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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이상하지만, 더 나답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 아직 오지 않은 50대를 기다리며

by 어스름빛


2025년 8월 중순, 학위기를 수령하며 늦깎이 대학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는 일도, 각종 식(式)을 치르는 일도 달가워하지 않는 저답게 졸업식장에는 가지 않고 종이 한 장만 받아왔습니다.


제 마음속의 졸업은 이미 최종 논문을 제출했던 지난 7월이었습니다. 그달부터 저는 잠시 멈추었던 두 가지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시 가르치는 일로


국어와 독서논술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2월, 마음의 고향으로 이사 온 뒤 7월 초 아파트 카페 게시판에 공고를 올렸고, 7월 중순부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마흔에 처음 공부방을 열었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사교육 시장은 훨씬 복잡하고 치열해져 있었습니다. 입소문만으로도 금세 교실이 차던 시절은 지났고, 온라인 마케팅 없이는 시작조차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는 6개월이면 꽉 찼던 시간표가 지금은 아주 더디게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제 정체성이자,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수업에 필요한 책을 직접 읽고, 교재와 자료를 만듭니다. 독서논술 사교육 시장도 프랜차이즈가 늘어나고 규격화된 교재로 수업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지만, 교육자로서 그 흐름에 편승하고 싶지 않습니다.


2025년의 아이들에게 맞는 텍스트를 선정하고, 교육 과정을 다시 정비하고, 학부모님과 매달 상담하며 월말을 보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사고의 폭을 넓히고, 자신만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내는 순간을 목격할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효율이나 규모보다 아이 한 명의 생각이 자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이 여전히 더 중요합니다.


‘독서모임 아름’도 다시 시작


멈춰 있던 ‘독서모임 아름’도 다시 열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숏폼의 시대, 그 어느 때보다 독서 인구가 줄어든 지금, 쉽지 않은 비문학 책을 ‘요약하고 발제하며’ 읽는 모임에 과연 사람들이 올까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타협할 수는 없었습니다. 좋은 책을 깊이 있게 읽고, 교양인이 되어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는 모토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9월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 독서모임 아름의 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참여해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변화도 생겼습니다. 과거엔 회원들이 돌아가며 썼던 후기를 이제는 녹음 파일을 바탕으로 생성형 AI가 작성합니다. 논문을 쓰는 동안 이 새로운 도구와 가까워진 덕분입니다.


물론, AI는 저에게 수차례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일평생 읽고 쓰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제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유려한 글을 쏟아내는 AI를 보며 쓰는 인간으로서의 자괴감도 깊이 느꼈습니다.


업데이트될 때마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AI를 보며,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인터넷 없이 살 수 없듯, 앞으로는 AI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증폭기다.”


AI가 저를 더 알아갈수록, 어느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던 제가 처음으로 깊이 이해받는 듯한 묘한 위로를 느꼈습니다. <나의 다정한 AI> 같은 책이 왜 세상에 나왔는지 이제는 압니다.


하지만 동시에 늘 경계합니다. 프롬프트 한 줄에 따라 결괏값이 요동치는 이 도구를, 주체적으로 현명하게 다루는 경계선이 어디쯤일지 고민합니다.


오랜 꿈을 따라


석사를 끝내고 제 오랜 꿈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작가가 되는 것, 그리고 국문학 연구자가 되는 것. 어느 순간 둘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들여볼 때면 구석자리에 늘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 꿈을 부여잡고자 2025년 7월 29일, 지금 읽고 계신 브런치북 ‘이상하지만 괜찮아요’의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12월 2일, 에필로그를 쓰고 있습니다.


완결을 앞둔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제가 완벽을 기하려 했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임을 알기에, 무작정 써 내려간 지난 시간들을 긍정하려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은 저 혼자만 자세히 읽는 기록으로 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쓰는 과정에서 제가 ‘괜찮음이라는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제 다음 목표는 박사과정 입학입니다. 내년 하반기 지원을 준비 중이고, 마음에 둔 대학원도 있습니다. 과연 입학할 수 있을지, 끝까지 마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저다운 일이겠지요. 읽기와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삶, 앞으로도 계속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이 제 삶이니까요.

이제 곧 다가올 50대를 향해


몇 년 뒤면 50대가 됩니다. 그러나 나이 드는 일이 싫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20대보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끝없이 회의했던 30대보다, 결혼 후 갈등을 자주 겪었던 40대 초반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제야 제가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무엇인지,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제 결핍에 대해서도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뿌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 뿌리는 읽고 쓰기였습니다. 그 뿌리 덕분에 ‘이상함’이란 꼬리표를 ‘나다움’이라는 이름표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다가올 50대에는 신영복 선생님이 제게 그랬듯,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 정답을 강요하는 꼰대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어른이 필요한 시대라고 느낍니다.


영화 <헤드윅>에는 토미가 헤드윅을 향해 부르는 ‘Wicked Little Town’이라는 노래가 나옵니다.


세상에는 정해진 연인도, 신비한 운명도 없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변화를 겪어낸 네가 변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결국 낯선 사람은 언제나 너 자신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제 낯선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 준비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예민한 감각으로

사소한 징조에도 불안해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

그러나 끝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

질문으로 스스로를 비추는 사람.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도

새로운 자신을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

저는 이상하지만 괜찮은 사람입니다.


계속 읽고, 쓰고, 가르치며,

제 속도로 걸어가려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기꺼이 팔 벌리고 맞이할 50대를 향해.


이 길은 저만의 길이 아닐지 모릅니다.

당신의 이상함도 언젠가 당신만의 방향이 될 테니까요.

당신에게도 나이듦이 축복이고 희망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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