍼스 하이'로 불리는 이 현상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타적 행동이 고상한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단순한 윤리적 당위나 억압이 아니라, 연약한 인류가 가혹한 대자연 속에서 오랜 세월 생존하기 위해 뇌에 깊숙이 진화시켜 온 가장 강력하고 필수적인 생물학적 생존 기제라는 사실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눈물 흘리게 만드는 거울 뉴런의 존재 또한, 인류가 애초에 서로를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하도록 설계되었음을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오직 나에게만 좋은 것은 결코 나에게조차 좋은 것이 아니다. 타인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고통을 교묘하게 담보로 하여 얻어낸 얄팍하고 이기적인 이익은, 언젠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무거운 청구서가 되어 내 앞에 돌아오는 악성 부채에 불과하다. 철저한 이기주의는 생존을 위해 과거의 인류가 사용했던 가장 원시적이고 하등 한 알고리즘이다. 반면 이타주의야말로 복잡계의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적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고도화되고 지능적이며 세련된 생존 전략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다움, 즉 성숙함이란 단지 시간이 흘러 물리적인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지는 현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책임지고 지켜내야 할 '나'의 경계와 범위를 물리적인 피부 안쪽에서부터 시작하여, 기꺼이 타인과 공동체, 그리고 함께 발 딛고 살아가는 사회 전체의 영역으로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용기 있는 과정일 것이다.
몸만 훌쩍 커버린 미성숙한 어른들의 근시안적인 이기심과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무책임한 회피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서서히 멍들게 할지도 모른다. 사소해 보이는 선택과 행동 하나가 공동체가 쌓아 올린 신뢰 자본에 과연 어떤 파장을 미치는지 집요하게 성찰해야만 한다. 치열한 일상의 작은 순간들 속에서, 복잡한 문제를 외면하고 누군가에게 슬그머니 책임을 전가하며 달콤하게 안도하고 싶은 유혹이 짙게 밀려올 때마다 잠시 멈추어 서서 스스로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져보자.
"나의 이타심은 오늘, 무사히 안녕한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