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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마흔의 창업 : 읽고 쓰는 직업

- 독서논술 교사로

by 어스름빛

마흔, 첫-을 다시 배우다


나이가 들수록 ‘첫-’이라는 접두사를 붙일 일이 줄어든다. 설렘이 줄어드는 이유도 대부분의 경험이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반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마흔의 ‘첫-’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유난히 더웠다던(그러나 올해가 더 더웠다고들 하지만) 2018년 여름 하반기, 생애 처음으로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새집 특유의 접착제 냄새가 났지만, 지금 떠올리는 건 소나무 향이다. 새집 냄새를 잡겠다며 뿌렸던 피톤치드 스프레이와 편백 방향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첫-’과 ‘새’가 어울려 향긋한 흔적으로 남았다.


신물 날 정도로 익숙한 이사였지만 처음으로 설레는 이사였다. 아무도 살았던 흔적이 없는, 온전한 깨끗함도 특별했지만 ‘첫-’ 개인사업자가 되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커다란 6인용 책상, 책장, 칠판, 마카, 학용품 등을 구매하며 두려움보단 포부가 앞섰다.


‘국어’라는 교과를 가르치는 것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더 나답다고도 생각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마케팅이었다. 입주민 카페와 지역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학교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아파트 단지를 돌며 현관 앞에 전단지를 붙였다.


문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고, 학생들이 등록했다. 소규모였지만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꿈꾸었던 교육의 이상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부터 ‘학생 중심 교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수업의 주체는 학생이고, 교사는 안내자이자 조력자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 위해 강의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학생들 역시 모둠 활동보다 강의식 수업을 선호했다. 소위 ‘학군지’의 아이들일수록 그랬다.


모둠 활동은 조 편성부터 역할 나누기, 발표 준비까지 매 단계에서 갈등과 부담이 생겼다. 혁신학교 담론의 확산으로 모둠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의문이 들었다.


이미 대학 시절 조별 과제를 통해 이 방법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상은 모두 힘을 합쳐 최적의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이겠다. 현실은 소수의 학생이 대부분을 책임지게 된다.


대학생들도 이런데, ‘입시’라는 중요한 순간을 눈앞에 둔 사춘기 학생들에게 자발적인 협동심을 기대하는 것은 과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모둠 활동은 최소화하고, 대신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면서도 평가까지도 공정한 교사가 되기 위해 애썼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안내자’나 ‘조력자’의 역할을 하게 된 건 독서논술을 가르치면서부터였다. 독서논술 교육의 목표는 ‘학생’이 책을 잘 읽고 글을 잘 쓰게 하는 것이다.


교사가 대신 읽거나, 써줄 수는 없다. 수업 과정에서 읽기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는 있지만, 글은 스스로 써야 한다. 책을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말을 줄였다. 학생들이 생각하고 말하게 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고, 그 답에 대해 피드백을 했다. 그러자 학생들의 생각이 서서히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적응을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3–4학년 아이들이었다. 독서논술 수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초등학생을 가르쳤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사랑을 주면 그대로 돌려준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정리하는데 칠판 끝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선생님 사랑해요.”


열 달 가까이 함께했던 여학생이 남기고 간 글씨였다.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며칠 뒤 다시 온 아이가 “선생님, 이거 지우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다.


학교에서의 국어 수업보다 집에서 했던 독서논술 수업에서 더 큰 보람을 느꼈다. 홍보와 수업료 정산 같은 자영업자의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내가 애쓴 만큼 아이들은 나를 믿었다. 학부모님들도 작은 선물로 응원해 주었다.


이상과 시험 사이


2018년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가 되면서 수능 국어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갔다. 내가 창업할 무렵의 일이다. 당시 나는 학생들이 잘 읽고 잘 쓰게 되는 교육법을 터득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때였기에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잘 읽고 잘 쓰기를 교육하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생들은 시험 한 달 전이 되면 독서를 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국어 교사를 오래 했고 국어 자체를 좋아했기에 시험 대비를 도와주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국어 시험을 싫어하라는 법도 없었다. 돈을 벌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기말고사가 모두 끝난 어느 겨울. 몇몇 학부모가 수능 국어 대비를 부탁받기 전까지는. 나만의 노하우가 막 생긴 1년 후였다. 나는 어려운 책을 읽을 계획이었지만 몇몇 학부모의 요구로 고등 국어를 대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어영역의 난이도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80분 안에 45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배경지식이 없이는 성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문이 늘어났다. 비문학(독서) 영역은 꼼꼼한 정독 훈련이 필요했고, 문학 영역은 개념어 암기와 해석 틀이 필수였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 수능 국어영역은 고난도 문제 풀이 기술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적용하느냐를 요구한다. 결국 반복 훈련에 익숙한 학생이 점수를 가져간다. “국어는 집 팔아도 안 된다.” “국어는 타고난다.” 같은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현재는 ‘프루스트와 오징어’로 재출간)를 읽은 나는 알고 있었다. 읽기는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었다. 글을 읽는 뇌가 형성된 역사는 너무 짧다. 결국 후천적 노력이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다양한 책을 접하고, 어휘를 공부하고, 정독하는 습관을 들이면 수능 국어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이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 논술을 가르칠 때는 쓰기가 읽기보다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읽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읽기는 ‘(영상) 보기’가 아니다. 글을 읽는다는 의미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읽은 내용을 토대로 사고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독서를 ‘저자와의 대화’라고 말하곤 한다. 지면 너머의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읽어내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상대방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어도 소통은 어렵다. 하물며 눈앞에 없는 작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럼에도 ‘주제를 읽는 방법’은 있다. 문학에는 절대론, 효용론, 반영론, 표현론과 같은 관점이 있다.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부터 가르친다. 이런 관점을 초등학생 때부터 익힌다면 국어 영역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섬세한 읽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과제는 점점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지 않게 만드는 교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용을 자세히 질문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모습은 돌이켜보면 초조함의 산물이었다.


‘읽기 쓰기를 사랑하는 평생 독자’를 양성하겠다는 포부와는 점점 멀어졌다. ‘꼼꼼하게 잘 가르치고 국어 성적이 잘 나오게 해 주는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에 목숨을 걸게 되면서 국어 성적이라는 성과에 집착하게 된 스스로의 모순에도 지쳐갔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점점 더 괴팍한 선생님이 되어가는 자신을 멈추고 싶었다.


학계는 어떨까. 지금의 국어영역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까. 이 시험은 대학에서 실제로 필요한 ‘읽고 쓰는 능력’과 연결되지 않는다. 대학 수업은 전공 서적을 읽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리포트나 논문을 작성하는 읽기와 쓰기로 귀결된다. 수능 시험이 이러한 능력을 기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알고 싶었다.


또한,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지면서 비판적 사고가 더더욱 필요해졌지만, 정작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사고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비판적 사고를 가르칠 수 있을까?’ 궁금했다.


현장에서 품었던 의문을 학문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등록금이 저렴한 대학원을 찾고 또 찾았다. 여러 곳을 비교한 끝에 한 곳으로 마음이 정해졌다.



* 다음 화 예고*

-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화에서는 만학도가 되어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16장. 대학원생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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