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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읍내 도서관, 책으로 만난 또 다른 세상

by 어스름빛

문 안의 새로운 세계


5학년이 되어 읍내로 이사했다. 초등학교는 걸어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등하굣길이 짧아지자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교 후에는 목적 없이 읍내를 돌아다녔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 구경을 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다 3~4층 규모의 작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광주 도서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날, 세상에 ‘도서관’이라는 곳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지금이야 학교마다 도서실이 있지만, 그 시절에는 학급문고만 있어도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1층은 텅 비어 있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자 쾌쾌한 종이 냄새가 먼저 나를 맞이했다. 데스크에는 남자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저, 책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자, 사서는 말없이 양식을 내밀었다. 칸을 꼼꼼히 채우고 도장이 ‘쾅’ 찍히는 소리를 들었다. 내 손에 들어온 대출카드 한 장은 세상과 연결되는 첫 번째 계단이 되어 주었다.


그곳에는 어린이 도서가 없었다. 두꺼운 책들 사이를 한참 서성이다 작은 빨간 표지의 책을 골랐다. 두께도 무게도 읽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책은 작았지만, 글씨는 깨알 같았다. 이사 오기 전까지는 오빠가 새 교과서를 받아오는 날만 기다릴 만큼 읽을거리가 드물었다. 그러니 새로운 이야기 자체가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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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을 만났다. 그날부터 이틀에 한 번꼴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열두 살의 나는 추리의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BC 살인 사건』, 『오리엔트 특급 살인』 같은 책은 내게 새로운 친구들이었다. 추리력은 끝내 익히지 못했다. 성미가 급해 범인이 궁금하면 뒷부분부터 펼쳐보는 버릇 때문이었다.


현실 도피로서의 독서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추리소설의 긴장감은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미스터리한 사건의 진실을 쫓는 동안, 방치되고 구박받는 아이라는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속 포와로와 미스 마플은 어두운 미궁의 출구를 밝혀 주는 탐정이었다. 그들 곁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배경에 어떤 상처와 욕망이 숨어 있는지를 묻는 법을 배웠다.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의 분량에 익숙해지자 다른 문학 작품도 읽을 수 있었다. 무작정 아무 책이나 빌릴 순 없으니 책을 고르는 법도 익혔다. 그 시절엔 삽화가 조악했다. 그래서 제목과 차례를 보고, 페이지를 넘겨 아무 곳이나 읽어본 뒤 괜찮으면 골랐다.


내가 읽은 책들은 성인용이라 어려운 어휘가 많았다. 국어사전조차 흔치 않던 시절이기에 전후 문맥을 통해 뜻을 짐작하며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여러 번 다시 읽는 식으로 나만의 독서법을 익혔다. 그 시간 속에서 혼자 배우는 법을 익혔다. 그런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기반이 되었다.


읍내로 이사 온 뒤 친구가 생겨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책 읽기가 더 좋았다. 도서관에서 또래를 만난 기억은 없다. 어른들 틈에서 서가를 구경하며 도서관의 책 분류법을 익혔다. 서가는 나의 동료였다. 책 위치를 외우다 보니 잘못 꽂힌 책을 금세 알아보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을 자주 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착한 일을 한 듯해 혼자서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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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만든 뿌리


도서관을 만난 뒤로 ‘심심’은 사라졌다. 책을 읽는 순간, 완전히 그 속에 잠겨 세상과 단절되는 감각을 사랑했다. 부모님이 몇 번을 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던 어느 날, 새엄마가 “이놈의 책만 읽는다”며 도서관에서 빌린 책 표지를 ‘쩍’ 찢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일임에도 지금까지 울컥 차오르는 심정을 느낀다.


반납일이 되어 찢긴 책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돈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온몸을 짓눌렀다. 종이가 찢길 때 들었던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다시 맴돌았다.


도서관에 도착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책이 찢어지면 변상해야 하지 않나요?” 하고 물었다. 사서는 박스테이프를 꺼내 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숨통이 트였다. 무력한 아이가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책 속에 몸을 숨기는 일이었으므로.



최근 읽은 『다정한 나의 30년 친구, 독서회』에서 저자 역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 늘 다투던 부모님 때문에 현실이 지옥 같았다고 했다.


자신에게 책은 현실도피 수단이자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주는 학교였고 괴로운 마음을 승화시키는 공간이었다고 했다. 유년기에 자발적으로 독서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도망칠 곳이 필요한 사람임을 새삼 깨달았다.


내 독서 이력은 자랑이라기보다 상처에 가깝다. 그러나 상처는 굽어서도 자라는 뿌리처럼 나를 붙들었다. 그 경험 덕분에 지금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언젠가 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이들에게 용기의 지팡이가 되기를 바라며.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시에게 위로받은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 4장. 시가 가르쳐준 이상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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