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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휴학과 빚, 글쓰기로 버틴 시간

by 어스름빛

중년이 되면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계속 만날 수밖에 없어서일까? 과거를 추억하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20대를 가장 그리워들 한다. 그러나 나는 20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자본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실감했던 시절이기에.


‘접속’으로 이루어진 만남


접속이란 단어는 지금은 흔히 쓰이지만, 199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인터넷이 생기고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쓰이게 된 용어이다. 1997년은 영화 <접속>이 개봉했던 해였다.


그해 대학에 입학한 나는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인터넷 사용법을 배웠다. 집에 컴퓨터가 없어 PC 통신 사용 경험이 없었기에 인터넷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단어만 입력하면 검색으로 정보를 찾을 수 있다니. 호기심이 많았던 나에게 최적화된 해결사였다.


인터넷에서 처음 ‘접속’한 사람은 김영하였다. 당시에 신경숙, 은희경, 박민규, 한강, 김영하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던 중이었다. 김영하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두주자’라는 말이 붙을 만큼 혁신적인 작가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을 땐 통쾌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죄라고 말하던 ‘죽음’을 권리라 부른 대담함에 감탄했다. 인터넷 창에 그의 이름을 쓴 건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하의 홈페이지를 찾을 수 있으리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에게 보낸 이메일에 답장이 올 거란 기대도 하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답장을 받았다. 아쉽게도 이메일을 만들 줄 몰라서 친구의 이메일로 답장을 받아 증거를 제시할 준 없다. 인터넷이 열어준 새 세상에 마냥 빠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한 이유는 등록금 때문이었다. 결국 휴학을 했다. 새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고등학교만 졸업시키면 알아서 살 줄 알았다”였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교회 인맥으로 얻은 첫 아르바이트는 피아노 학원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전공과는 무관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좁은 연습실에 앉아 있으면 초등학생들의 서툰 건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내 삶도 반복되는 음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1년 후 복학했지만 연이어 다닐 수는 없었다. 휴학은 한 학기씩 두 번 이어졌고, 결국 같은 학번 친구들보다 2년 늦게 졸업했다. 대출은 계속 불어났다. 국가장학금이 없던 시절, 장학금이 아니면 대출뿐이었다.


살아남는 방법으로서의 글쓰기


글쓰기는 생존을 위한 도구였다. 틈이 생길 때마다 PC방에 가서 온라인을 헤맸다. 이제는 사라진 ‘프리챌’은 독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창구였다. 헌책방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나 한국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현실의 비루함을 토로하며 버텼다. 동호회 사람들이 남긴 댓글에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다.


만약 그때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버텼을까. 쓰는 행위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지쳐 버렸을 것이다.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글쓰기는 끝내 나를 붙잡아 준 유일한 자산이었다.


짧은 접속으로 끝난 소설가와의 만남과 달리, 온라인은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게시판 속 대화는 신촌 근처 헌책방으로 옮겨 갔고, 낯선 닉네임들이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연결을 배우게 되었다.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온라인에서 만난 책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8장. 화면 너머에서 만난 책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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