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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 Oct 09. 2020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고 싶은 가족 이야기

심리상담자의 마음책방#5 김혜진 '딸에 대하여'

가깝고도 먼 부모와 자식 관계


“엄마는 저를 이해 못해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어요.”

“딸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자녀에게 절대 상처주지 않는 완벽한 부모만 있다면, 부모 말만 듣는 착한 자식만 있다면 아마 대부분 상담실은 문을 닫아야 할 거예요. 그만큼 상담실에는 가족이 준 좌절과 결핍, 갈등 때문에 고통 받는 부모와 자식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데요.


부모와 자식은 천륜으로 맺어진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데 이렇게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뭘까요? 왜 밖에 나와서는 더 없이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면서 부모님과 통화할 때는 그렇게 쌀쌀 맞을 수가 없고, 남의 자식이면 허허실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일도 내 자식에게는 한사코 역정을 내게 될까요?


여기 김혜진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 에도 서로 가까이하기에는 먼 모녀가 나옵니다. 오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며 비단 부모-자식뿐만 아니라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과 이해를 가능하게 할까를 생각해보려 해요.






사랑하니까 이해 못해


딸은 동성애자입니다. 엄마는 동성애는 필연이 아닌 선택의 문제라 여겨요. 왜 딸이 보장된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한다는 건 딸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구요. 그래서 딸을 다시 바르게 인도하는 게 딸을 위한 행복의 길이라 굳게 믿고 오늘도 일갈합니다.


“힘들게 키운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어.”


엄마는 요양보호사입니다. 남편도 없이 하나뿐인 외동딸에게 기대와 욕심, 가능성과 희망을 걸며 자신을 버리고 또 버리가며 키웠지요. 딸도 그런 엄마의 헌신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엄마가 갑갑하고 자신에게는 엄마가 생각하는 행복이 아닌 다른 행복이 있다는 걸 이해 못하는 엄마가 버거워요.


“엄마, 이게 나야. 그냥 있는 그대로 그러려니 봐 주면 안 되는 거야?”


갈등의 주제는 다르더라도 우리네 부모-자식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서로 할퀴고 상처를 줘 가면서도 기를 쓰고 소중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있나봅니다. 어쩌면 그것도 사랑이겠지요. 사람은 절대 애정이 없는 대상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사랑하기에 너덜너덜해지더라도 회피보다는 투쟁을 선택하기도 하니까요.





연민이라는 마음, 이해와 소통의 열쇠


소설 속에서 모녀는 내내 둘 사이에 단단한 선을 그어놓고 있지만, 단 한 번 엄마가 선을 넘어 딸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계기가 생기는데요. 그건 딸의 시위 현장을 목격하면서입니다.


딸은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동료 강사들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당하는 일을 겪게 돼요. 그래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학교 측에 해고 철회를 주장하는 시위를 주도하게 되는데요. 엄마는 왜 딸이 남의 일에 끼어들어 고초를 겪는지 이번에도 이해되지 않아요. 하지만 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로 가게 되면서 비가 쏟아지고 학교 측 옹호자, 반대자, 경찰 등이 뒤엉켜 사람들이 여기저기 치이고 쓰러지는 혼돈의 시위 현장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리고는 깨닫게 돼요.


내가 그러하듯이, 남들이 그러하듯이 딸 또한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의 한 가운데 살아 있구나, 라고. 엄마가 엄마의 삶을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딸에게는 딸의 삶이 있으며, 온갖 적의와 혐오, 멸시와 폭력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내려 애쓰는 중이라는 걸요. 그래서 처음으로 딸이 정말로 원하는 그 삶이 뭘까, 궁금해지기 시작해요. 질문하고 또 질문하더라도 알아야겠다는 절절함과 함께.


작은 폭이었지만 엄마의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 어떤 논리적인 설득이나 지적인 성찰이 아니라 딸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연대감, 삶의 모습은 다를지라도 딸도 나만큼이나 간절히 바라는 삶이 있으며 현실의 괴로움과 불만족에 저항하는 안쓰러운 존재라는 연민의 마음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서로를 가엾이 여길 수 있다면, 즉 차이가 아닌 작지만 분명한 서로 간의 연결감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한 연민을 깨울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상대방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혹은 때로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가 너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어, 라는 의지를 전달하는 걸로도 위안이 되기도 할테지요. 이해와 소통은 그런 순간들로 만들어진다고 믿습니다.





해피엔딩은 없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결국 서로가 극적으로 부둥켜안으며 서로를 이해했다, 같은 드라마틱한 전개로 이어지지는 않는데요. 오히려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으며 여전히 서로를 버티고 감당해야 하는 지난한 일상을 예고하며 끝이 나는데, 그래서 더 좋았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는 원래 그런 거니까요. 엄마를 이해했다 싶으면 또 다시 불쑥 화가 나고, 자식과 말이 잘 통한다 싶으면 잊지 않고 부모 속을 뒤짚어 놓는 게 인생사 아니던가요. 완전한 소통이란 것도, 완전한 단절이란 것도 현실에서는 없지요. 특히나 인위적으로 끊어내기 힘든 가족관계는 더욱 그렇구요. 그저 고무줄처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모습을 바꿔가며 관계는 계속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때문에 해피엔딩이 아닌 이 이야기가 마냥 찝찝하지만은 않네요. 중요한 건 갈등으로 인해 둘 사이의 긴장감이 얼마나 팽팽해지는지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겪더라도 끈을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으려는 양 끝에 선 두 사람의 결심이라고, 지금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관계는 차곡차곡 영글어갈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요.


지금 여러분도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이나 연인, 친구나 동료 등이 있으신가요? '딸에 대하여'의 모녀처럼, 상대를 향한 연민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소통이란 결과가 아닌 그 과정에서 노력하는데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한발짝씩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보시기를 응원할께요.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라는 말은 결국 “너를 이해하고 싶어” 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테니까요.





* 글은 

<5명의 상담전문가가 함께 하는 심리학 파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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