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면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을 계속 만날 수밖에 없어서일까? 과거를 추억하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20대를 가장 그리워들 한다. 그러나 나는 20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자본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실감했던 시절이기에.
접속이란 단어는 지금은 흔히 쓰이지만, 199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인터넷이 생기고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쓰이게 된 용어이다. 1997년은 영화 <접속>이 개봉했던 해였다.
그해 대학에 입학한 나는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인터넷 사용법을 배웠다. 집에 컴퓨터가 없어 PC 통신 사용 경험이 없었기에 인터넷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단어만 입력하면 검색으로 정보를 찾을 수 있다니. 호기심이 많았던 나에게 최적화된 해결사였다.
인터넷에서 처음 ‘접속’한 사람은 김영하였다. 당시에 신경숙, 은희경, 박민규, 한강, 김영하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던 중이었다. 김영하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두주자’라는 말이 붙을 만큼 혁신적인 작가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을 땐 통쾌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죄라고 말하던 ‘죽음’을 권리라 부른 대담함에 감탄했다. 인터넷 창에 그의 이름을 쓴 건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하의 홈페이지를 찾을 수 있으리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에게 보낸 이메일에 답장이 올 거란 기대도 하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답장을 받았다. 아쉽게도 이메일을 만들 줄 몰라서 친구의 이메일로 답장을 받아 증거를 제시할 준 없다. 인터넷이 열어준 새 세상에 마냥 빠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한 이유는 등록금 때문이었다. 결국 휴학을 했다. 새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고등학교만 졸업시키면 알아서 살 줄 알았다”였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교회 인맥으로 얻은 첫 아르바이트는 피아노 학원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전공과는 무관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좁은 연습실에 앉아 있으면 초등학생들의 서툰 건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내 삶도 반복되는 음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1년 후 복학했지만 연이어 다닐 수는 없었다. 휴학은 한 학기씩 두 번 이어졌고, 결국 같은 학번 친구들보다 2년 늦게 졸업했다. 대출은 계속 불어났다. 국가장학금이 없던 시절, 장학금이 아니면 대출뿐이었다.
글쓰기는 생존을 위한 도구였다. 틈이 생길 때마다 PC방에 가서 온라인을 헤맸다. 이제는 사라진 ‘프리챌’은 독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창구였다. 헌책방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나 한국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현실의 비루함을 토로하며 버텼다. 동호회 사람들이 남긴 댓글에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다.
만약 그때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버텼을까. 쓰는 행위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지쳐 버렸을 것이다.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글쓰기는 끝내 나를 붙잡아 준 유일한 자산이었다.
짧은 접속으로 끝난 소설가와의 만남과 달리, 온라인은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게시판 속 대화는 신촌 근처 헌책방으로 옮겨 갔고, 낯선 닉네임들이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연결을 배우게 되었다.
*다음 화 예고*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온라인에서 만난 책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8장. 화면 너머에서 만난 책과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